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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라운지 커버스토리] ‘공익·인권’ 외길 13년… 황필규 ‘공감’ 변호사
박미영 기자
2018-12-06 09:17
"인권문제는 인식의 변화가 있을 때 해결의 단초 보여"
"가장 힘든건 몸이 하나뿐이고 하루가 24시간 밖에 없는 것이죠(웃음)."
국내 첫 비영리 공익인권법재단인 '공감'을 이끌고 있는 황필규(50·사법연수원 34기) 변호사는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2005년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공익인권변호사로서 '자유와 평등을 향한 끝없는 여로'에 투신했다. 특히 난민 문제에 큰 관심을 쏟았다. 지난 봄 제주에서 예멘인 난민 신청자가 급증하면서 우리에겐 먼 일로만 여겨졌던 '난민'이라는 이슈가 사회문제로 떠올랐지만, 13년전만 해도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그들과 함께 하며 국경을 넘어 희망을 만들기 위해 국내외를 동분서주했다. 공익·인권을 위한 외길을 걷고 있는 황 변호사를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공감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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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30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학창생활을 보냈습니다. 그 친구들과의 공동체 생활에서 국적이나 피부색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분홍색 양말과 넥타이를 한 역사 선생님은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20세기 세계사의 다양한 사건들을 심도 있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의 강의가 좋았고 한국에서는 들을 수 없는 열린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었죠."

 

부친(父親)의 직장 발령으로 홍콩에 있는 국제학교에서 중학생 시절을 보낸 황필규(50·사법연수원 34기) 공감 변호사는 당시 생활이 공익인권변호사로서 자유롭고 열린 사고를 가질 수 있는 토양이 됐다고 했다.

 

부친 근무지 해외로 발령

홍콩서 중학시절 보내

 

"그 때는 80년대 초였는데, 한국은 군부독재시절로 언론통제가 심했던 시기였죠. 외국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저는 학교에서 열린 국제앰네스티의 양심수 사진전을 보면서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3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치른 국가시험 영어 과목 에세이에서 '감옥(prison)'에 대해서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황 변호사는 '양심수(prisoners of mind)'를 주제로 에세이를 썼다. 어린 나이였지만 국제적 시각에서 인권을 고민하면서 훗날 공익인권변호사로서 나아가는 첫 걸음이었다.

 

외국학생과 공동체 생활

자유롭고 열린 사고 축적


"한국에 돌아와서는 80년대 말 격변기를 겪으며 사회문제를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개인적인 선의와 선행만으로는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구조다'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이죠. 인권문제, 사회문제라는 것은 단순히 선량한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 즉 제도와 관행, 인식의 변화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해결의 단초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는 인권과 정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는 법률가를 꿈꾸게 됐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는 '향기를 풍기는 삶'을 꿈꾸면서 세상을 향해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한국 최초 공익인권재단

공감’ 문 열자 자원합류

 

"외국 생활의 영향이었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국제주의자'를 꿈꿨습니다. 국제인권법과 국제적 접근을 기초로 법률전문가로서 인권을 위해 일하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법대를 갔지만 법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겠다라는 마음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결혼한 뒤였는데, 배우자가 재워주고 거둬주고 해서 변호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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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권변호사를 향한 고민이 컸던 만큼 열정도 컸다. 

 

"사법시험 발표 직후부터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비는 시간조차 아까웠습니다. 제목에 '인권'이 들어간 세미나와 토론회에는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저를 초대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열정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외국인 보호시설 실태조사 계기로

난민에 눈 돌려

 

그런 그가 '공감'으로 향하게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2004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공익인권법재단인 공감이 문을 열면서 공감의 선배변호사들이 후배들과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후배가 참석해도 됩니까?"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공감의 문을 두드렸다. 

 

"공감의 일원도, 초대한 법조계 선배도 아닌 사법연수원생인 제가 계속해서 질문을 해대니 공감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것 같기도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며 공익을 추구하고, 그것도 개인이 아닌 조직의 형태라는 점 등에서 공감은 제가 꿈꾸던 곳이었습니다. 이후에 틈나는 대로 시도 때도 없이 공감에 들락거렸습니다. 접하면 접할수록 마음이 끌렸습니다."

 

2004년 10월 황 변호사는 무급 자원봉사자로 첫 출근을 하며 '공감'에서 공익인권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첫 소송은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 출신의 난민 신청

 

"사법연수생 시절 시보 때 선배 변호사를 따라 화성외국인보호소로 외국인보호시설 실태 조사를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변호사들이 바빠서 혼자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행형법령과의 비교, UN이주민인권특별보고관의 보고서 등을 참조해 이주민에 대한 단속, 구금의 법상·관행상 문제점을 최초로 포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이 연구가 이주민구금시설 조사의 기본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일을 하며 '돈 안되는 일은 법대 3학년생 수준의 법학지식이면 평생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주민 인권에 대한 관심을 시작으로 황 변호사는 공감에서 난민 관련 활동을 하기로 했다. 그가 맡은 첫 소송은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 출신의 난민 신청자를 위한 소송이었다.

