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이겨낸 힘이요? 늘 감사하면서 제가 받은 은혜를 사회에 다시 돌려주려는 의지에서 나오죠."
'긍정의 힘'이 넘치는 그에게서 구김살을 찾아볼 수 없었다. 김미애(49·사법연수원 34기) 법무법인 한올 대표변호사 이야기다. 그는 포항의 작은 어촌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10대 때 여공으로, 잡화점 점원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고 늦깎이로 야간 법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사법시험 도전 4년만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가난한 삶의 애환과 세상의 부조리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세상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늘어놓지 않고 밝고 건강한 기운으로 주변을 감동시킨다. 변호사가 된 후에는 보호소년과 미혼모 등 사회적 약자에 각별한 관심을 쏟아 부산지역의 명사로 자리잡았다. 여성변호사들로 구성된 여성 전문 로펌 한올을 설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가 성폭력 피해 여성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미투(Me Too)지원단'까지 이끌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불굴의 여공 신화'로 불리는 김 대표를 지난 달 23일 부산 연제구 거제동 한올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인생 역정과 철학을 들어봤다.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하정1리. 김미애(49·사법연수원 34기) 법무법인 한올 대표변호사는 50여 가구 남짓한 이 작은 어촌마을에서 60년대의 끝자락에 태어났다. 선주(船主)였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머니가 해녀 생활을 하며 가계를 꾸렸다. 근면했던 어머니는 쉬는 날도 없이 포구에 나가 물질을 했고, 덕분에 김 대표는 가난했지만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인한 어머니 때문에 부족함을 몰랐습니다. 항상 자식들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신경을 써주셨고,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에 대한 온정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는 포항 해변에 군 초소들이 꽤 많았는데, 어머니는 그곳을 오갈 때마다 군인들에게도 먹을 것을 나눠주시곤 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군인 아저씨들에게 건빵을 많이 얻어먹었지요(웃음)."
하지만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김 대표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가 암으로 쓰러졌다. 특별한 약이나 치료방법이 없던 시기, 어린 그는 어머니를 리어카에 태우고 40분가량 떨어진 예배당을 찾아가 병을 낫게 해달라며 기도를 드렸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해녀용 장화를 신고 바다에 가서 따개비나 군소를 잡아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4년간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다섯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다. 김 대표는 홀로 집에 남겨져 지독한 외로움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정말 막막했습니다. 혼자 대문도 없는 초라한 집에 남아 밤새도록 밀려오는 고독감과 먹먹한 그리움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어린 소녀가 겪기에는 너무 무섭고 버거운 현실이었죠. 그때 느낀 절대고독의 무게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김 대표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남들이 버린 참고서나 문제집을 주워다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풀어가며 명문인 포항여고에 당당히 합격했다. 하지만 '가난의 덫'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집에서 포항여고까지 가려면 2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버스만 4번을 갈아타야 했지요. 그렇지만 그보다 힘들었던 건 매일같이 이웃집에 차비를 꾸러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반 친구들이 나를 도와준다며 성금을 모아 줬습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이 모인 조회시간에 이 일을 자랑스럽게 말했고, 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길로 학교를 뛰쳐나와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후 김 대표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반여동 일대의 방직공장과 와이셔츠 공장을 전전하며 여공(女工)생활을 했다. 1980년대 중반만 해도 부산·경남 지역에는 크고 작은 섬유공장들이 많았는데, 여기서 일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어린 소녀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환경은 열악했다. 노동3권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기본권조차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8시간씩 3교대로 진행되는 강도 높은 노동이 이어졌다.
"야간근무 조에 편성되면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밤샘노동을 해야 합니다. 방직기계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실타래를 풀어내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지요. 자칫하면 사고가 나니까요. 근무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면 일하다 지친 동료 여공들이 작은 목욕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있는 모습을 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김 대표는 굳세게 자신의 운명을 돌파했다. 20대 초반에는 주경야독으로 일본어를 익혀 해운대 호텔 인근에 있는 잡화상에 취직했다. 급료가 박했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알뜰히 저축했다. 그렇게 모은 1000만원과 친구 아버지에게서 빌린 돈을 보태 1994년 작은 초밥 가게를 열었다. 제법 많은 수입이 들어와 경제적으로 많이 나아졌지만 김 대표는 늘 마음 한켠이 공허했다. "어린 시절, 어른이 되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낼 것만 같은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과 싸우다 보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요. 돈을 벌어도 충족되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법대를 선택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 때문이다. "한 번은 친구 오빠가 저를 보고 '미애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변호사하면 정말 잘 하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는 그냥 무심코 흘려들었는데, 공부를 다시 하기로 결심하니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일단 법대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김 대표는 초밥 가게를 처분하고 동아대 야간 법학과에 97학번으로 입학했다. 동갑내기들보다 10년이나 늦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1학년 때부터 고시반에 들어가 사법시험 공부에 몰두했다.
