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재판을 해 온 최인석(62·사법연수원16기) 울산지법원장의 첫 인상은 겸손했다. 1988년 제2차 사법파동 당시 소속 법원 연판장을 직접 작성하고, 1994년 경상대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당시 법리에 따라 검찰의 영장 청구를 기각하는 등 강골(强骨) 판사로 여러 차례 주목 받았던 그였기에 이러한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흔들림 없이 사법부와 재판에 관한 철학을 전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정중한 태도에 가려진 대나무 같은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 소신에 따라 직언을 하는 탓에 그의 발언이 세간에 회자될 때도 있지만 최 원장은 대세를 좇거나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말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현실을 불편하게 여겼다. 자신의 고언(苦言)은 평생 몸담아 왔던 법원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됐음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반평생 꼿꼿하게 법대를 지켜온 ‘야전형 판사’인 그를 지난달 16일, 울산지법 법원장실에서 만났다.
최인석(62·사법연수원 16기·사진) 원장이 소년시절부터 법조인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경남 사천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청운의 꿈'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소년이었다. 심지어 고교 입학시험에 떨어지자, 아버지 일을 도와 전업 농부가 되겠다며 1년 동안 농사에 전념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낙방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께 바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공부를 접고 농사를 배우겠습니다'라고. 당시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도 않았구요. 제가 삼형제 중 둘째인데, 마침 자식 중 한 명쯤은 자신의 뒤를 이어 농부가 되기 원하셨던 아버지도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최 원장은 중학교 동창들이 고등학교에서 새 학기를 보내는 동안 들통을 지고 논밭에 나가 파종을 했다. 때마침 사천에서는 잎담배 재배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최 원장의 집도 담배농사에 뛰어들어 제법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살림살이가 나아지자 부친이 조용히 그를 불러 진학을 권했고, 이듬해 진주 대아고에 입학하면서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고교시절 국문학과를 지망했던 그는 대학 입시에서도 한 차례 고배를 마신 뒤 담임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1977년 부산대 법대에 입학했다. 두 차례의 낙방 경험 때문에 57년생인 최 원장은 두 살 어린 기해(己亥)년생 후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저는 법대를 다니면서도 판사나 검사보다는 이론을 연구하는 법학 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실 사법시험을 치른 계기도 사시에 합격하면 교수가 되는데 유리하다고 해서 시작했지요(웃음). 그런데 나중에 사법연수원을 다니면서 보니까, 저같은 사람이 대학원에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 중 학문 연구에 뜻을 둔 사람들은 오로지 교수직 하나만 바라보고 연구자로 치열하게 사는데,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고 제가 그 자리에 밀고 들어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교수가 되는 꿈을 접었습니다. 물론 그 시절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형사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
"전방 포병부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했는데, 사병이기는 하지만 맡은 업무가 꽤 논리적이고 치밀한 사고를 요구했습니다. 손 글씨로 공문도 많이 썼지요. 이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논리적 사고와 빠르게 글씨를 쓸 수 있는 훈련이 이뤄졌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 부분이 사법시험 2차에서 큰 장점으로 발휘됐습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인격적인 대우 받을 권리 있어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그는 1987년 아내가 교편을 잡고 있는 마산에서 판사로 첫 발을 내딛었다. 당시 정국은 급박한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6월 항쟁의 열기가 전두환 정권을 붕괴시켰고, 그 여파가 사법부까지 밀려왔다. 1988년 2월 노태우정부가 5공화국 당시 임명된 김용철 대법원장을 연임시키자, 소장 판사들이 반발하면서 '제2차 사법파동'을 일으켰다. 초임판사이던 최 원장도 거대한 물결을 피해갈 수 없었다. 최 원장은 마산지방법원의 연판장을 직접 작성했고,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렸다. 이 사건에 대한 소회를 묻자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당시 사건에 얽힌 비화를 이야기했다.
"사실 제가 앞장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동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석들이 먼저 나서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다들 거기에 수긍했습니다. 마침 제 방에 수동식 타자기가 아닌 최신형 전동 타자기가 있어서 우여곡절 끝에 제가 연판장 작성을 하게 됐어요. 연판장을 다 쓰고 나니 이번에는 '쓴 사람이 먼저 서명을 하라'고 해서 제 이름이 위로 올라가게 된 겁니다."
수갑 찬 상태 대중 앞에 드러내게 하는 건
월권행위
혹시 반골(反骨)로 찍혀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당시 300명이 넘는 판사가 파동에 관여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고 저도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인사이동이 몇 차례 있었지만 저를 포함해 다들 당연히 가야할 곳으로 갔지요. 사실 판사든 일반직이든 법원만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인사가 운영되는 곳이 없습니다."
그는 현재 진행 중인 법원 개혁에 대해 "대법원이 추진하는 일인 만큼 일선 법원장으로서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인사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초임판사 시절 제2차 사법파동…
연판장 작성 맡아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비대하다고 말하는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신규 보임이 없어지고 대법관추천위원회의 권한이 실질화된 지금 대법원장의 인사권은 그렇게 크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선 판사의 임용은 시험을 치르고 성적순으로 이뤄지니 관여할 여지가 없고, 재임용에 대해서도 10년간 쌓인 평정을 토대로 이뤄지는데 어떻게 대법원장이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그리고 전보인사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더라도 실무자들이 담당합니다. 대법원장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아닌지 감독할 뿐이지요.”
