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지방변호사회장에 오른 임선숙(53·사법연수원 28기·사진) 광주지방변호사회장은 숲과 나무를 함께 볼 수 있는 너른 시야를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큰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현미경을 댄 듯 치밀하게 접근한다.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오며 체득한 삶의 자세다.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나 지역사회의 거목으로 우뚝 서기까지 그는 여러 차례 성장통(痛)을 겪었다.
"저는 완도의 금일이라는 반농반어(半農半漁)촌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정말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새벽 2시에 일어나 바다로 가셔서 김을 딴 다음 해뜨기 전까지 김을 말려서 수확하고, 다시 바다에 나가 김을 채취하는 일을 반복하셨습니다. 추운 겨울 손이 부르터도 예외는 없었지요. 부모님을 도우려고 학교 가기 전에 김을 널고는 했는데, 어찌나 손이 시리던지 당시엔 '나는 절대로 섬에 시집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웃음)."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임 회장의 부모는 남다른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다. 임 회장을 비롯한 4남매의 등록금 부담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 어떤 일보다 '자식농사'를 우선했다.
어릴 때 꿈이 법조인… 사범대 권유 뿌리치고 법대로
입학 후 사회적 모순에 눈떠… 강의실보다 시위장에
"아버지는 등록금 시즌이 되면 우리 남매를 모아놓고 당신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지 꼭 말씀을 해주시곤 했지요. 당시에는 지루한 마음에 '어차피 주실거 그냥 빨리 주시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해 겨울 김농사로 번 돈 전부를 우리 교육비로 내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80년대 초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임 회장은 전남대 85학번으로 입학하면서 사법학과 수석을 차지했다. 부모님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사범대에 가길 원했지만, 그는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담임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법대 진학을 결심했다.
"어려서부터 막연하게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여성이 법대에 가는 경우가 드물었죠. 안정된 삶을 꾸리기 원하는 부모님의 기대도 있었기 때문에 영어교육과에 원서를 접수하려고도 했어요. 하지만 담임선생님이 제 마음을 읽었는지 사범대 원서를 써주시지 않았고, '꼭 가고 싶은 곳을 지원하라'고 응원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용기를 내 법대에 도전할 수 있었지요."
졸업하고 司試 준비
공부하는데도 ‘여성의 벽’ 절감
부모님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임 회장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사회적 모순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강의실보다는 각종 시위현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불의한 권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대의(大義)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선거 당시에는 '부정선거 감시단'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임 회장은 1990년 대학을 졸업한 뒤에서야 뒤늦게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사법시험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자 여성은 합격은커녕 공부하는 것만도 어렵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남성들은 절이나 학교 고시반에서 공부할 수 있었지만, 절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학교 고시반에도 남학생들이 거부해서 들어갈 수 없었죠. 이러다 보니 시험정보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결국 도서관, 독서실만 전전하다 함께 공부하던 여자 선후배 두 명과 의기투합해 서울 신림동으로 상경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그곳에서도 여성이 들어갈 수 있는 고시원은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 저희는 독서실에 조그만 간이침대를 두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다 같이 몸 상태가 안 좋아져 두 달 뒤 낙향하고 말았습니다."
임 회장은 1996년에 제3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전남대 출신 여성으로서는 첫 사시 합격자다. 합격 당시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는데, 신문사에 다니던 남편이 뒷바라지를 해줬다.
