전동휠체어를 타고 밝은 표정으로 나타난 박은수(62·사법연수원 12기) 법무법인 율촌 고문변호사는 "장애인으로 태어나 휠체어를 타며 가장 좋은 점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모두 '감사합니다'로 인사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문 하나를 거치더라도 도움의 손길이 닿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앓았던 소아마비로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온 박 변호사의 삶은 투쟁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자칫하면 원망과 부정적인 마음만 가득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긍정과 열정의 힘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다.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판사에 임용됐으며, 척박한 토양에서 장애인 스포츠 활성화를 위해 동분서주한 선구자였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을 지냈고, 18대 국회의원으로 장애인을 위한 활발한 의정활동도 펼쳤다. 무엇하나 거저 얻어진 것은 없었다. 장애인을 향한 차별과 배제의 환경속에서도 긍정의 가치를 행동으로 실천하며 늘 정면돌파해왔다. '행동하는 행복주의자', '행복전문변호사' 인 그를 지난 27일 강남구 테헤란로 율촌 사무실에서 만났다.
"어린시절부터 대학까지는 사실 떠올리기조차 싫습니다. 너무너무 고생을 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하느님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로 시작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6·25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사회 전반이 혼란스러웠던 시절,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1956년 대구에서 태어난 박은수(62·사법연수원 12기) 법무법인 율촌 고문변호사는 유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에는 소수약자 문제에 무관심, 그 정도에 그치지 않고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했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부딪쳤죠. 장애인 관련 법도 없을 때이다보니 모든 게 교장 선생님 마음대로였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못 다닌다'고 입학을 거부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자연히 '가능'보다는 '불가능'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안 된다', '안 된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누군가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 '판사가 될 거에요'라고 말하면 좀 배웠다는 사람도 '아, 장애인은 판사가 못돼' 이렇게 쉽게 얘기를 하더군요. 진실일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저를 걱정해 잘 선택하라는 좋은 취지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지만, 우연히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어린 초등학생은 그런 것 하나하나가 큰 좌절이었고 상처가 됐습니다. 하루하루 스스로를 위로해가며 이겨내야 했습니다."
위장된 축복. 1982년 어렵사리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법관에 임용되지 못한 그 때를 박 고문은 이렇게 표현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축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위장된 축복이라고 할까. 그때도 사실 대단한 정의감이라기보다는 당장 억울한 마음이 컸습니다. 그렇게까지 공부를 했고, 내 힘으로 준비해 국가에서 요구하는 자격을 다 갖췄는데…. 더 중요한 것은 후배들이었습니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후배들의 용기를 꺾는 나쁜 선례가 되는 게 너무나 불명예스러웠습니다. 너무 힘들어 언론사에 근무하는 선배에게 상의 했더니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 일주일 동안 제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그 힘으로 판사가 될 수 있었죠. 제가 만약 그때 무난히 판사가 됐다면 지금 이자리에 올 수 있었을까요."
원망·부정적 마음 대신
긍정·열정으로 새길 개척
사법부의 부당한 처사에 당당히 맞선 박 변호사는 1983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의 임관은 대한민국 장애인 역사에 한 획을 그으며, '장애'를 이유로 취업이나 승진에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는 기준을 마련한 중요한 선례가 됐다. 판사에 임용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또다른 도전에 나섰다. 바로 '장애인 스포츠'였다.
"판사가 되고보니 각 법원마다 있는 테니스장이 훌륭했습니다. 판사들이 테니스를 치는 것을 보며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러다가 외국에서는 장애인들도 스포츠를, 테니스를 즐긴다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제가 뿅갔달까요(웃음). 어떻게 휠체어를 탄 사람이 테니스를 하나 조사해보니 휠체어테니스는 투바운드에 공을 넘겨주는 식으로 룰만 변형시켜주면 가능했습니다. 장애인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거죠. 그게 너무나 하고 싶어 거금을 들여 테니스를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코치를 모셔와 시작한 휠체어 테니스. 5㎞의 로드워크(roadwork)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어느덧 시합까지 가능한 수준으로 기량이 올랐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휠체어 테니스 대회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국제휠체어 오픈에 참가했다. 시간을 쪼개 일본어 공부까지 해가며 참가한 첫 데뷔 경기에서 그는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며 또한번 모두를 놀라게 했다.
"우승을 계기로 대구 지역에 휠체어 테니스 대회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최근 정현 선수가 8강에 올라가 화제가 된 호주오픈을 포함해 그랜드 슬램이라는 대표적인 4개의 국제 테니스 대회는 모두 휠체어 테니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때 휠체어 테니스를 보여주기 위해 대구 지역 유지들과 함께 호주오픈을 찾아갔습니다. 그걸 보여주면서 제가 빌다시피 설득을 했죠."
