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성'이죠." 한국계로 미국 연방검찰 최고위직을 지내고 매출액 기준 세계 20~30위권 글로벌 로펌에서 화이트범죄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는 김준현(Joon H. Kim) 클리어리 가틀립 스틴 앤 해밀턴(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 미국 변호사의 말이다. 클리어리는 법률서비스 품질로는 세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일류 로펌으로 알려져있다. 뉴욕 남부 연방지방검찰청에서 10년간 검사로 재직하며 명문 경영대학원(MBA) 출신의 국제지능범들을 수사하고, 2017년 3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10개월 간 검사장 직무대행을 맡으며 테러수사까지 지휘했던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의 수호자인 변호사와 판사, 검사가 국경과 직종을 넘어 '법의 지배(Rule of Law)'라는 대원칙을 매일 지켜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에게 중요한 권한을 위임 받은 이들이 하나 둘 예외를 만들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하는 사법제도의 토대가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맨해튼과 월가 등을 관할하는 뉴욕 연방남부지검은 미국 달러화가 관여된 중요 사건 대부분을 담당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무대다. 화이트칼라 범죄와 증권범죄, 각종 사기 범죄 등을 척결하고, 2001년 9·11 참사 전후로는 테러수사까지 도맡아 국제 안전 확보에도 기여해왔다.
2017년 봄, 미국 뉴욕시 맨해튼에 본부 청사를 둔 뉴욕 남부 연방지방검찰청이 발칵 뒤집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프리트 바라라 당시 검사장을 전격 해고 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의 부패와 조직범죄 등을 파헤쳐온 바라라 전 검사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검사 중 한 명이었다. 관할구역에 세계적인 은행과 증권·보험회사가 몰려있는 뉴욕 연방남부지검은 복잡한 금융범죄 등을 많이 다뤄 미국 약 100개 지방검찰청 중에서도 핵심으로 꼽힌다. 당시 현지 언론들은 이 사건을 행정부와 사법당국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달 20일 미국계 글로벌 로펌인 클리어리 가틀립 스틴 앤 해밀턴(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 서울사무소에서 만난 김준현(Joon H. Kim) 미국 변호사는 한국 언론에는 최초로 당시의 전말을 설명했다. 그는 2017년 3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뉴욕 연방남부지검 검사장 직무대행을 맡아왔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세계 각국을 오가며 자라
"바라라 검사장이 해고된 가장 직접적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이 건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답(Call Back)도 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의 절대적인 독립성을 신조로 여겨온 그는 대통령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조사에 지장을 줄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뉴욕 연방남부지검 검사로 활동한 것이 직업 인생의 가장 큰 영광으로 남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여의도 초등학교 다니다 미국행
스탠퍼드대 진학
바라라 전 검사장과 뉴욕남부지검은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벌여온 사업에 가장 많은 대출을 해준 것으로 알려진 도이체방크와 트럼프정부에 호의적인 폭스뉴스의 모기업인 21세기폭스 등과 관련한 조사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바라라 전 검사장이 해고된 뒤 수석부검사장이었던 그는 지검장 권한대행을 맡아 10개월간 중요사건을 지휘했다. 그가 가장 중점을 둔 부분도 '독립성'이었다. 지난해 1월 권한대행을 내려놓은 뒤 뉴욕타임즈는 특집기사로 그의 임기 중 활동을 자세히 다루며 '전임 보다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해관계자가 많고, 기업이나 정부의 이해관계(interest)도 많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압력(Press)이나 영향력 행사(Influence)는 상수로 봐야 합니다. 때문에 검사와 수사관들이 법과 증거에 따라 수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 검사장과 지휘 검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실제로 법과 증거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만 외형적으로 공정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버드 로스쿨 졸업 후
뉴욕남부지법 로클럭 1년
김 변호사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세계 각국을 오가며 자랐다. 고(故) 김재성 전 요르단 대사가 그의 부친이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서울 여의도 초등학교를 다녔고 외국에 있을 때도 방학마다 부모님과 친구들이 있는 한국을 다녀갔다. 그는 미국 명문 기숙학교로 꼽히는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뉴욕주(州) 변호사시험에 합격했고 뉴욕 남부와 동부 변호사 자격도 갖고 있다. 친형은 한화자산운용 대표를 맡고 있는 김용현 미국변호사로, 형제가 하버드 로스쿨 동문이다. 세 아들의 아버지로, 어머니와 형는 한국에 살고 있다.