최 원장은 32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재판을 한 전형적인 '야전형' 판사다. 재판연구관이나 법원행정처, 사법연수원 교수 등 비(非) 재판보직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부산가정법원장과 부산동부지원장을 겸직할 때에도 자청해서 소액재판 일부를 담당했으며 제주지법원장으로 근무하던 지난해에는 야간에 소액사건 재판부를 신설해 재판에 나서기도 했다. 지금도 고(高)분쟁성 소액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그에게 판사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래도 법원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이라 생각
"30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면 '인간에 대한 예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인격적 대우를 받으며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직 폭력배 교도관들은 법정소란을 우려해 포승과 수갑을 채운 상태로 재판할 것을 건의합니다. 저는 이 때마다 피고인에게 방청석에 어머니나 아내, 여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봅니다. 피고인이 고개를 끄덕이면 ‘나는 당신이 모친이나 여자친구가 보는 앞에서 법정질서를 어지럽힐 정도로 상식 없는 사람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며 잘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러면 다들 우렁차게 ‘네’라고 답변합니다. 이렇게 풀어준 뒤 소란을 피운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예의바르게 행동합니다. 가족 앞에서 맹세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인격적 대우를 받은 점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무기징역형을 받고도 법정에서 보여준 인간적인 배려에 감사의 뜻을 전해온 수형자도 있었다.
재판 업무만 32년…
건강 등 고려 퇴임도 신중 검토
그의 ‘인권 감수성’을 보여주는 일화가 또 있다. 한 번은 교도관들이 피고인들을 포승줄을 묶은 상태로 100m가량 끌고오는 모습을 보자, 법원장에게 건의해 이를 막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수갑과 포승을 찬 상태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사법권에 부여된 권한을 뛰어넘는 월권행위"라고 지적했다.
"지금은 지하통로로 이동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잘 발생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수갑을 찬 피고인들을 사람들이 보는데서 이끌고 법정으로 걸어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근무하던 법원에서 진입로 양쪽에 자동차들이 주차돼 호송버스가 못 들어오게 되자, 교도관이 굴비 엮듯 소년범들을 데리고 걸어오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법원장 면담을 요청해 '사람을, 더군다나 소년들을 이런 식으로 대우해선 안 된다'고 말씀드리고 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했어요. 당시 법원장님도 제 말에 공감하시고 법원 진입로 양쪽에 연석을 놓아 차들이 주·정차 하지 못하게 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 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법원의 시급한 과제는
'법조 일원화 제도'의 정비
두 번째로는 ‘양심에 따라 소신껏 재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판사가 중심을 잡고 재판을 진행하면 절대로 외부에 휘둘릴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판사는 자기 ‘재판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재판에 관여하거나 혹은 개입하려는 세력은 항상 존재합니다. 물론 제도적으로는 공판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재판에 관여를 하는 것이 보장됩니다. 비공식적으로는 언론과 청와대, 국회, 정당, 사회단체 등이 재판에 개입하려고 하지요. 법원행정처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판사가 여기에 휘둘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판사가 소신이 있으면 재판 개입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도 재판장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재판을 여러 건 담당했었지만, 이러한 문제로 애로사항을 겪은 적은 없습니다. 물론 저도 관리자로 있으면서 구체적 사건에 대해 판사들에게 이러쿵 저러쿵 말 한 적이 없습니다. 판사는 양심에 따라 소신껏 재판에 집중하기만 하면 됩니다.”
단순히 법조경력 몇 년 있다고
해결될 문제 아냐
지난 달 전국의 대학교수들은 2018년을 총평하는 사자성어로 ‘임중도원(任重道遠)’을 선정했다. ‘등에 진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개혁 과정의 지난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다사다난 했던 것은 법원도 예외가 아니다. 백전노장인 최 원장에게 법원에서 가장 시급히 개선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그는 거침없이 ‘법조일원화 제도’라고 말했다.
"법조일원화 제도를 지금 당장 정비해야 합니다. 법조 경력 10년 이상의 사람만 판사로 수급하면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30대 판사들이 법원에서 사라집니다. 30대가 없는 직장·조직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대학에서 4년, 로스쿨에서 3년을 보내고 다시 10년 동안 이런 저런 경력을 쌓다보면 대부분이 40세를 훌쩍 넘기게 됩니다. 지금 법원에서는 50~55세의 판사들이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법관 경력으로는 대략 20~25년 전후가 되겠지요. 이 시기 고법 항소심 재판장 등을 맡으면서 각종 난제들을 해결하게 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 시기가 10년 정도 뒤로 후퇴하게 됩니다. 가동연한을 20년 남짓으로 본다면 법원이 '양로원화'되는 셈이지요. 또 10년 동안 로펌 등 자기 영역에서 기틀을 잡은 유능한 사람이 과연 법원 초임 판사로 올지도 의문입니다. 제가 볼 때는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왜 법원에서는 판사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판사는 판사대로 독특한 영역이 있습니다. 시간을 들여 판사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법조 경력이 몇 년 더 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판·검사, 변호사 각자 영역에서
집중 훈련받아야
최 원장은 법관을 지망하는 후배 법조인들을 위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건강 등의 이유로 퇴임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32년간 재판을 해온 노(老) 판사의 마지막 조언에서 법원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둘러싸고 과연 사법부를 신뢰할 수 있는지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법원에서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면, 법원은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점입니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검찰에서 주장하는 의혹들이 사실로 드러나더라도 그 외 99%의 법원 조직은 교과서대로, 공정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믿고 법원에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