평창 패럴림픽 선수촌장 맡아
선수 뒷바라지까지
결국 그는 대구지역 신문사와 함께 199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휠체어 테니스 대회인 '대구오픈'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박 고문은 대구 달구벌종합스포츠센터 관장과 대구시 휠체어농구단 단장 등을 맡으며 장애인 스포츠 활성화를 위해 쉼없이 달려왔다. 현재 서울시 장애인체육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최근 성황리에 폐막한 '평창 패럴림픽'의 선수촌장을 맡아 선수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 제가 가장 중점을 두고 추진할 일은 체육시설을 대폭 확대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장애인 뿐만 아니라 빠르게 진행중인 '고령화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패럴림픽 선수촌장을 하면서 안타까웠던 것도 수영장이나 기반 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운동이 어려운 장애인이나 노인이 하기에는 수영만큼 좋은 운동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수영장 확보 자체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쪽 일에 집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황금기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을 맡았던 2004년부터 2008년을 꼽았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장애인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관련 이슈들을 애정있게 챙기셨습니다. 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은 사실 노동부 산하기관인데 대통령이 직접 챙기니 신나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 청와대에 이런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거 장애인의 날이 되면 영부인이 병원에 가서 불쌍한 장애인을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는 식의 행사를 많이 했었는데 절대 하지말라고 했습니다. 장애인을 두번 죽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런 장면이 TV에 나오면 장애인 이미지가 그렇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일반시민들이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이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장애인도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세금내는 사람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그 취지를 이해했습니다."
박 고문은 공단 이사장 취임과 동시에 '삼성을 잡겠다(?)'고 공언했다. "장애인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통합과 참여'입니다. 특별대우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메인스트림에 통합되도록 모든 생활영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장애인 고용정책은 변두리에 작업장을 주고 '장애인이 만들었으니 기부하는 셈치고 하나씩 사주자'하는 식이었습니다. 이 건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죠. 장애인도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주류에 포함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장애인도 가장 대표적인 기업인 삼성의 직원이 돼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 총수들을 만나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고 입사시험에 합격했다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떨어뜨리지 말라고 약속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의 적극적인 노력덕분에 재임기간 동안 이전에 2%대였던 장애인 고용률이 공공기관은 3.1%까지, 민간부분은 2.9%까지 껑충 뛰었다. 체육을 비롯한 전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유로 장애인이 임용되지 않았던 초등교사도 260명가량이 일거에 교사로 발령나는 쾌거도 이뤘다.
현재 박 고문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성년후견'이다. 그는 18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성년후견제도 입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가 국회에 입성했을 때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 등 장애인문제를 해결하는 법들이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는데, 유독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법은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하다보니 그 답이 '성년후견'이었습니다. 특별법이 아닌 기본법인 민법을 고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독일도 일본도 모두 도입한 제도이니 우리도 더이상 늦지 않게 입법해야 한다고 설득해 법이 통과됐습니다."
'장애인의 친구' 변호사로…
성년후견에도 큰 관심
국회의원을 마치고 율촌의 일원이 된 박 변호사는 율촌이 설립한 공익사단법인 온율의 성년후견지원센터장도 맡고 있다. "특히 율촌에는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법률상 해야하는 2.9% 장애인 의무고용을 이렇게 직접 장애인을 고용함으로서 이행하고 있는 대형로펌은 율촌 하나일 겁니다. 부담금으로 대신하는 곳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만큼 율촌은 설립 때부터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맙습니다. 성년후견도 마찬가지입니다. 후견제도는 지적장애인을 돕기 때문에 변호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익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산관리는 법률지식이 있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사실상 변호사, 법조인들이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율촌에서는 설립자들이 단번에 이해를 하더라구요."
변호사가 흔치 않던 시절 장애인에게 변호사 친구가 되고 싶어 판사를 그만뒀다는 박 고문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목발을 짚고 해발 1915m에 있는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저는 지금 후배들을 굉장히 존경합니다. 과거에는 민주화가 중요해서 인권변호사라는 개념이 생겨났었는데, 최근에는 공익이라는 가치가 중요해져 공익변호사, '공변'이라는 새로운 단어까지 생겼으니 그런 일을 하는 후배들이 얼마나 기특하고 반갑겠습니까. 민주화에 기여를 못한 게 한평생 부끄러웠는데, 이제 후배들에게는 세상이 정말 좋아졌으니 세상을 믿고 자기 하고 싶은 일만 열심히 해도 참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