"나라와 공동체라는 공익적 가치(Public service)를 증진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가치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본질적으로 변호사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Serve) 직업입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의뢰인의 이익을 먼저 살피는 직업입니다. 다행히 검사로서 국가(미국)를 위해 일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국가(한국)를 위해 일했듯이 말입니다."
뉴욕서 검사생활 10년
한국계로서 최고위직 지내
그는 1995년 인턴(summer associate)으로 클리어리 가틀립에 처음 발을 디뎠다. 하버드 로스쿨을 마치고 뉴욕 연방남부지법 판사실 로클럭으로 1년간 일하다 1997년 클리어리 가틀립에 어쏘시에이트(Associate)로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23년간 미국 법조계에 몸담으며 활약하고 있다. 글로벌 대형로펌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연방검사로 일했다. 로펌으로 돌아와 8년간 다시 클리어리에서 일하다 2013~2018년까지 다시 뉴욕 남부지검에 몸 담았다. 두 차례에 걸쳐 변호사업계와 뉴욕 연방남부지검을 오간 그의 커리어는 연방검사를 일종의 '국가 변호사'로 보는 미국에서도 특별한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매일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며 현재에 충실하면 성과와 성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며 "불명확한 미래와 돌아가지 못할 과거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증권사기 등 경제범죄 수사
“월가의 저승사자”로
김 변호사는 한국계로는 미국 검찰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로, 미국 주류 사회에서도 저명인사로 꼽힌다. 검사 시절 테러리즘, 화이트칼라범죄, 안보, 사기, 공직부패, 사이버범죄, 마약·무기밀매, 조직폭력 등 주요 사건들을 다뤘다. 살인·마약 등 강력범죄를 수사하는 조직범죄 전문가, 돈세탁·탈세·증권사기 등 경제범죄를 수사하는 월가의 저승사자로 이름을 떨쳤다. 4년 동안 조직범죄대응특별팀에서 일하고 뉴욕의 악명 높은 마피아 조직인 '감비노 패밀리' 두목을 기소해 주목받기도 했다. 뉴욕 맨해튼에서 발생한 트럭 테러 사건 수사를 지검장 권한대행으로 진두지휘하고, 특히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를 추종하며 시가지에서 테러를 벌인 사이풀로 사이포프를 수사·기소하면서 전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2007·년2018년
두차례 걸쳐 ‘올해의 검사상’ 받아
평검사로 재직하던 2007년과 연방지검장 권한대행을 맡았던 2018년 두차례에 걸쳐 수사관이 주는 '올해의 검사상'을 받기도 했다. 같은 사람이 두 번 이상 이 상을 받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는 "대단히 영예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한 국내 기업이 베트남 하노이에 지은 빌딩을 매각하는 과정에 연루된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의 동생과 조카의 사기범죄 혐의를 포착하고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젊은 검사들에게 경찰과 FBI 요원들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대할 것을 매번 강조합니다. 수사관은 부하가 아닌 검찰의 고객으로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함께 수사하는 동료지만, 수사관과 언제나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법적인 문제에 대한 판단은 검사의 몫이고, 검사가 수사관의 협력을 얻어내야 더욱 성공적으로 사건을 이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판사든 검사든 수사관이든 우리 모두가 법적인 기관이기 이전에 사명감을 가진 한 명의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실수할 수 있고 자존심 때문에 몽니를 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정중하게 설명할 때 우리 모두의 법 시스템은 보다 공고해집니다."