 

"9명의 난민 신청자들은 만나자마자 한국 정부와 UN난민기구에 대한 강한 불신을 나타냈습니다. '단지 도와주려는 것 뿐인데 내가 왜 혼나고 있어야 하나'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보니 그들의 분노와 무기력감이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님을 알 수 있었어요. 그들은 2000년에 난민 신청을 냈는데 5년이나 지난 2005년에야, 그것도 기각 결정과 함께 '박해를 받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짤막한 이유만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8년 대법원서 승소

난민문제 공론화 불 당겨

 

그길로 황 변호사는 난민에 관한 문헌을 모두 찾아보았다.

 

"난민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황무지를 개척하는 심정으로 사건에 임했습니다. 기존 판례도 3개 뿐이었죠.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기에 역설적으로 단 하루면 국내 최고 난민법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슬프게했습니다. 의뢰인 한명 한명을 장시간 면담하고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모두 연락해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그 덕택이었을까, 2006년 1심에서 승소했고, 2008년에는 대법원에서 원고승소 판결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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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변호사로서 담당했던 첫 소송이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 기뻤습니다. 소송을 진행하면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행복했고, 난민법에 대한 이해도 높아져 보람 있었습니다. 가진 지식과 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인권을 위해 일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공익변론을 통해 실제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직접 경험했죠."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난민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난민 제도와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국회 차원의 토론회와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청회가 개최됐고 2008년에는 부분적이나마 난민과 난민 신청자의 처우가 처음으로 규정된 출입국관리법 개정도 이뤄졌다. 이어 2009년 난민법 제정안이 국회에 발의됐고, 2013년에는 마침내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이 시행되는 성과도 나왔다.

 

공익’ 변호사 시작할 땐

격려보다 우려·비판 많아

 

지난 5월 제주도 예멘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난민 문제에 대해 법무부는 난민심판원 제도를 도입하는 등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황 변호사는 단호하고 강한 목소리를 냈다.

 

"현행 법무부 난민위원회 이의신청 제도는 난민 신청자들의 이의신청권을 박탈하고 위원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제도입니다. 이의신청을 담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법무부 장관에게 의견을 내는 자문기구 비슷합니다. 독립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공무원 위원의 난민에 대한 전문성도 결여돼 있습니다. 더욱이 위원회에 누가 참여하는지, 언제 열리는지도 비밀이라 투명성과 절차적 공정성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제도가 이렇게 엉망이고 문제가 있는데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난민심판원만 만들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황 변호사의 활동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제인권변호사'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향후 계획은

국제인권센터’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

 

"필규의 생각의 씨앗, 제안 덕분에 우리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최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난민 권리 네트워크(Asia Pacific Refugee Rights Network, APRRN) 10주년 회의에서 초대 의장을 맡았던 앨리스 나 전 의장이 한 말이다. APRRN은 아시아 30개국, 300개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로, UN난민기구도 이 네트워크의 지역대표성을 인정하고 있다. 황 변호사는 국내에 난민에 대한 자료가 전무하던 시절 '구글링' 하나로 문을 두드려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인권세미나에 참석했다. 그 세미나에서 직접 A4 용지에 글을 적어 뜻을 함께 할 사람과 단체를 모은 것이 APRRN의 시작이었다. 

 

"앞으로 저의 계획은 공감에 '국제인권센터'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입니다. 기존 활동 경험을 체계화하고 더 많은 이들의 인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도록 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입니다."

 

풀뿌리 공익활동이 계속해서

유지·강화 되었으면

 

황 변호사는 내년이면 창립 15주년을 맞는 공감에 대한 소망도 덧붙였다.

 

"처음 시작했을 때, 어떻게보면 격려보다는 우려와 비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1~2년차 변호사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남의 돈 가지고 조직 운영한다는 게 가능할 것 같으냐는 우려들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해냈습니다. 부족했을 수 있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희 모델이 가장 좋은 모델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공익인권변호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 가장 큰 역할이 있다면 '비영리 공익인권법재단도 (한국에서 충분히 운영과 역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5주년을 맞아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정기 기부자와 정기 기부금이 늘어 한해 예산을 이를 통해서만으로도 안정적으로 꾸릴 수 있는 재정 기반이 마련됐으면 하는 점입니다. 또 수시로 들어오는 비정기적 기부금 등은 새로운 프로젝트 발굴과 실시에 활용해 풀뿌리 공익활동이 계속해서 유지·강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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