"돌이켜보면 참 무식하게 공부했던 것 같아요. 요령 피우지 않고 교과서를 붙들고 무작정 회독(回讀) 수를 늘렸습니다. 1차 시험 전 곽윤직 교수님 민법 시리즈만 10번 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독하게 책을 파고들었던 김 대표는 고시에 도전한 지 4년 만인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서른 네살 때였다. 그런데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보다 자신을 격려해준 지인들과 모교,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이 앞섰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회적 채무'를 갚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굳은 믿음이 생겼다.
"단지 돈만 벌 생각이었다면 저는 변호사를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게는 '빚진 자의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장학금을 주며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모교와 지역 사회의 도움이 컸습니다. 저도 받은 만큼 그 선의(善義)를 공동체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5년 부산에서 개업한 김 대표는 늘 '공익'을 염두에 두고 활동했다. 모진 풍파를 헤쳐나온 그이기에 보호소년들과 미혼모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약자들에게 먼저 손이 갔다.
아버지 사업실패, 어머니 암으로 잃고 5남매 뿔뿔이
방직공장·잡화점 등 전전해도 배움의 끈 놓지 않아
늦깎이로 야간대학 진학… 사시도전 4년 만에 '쾌거'
"어떤 일이든 진정성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가정법원과 소년원, 구치소 등을 돌면서 뭔가 제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는지 먼저 묻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이런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던 분들도 점차 제 진심을 이해하고 다양한 만남을 주선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숲속학교, 국제금융고 학생들과 만나 제 인생이야기를 들려주며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활동은 제게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겁니다."
여성 인권에도 관심이 많았던 김 대표는 지난해 2월 여성변호사들로만 이뤄진 법무법인 한올을 설립했다. 고문을 맡고 있는 대한사회복지회를 통해 아이를 입양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언니를 대신해 조카까지 거둔 자발적 '싱글맘'인 그는 여성전문 로펌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한다.
"2013년 부산변회 인권위원회 산하에 여성·아동인권소위원회를 만들고 미혼모 쉼터를 지원하는 일을 하면서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2016년 부산변회를 방문한 일본 후쿠오카 변호사회의 하라다 나오코(原田直子) 회장이 여성으로만 구성된 로펌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극을 받았습니다.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실사까지 하면서 여성 로펌의 가능성을 엿봤지요. 돌아오자마자 법무법인 설립에 착수했습니다."
2005년 부산서 개업… '빚진 자의 마음'으로 공익활동
보호소년·미혼모 등 사회적 약자에 먼저 손 내밀어
1인 활동에 한계… 여성 변호사들만의 법무법인 설립
이후 경남지역 인권 변호사인 손명숙(50·30기) 변호사와 성매매·성폭력 피해 여성을 꾸준히 지원해 온 백혜랑(40·38기) 변호사, 변현숙(37·변호사시험 3회) 변호사 등이 한올에 합류했다. 백 변호사는 올 6월 부산시 아동권리 대변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여성 변호사들만 있어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공감능력'이라고 답했다. "상담을 할 때 여성만의 공감능력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요. 법리적인 접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고, 웃어줄 수 있거든요. 특히 성폭력,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정서적으로 위축돼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저희 사무실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이야기 합니다. 가사사건의 경우 남성분들도 여성변호사들이 여성의 심리를 더 잘 알 것 같다며 일부러 찾아올 때가 있어요."
김 대표는 한올에 '여성·아동 인권센터'를 부설하고 여성 및 아동청소년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항하는 공익소송도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촉발된 미투운동을 계기로 부산지방변호사회(회장 이채문)회에 '미투(MeeToo)지원단' 창설을 건의하고 초대 지원단장을 맡았다.
주어진 현실 탓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강점에 주목
항상 어떻게 하면 최선의 결과 낼 수 있을지 고민
역경 많은 삶이지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
"한 번은 서울에 있는 변호사님이 경남 김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인데 제가 맡아서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왜 김해 사람이 서울까지 갔는지 궁금해서 당사자에게 연락을 해보니, 성폭력 가해자가 지역 유지여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서울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해자는 유명극단의 대표였고, 피해자는 사건 당시 미성년자였습니다. 10년도 더 지난 성추행 사건이지만 피해자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대표는 구속됐고 이 사건은 경남지역 미투 관련 제1호 구속사건이 됐습니다."
역경이 많은 삶이었지만 김 대표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한다. 주어진 현실을 탓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강점에 주목하고 어떻게 하면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
"분노와 질투심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타고난 무언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남에게 시선을 돌리면 자신이 가진 보석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 다릅니다.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항상 바뀝니다. 상황은 본질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