광주에서 변호사로 첫 발
다양한 공익소송에 참여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후에는 사법연수 회보(會報) 편집부 활동을 하며 다양한 진로를 고민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즈음 그는 보다 자유롭게 일하면서 자신의 색깔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변호사 직역이 제게 꼭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사에게는 공감 능력 뿐 아니라 문제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핵심 포인트를 찾아내 공박(攻駁)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의뢰인의 요구나 관점을 반영한 분쟁해결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또 당사자와 법원을 설득하는 힘도 있어야 하는데 저는 여기서 제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임 회장은 고향이나 다름 없는 광주에서 변호사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당시에는 지방에서 활동하는 여성 변호사가 드물었다. 그는 여성 법률전문가가 극히 적은 지방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임 회장은 많은 공익소송에 참여했다. 2012년 영화 '도가니'의 실제 무대였던 인화학교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했고, 양금덕 할머니 등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도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다. 지역 법조계가 임 회장을 주목한 것도 이 시기다. 활발하게 보폭을 넓혀온 그는 여성 변호사들이 회무 진출 등 대외적 활동에 소극적인 풍토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호사회 차원서 집행부에 여성 적극동참 풍토조성
‘구색 맞추기’ 아닌 실질적 대외활동 참여폭 넓혀야
"여성 변호사들은 사회 진출시기와 결혼·출산시기가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무 등 대외 활동은 변호사 업무와 가정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할 수 있는 것인데, 아무래도 여성들은 이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지요. 이렇게 초임 변호사 시절부터 단체 활동에 거리를 두면 나중에 참여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변호사회 차원에서 여성 리더십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이 집행부 임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장려하고,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단, 구색 맞추기 식으로 자리를 주는 게 아니라 여성들이 실제 경쟁을 거쳐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는 풍토와 분위기가 형성돼야 합니다."
임 회장이 이끄는 제55대 광주변회 집행부에는 김지현(44·39기) 변호사와 정다은(33·변호사시험 3회) 변호사가 각각 재무이사와 제2총무이사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후배 여성 변호사들에게 항상 "이후에도 제2, 제3의 여성회장이 나와야 한다"며 "대외활동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각계각층의 인사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변호사로서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한다.
최근 임 회장은 청년변호사 처우 개선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회원 간 유대와 결속이 강한 지방회 특성상 아직 세대 갈등이 표면적으로 불거진 적은 없다. 하지만 소송건수는 늘 제자리를 맴도는데 신규 변호사가 매년 50명씩 늘어나는 상황이라 청년변호사의 일자리, 처우 문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소송 건수는 제자리인데 신규 변호사는 매년 늘어나
청년변호사 고용·처우 등 실태조사 통해 대안 마련
"1월에 열린 대한변호사협회 대의원 총회에 참석했는데, 회칙 개정안을 둘러싼 토론과정에서 젊은 변호사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올 상반기에는 청년변호사들의 고용관계, 수임형태, 회무에의 접근성 등 실태조사를 통해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해 볼 생각입니다. 이를 토대로 하반기에는 구체적인 대안 마련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그는 지역사회와의 연대도 지속적으로 강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올 초 광주변회는 일부 국회의원에 의한 5·18 민주화운동 비하발언을 강하게 규탄하고 '5·18 왜곡행위 처벌법' 마련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광주 시민들의 마음을 변호사회가 직접 나서서 대변한 것이다.
"지역에 연고를 둔 변호사회로서,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성을 갖춘 만큼 변호사회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최근 광주에서는 5·18 왜곡·폄훼 발언에 대처하기 위한 비상시국회의가 만들어졌는데, 저희는 성명서를 내는 것 말고도 회의에서 필요한 법률자문이나 활동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지역사회와의 동질감·유대감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또 지역내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의 자녀가 학교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원하는 경우 '성(姓)'과 '본(本)'을 무료로 창설해주는 법률구조 활동도 계획 중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지역사회에서 사랑받고, 또 인정받는 변호사회가 되기 위한 밑거름라고 믿습니다."
지역주민들과 호흡도 중요
법률구조활동 등 확대
'시대정신(Zeitgeist)'을 구현하기 위해 언제나 세상을 정면으로 돌파해온 그는, 이제 미시적인 영역으로 눈을 돌려 일상에서의 부조리·차별을 극복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중반에는 여러 사회적 모순과 마주하면서 이러한 부분을 고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절 많은 학생들이 그렇듯이 먹고사는 문제와 무관하게 정의롭지 않은 현실에 분노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변호사들도 생활인으로서 충실하게 일상에 임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각자 속한 단체, 회사, 사무실에서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하는 태도가 필요하지요. 약자에 대한 유·무형의 폭력, 성차별 등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작은 부조리들을 개선하는데 적극 나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