뉴욕 연방남부지검 검사장 권한대행을 마친 그는 지난해 4월 형사·민사소송 부문 파트너 변호사로 클리어리 가틀립에 돌아왔다. 클리어리 가틀립에서는 민·형사 소송과 국제중재 및 각종 규제 사건을 주로 맡고 있다. 주요 금융기관과 글로벌 기업의 고위급도 많이 대리했다.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중인 한국 기업들에 대한 자문도 많이 맡고 있다.
작년 4월 로펌 ‘클리어리’의
민·형사부분 파트너로
"한국 기업들은 미국 검찰이나 규제당국이 매우 공격적으로 접근한다며 당혹감을 표시하곤 합니다. 때문에 기업들은 서류보존과 관리에 중점을 둬야 합니다. 미국 소송이나 해외부패방지법(Foreign Corrupt Practices Act, FCPA) 관련 조사 등에서는 기관에 넘겨줘야 하는 자료를 기업이 내지 않고 버티거나 임의로 수정을 가할 경우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서류와 자료를 숨기거나 없애기보다 오히려 기업 스스로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미국은 한국과는 달리 디스커버리(Discovery, 증거개시제도) 제도가 활성화 되어 있기 때문에 소송에 들어가기 전 관련 증거를 제출하는 절차에 철저히 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의 수사 시스템과 실무가 많이 다르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지만, 제 생각은 다르다"며 "실체적 진실에 다가간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강조했다. 또 "기업 활동이 다변화되면 해외소송과 국제중재가 늘어나는 일이 불가피하다"며 "한국 기업들이 내부 컴플라이언스(Compliance·준법 감시) 정책과 지배구조 개선 등 내부적 구조정비에 나서는 한편 관련 인프라를 강화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경을 넘는 사람과 재화의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한국 검찰의 수사와 한국 변호사업계의 법률서비스도 탈(脫) 국경화, 글로벌화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기업들 준법감시 등
내부 구조정비 강화 필요
최근 우리나라 법조계에서도 도입 요구가 커지고 있는 '변호사의 비밀유지특권(Attorney Client Privilege, ACP)'과 관련해서는 "변호인 특권은 반드시 필요한 권리이지만, 이를 변호사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로 보는 인식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변호인 특권은 마땅히 가져야할 권리인 동시에 철저히 지켜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ACP는 오래되고 중요한 특권입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법적 조언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의사에게 환자가 병증을 솔직하게 호소하지 않으면 오진의 위험이 따르듯, 의뢰인이 변호사에게 완전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면 리걸 시스템 전체가 형해화됩니다. 하지만 만약 변호사가 이 비밀을 제3자에게 조금이라도 전하거나 옮겼다면 그 즉시 보호(Protect)가 없어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ACP를 유지하기 위해 변호사가 다른 사람에게 의뢰인과 관련한 내용을 말하거나 전달하는 일을 삼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로펌의 동료끼리도 관련 이메일을 보낼 때 조심하고, 기업 내부조사를 위한 포렌식 요원을 고용할 때도 해당 변호사가 아닌 다른 변호사가 관여했다면 보호가 상실될 수 있습니다."
한국법률시장 확대·변호사 업계도
글로벌화 해야
김 변호사는 한국 법률시장 확대의 필요성과 글로벌 공조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했다. 클리어리 가틀립 서울사무소는 변호사가 상주하며 직접 업무를 수행하는 실질적인 워킹오피스(working office)로 운영돼 변호사 한두 명이 상주하며 해외 본사의 변호사들과 연계하는 상당수 영미 로펌과는 다른 운영 체계를 갖고 있다. 김 변호사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서울사무소를 찾아 한국 기업 등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미국 내 소송·정부조사 등을 돕고 있다.
"저는 한국의 법률서비스 발전이 한국 경제와 세계 경제는 물론 글로벌 법률서비스 시장 발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존경받는 기업들도 많습니다. 기업 및 한국 시장이 개방형 법률시장의 혜택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한국에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대형로펌들이 많으며 그들의 모(母)국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훌륭한 로펌, 법조인, 기업들과 일하면서 상호 협력관계를 강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