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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라운지 커버스토리] 2월 정년퇴임한 ‘민법학 대가’ 윤진수 서울대 로스쿨 교수
왕성민 기자
2020-03-02 13:21
“평생 연구와 공부에 몰두… 미진했다면 전부 내 탓”
"우리 세대는 축복 받은 세대입니다. 하고 싶은 연구는 웬만큼 해봤다고 자부하지만, 부족한 점이 있다면 모두 제 탓이겠지요." 


윤진수(65·사법연수원 9기·사진) 서울대 로스쿨 교수에게 정년퇴임을 앞둔 소회를 묻자, 담담한 표정으로 "운이 좋은 세대에 태어나 다행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민법학의 대가'인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대학 재학 중 소년등과(少年登科)에 성공한 수재다. 판사 시절에는 군사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영장을 기각하거나 시국사건 연루자를 풀어줘 주목 받기도 했다. 학계에 몸 담은 이후에는 170여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고, 7명이 넘는 '교수 제자'를 양성해 성공적인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 지난 해에는 제8대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으로 취임해 법조계 자정을 위한 일역(一役)도 담당하고 있다. 법조인이자 학자로서 후회없는 삶을 살아온 그를 지난 달 중순 서울대 법학관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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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윤진수(65·사법연수원 9기·사진)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태어난 지 석 달만에 가족과 함께 전주로 이사했다. 그는 지역 명문인 전주북중을 나와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기고에 입학했고, 동기인 박준(66·9기) 서울대 교수와 문과 1,2등을 다툴 정도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실력을 뽐냈다.

 

대학 4년에 사시합격

 연수원 수료 후 판사의 길로


"처음부터 법률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외과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고3때까지도 어머니께서는 의대 진학을 권유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진로의 폭이 좁았습니다. 의대 아니면 법대였는데, 저도 문리대를 갈까 잠시 고민하다 결국 후자를 선택했네요(웃음). "

 

1973년 윤 교수가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을 당시는 서슬 퍼렇던 유신체제가 막 시작한 때였다.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휴교령이 잦아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도 꿋꿋이 학교를 다닌 그는 대학교 4학년인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당시에는 신림동과 같은 고시촌이 없었고,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를 따라 대전에 있는 재실(齋室)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사법시험을 쳤을 때도 단번에 붙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붙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서울형사지법 근무 때

소신 있는 판결로 주목 받아


윤 교수는 대학을 마치기 위해 사법연수원 입소를 1년 미뤘다. 이 시기 그는 고(故) 황적인 교수의 연구실에서 조교 활동을 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학계로 진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사법시험을 합격한 상태에서 비교적 여유롭게 졸업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황 교수님께서 채권법 판례교재 제작을 돕는 조교를 모집하셔서 제가 연구실에 자원해 들어갔지요. 이후 대학원도 등록하면서 자연스레 민법 공부를 하는 발판이 마련됐습니다." 

 

일과 후 독어 배우며 원서탐독

 함부르크大 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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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시험 합격 인원이 60여명 안팎에 불과했던 당시에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 대부분 판·검사로 임용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막 규모를 키워가던 김앤장 법률사무소로 가는 수료생도 드물게 있었지만 윤 교수는 판사의 길을 선택해 서울민사지법에서 법조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초임판사 시절 서성(78·사시 1회) 전 대법관을 부장판사로 모셨는데, 엄격했던 서 전 대법관은 배석판사들이 써간 판결서에 누락된 부분이 있거나 실수가 보이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듬해 서울형사지법으로 발령을 받은 윤 교수는 영장을 발부하거나 즉결심판을 할 때 법과 양심에 따라 소신있게 판결해 주목받았다. 그는 "국가보안법 사건 피의자의 영장을 기각하거나 즉결심판에 회부된 시위 연루자에게 관대한 처분을 많이 해서 검사들을 당황스럽게 했다"고 회상했다. 


"서울형사지법에서 영장판사로 근무할 당시 한 경찰관이 경찰서에서 권총을 빼내 애인을 쏘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검찰은 당시 무기고 책임자에 대해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 사실관계를 따져보니 직무유기 법리를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해 영장을 기각했습니다. 그러자 담당 검사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서 청와대에 보고한 사건이라고 귀뜸했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오후에 다시 나와보니 그 검사가 밥도 못먹고 기다렸다며 영장을 다시 발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영장 기각이라는 기록을 남기기 싫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영장을 재청구하는 것은 검사 자유이지만 나는 해줄 수 없으니 다른 판사에게 가보라'고 돌려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헌재·대법원서 5년 넘게

연구관 생활은 ‘큰 공부’

 

 그는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으로서의 법학'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일과를 마치면 독일 문화원에서 독일어를 배우며 밤늦도록 원서를 탐독했다. 이인재(66·9기) 전 서울중앙지법원장과 민일영(65·10기) 전 대법관도 같이 독일 문화원을 다녔는데, 비슷한 시기에 이 전 원장과 민 전 대법관은 본(Bonn) 대학으로, 윤 교수는 함부르크(Hamburg) 대학으로 법관연수를 떠났다.

 

"1년 정도 독일에 있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함부르크 법원의 배려로 민사재판부, 형사재판부 판사들이 서로 합의하는 데에도 참여했었는데, 재판에 들어가기 전 서로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한 번은 유류분 반환청구에 관한 소송에서 주심판사가 원고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재판장이 '이것은 신분에 상응하는 증여를 받은 것이므로 반환청구를 할 수 없고, 통상증여로 봐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당사자가 주장하지도 않았는데도 재판부가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 흥미로워 '변론주의 위반 아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재판장이 '법률문제에 관해 기록이 있고, 그것을 근거로 판단하는 건데 왜 변론주의 위반이냐'며 반문하더군요. 제가 알고있던 변론주의와 사뭇 다른 답변이어서 놀랐습니다." 


판사생활 14년6개월 접고

97년 서울大법대교수로


학구적인 면모가 강했던 윤 교수는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2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3년 6개월을 근무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묻자 멋쩍게 웃으며 "역시 가장 고생했던 사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장물취득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나중에 강도상해죄의 공범으로 밝혀진 경우, 다시 강도상해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면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장물취득죄로 기소된 피고인의 유죄가 확정됐는데, 검사가 다시 강도상해의 공범으로 기소한 사건이었습니다. 주심을 맡은 대법관은 '장물취득죄로 이미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 원칙상 강도상해죄로 다시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당사자가 교도소에서 형기를 만료할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다가 제게 맡겨졌습니다. 저는 밤을 꼬박 세워 처벌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도 7대 6으로 첨예하게 의견이 나뉘었지만, 결국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론이 났습니다(93도2080). 나중에 반대의견을 내셨던 대법관 한 분이 지나가는 말로 '윤 부장이 보고를 이상하게 해서 결론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셨던 기억도 나네요."


지금까지 논문 179편 발표

 가족법 분야서 ‘명성’


윤 교수는 법률신문과 인연이 깊다. 1987년 무렵 부동산 이중양도에 관한 글을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틈틈이 판례평석과 연구논단을 법률신문에 발표했다. 그는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 법률신문에만 실리는 판결이 많았다"며 "이 때문에 법률신문을 보지 않으면 정보면에서 뒤쳐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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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진출에 관심이 많던 그는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던 1991년 무렵 대학으로 이직을 시도했지만 떨어진 적이 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7년에야 14년 6개월간의 판사생활을 마무리하고 모교인 서울대 법대로 적을 옮겼다. 이후 지금까지 179편의 논문을 발표한 그는 주로 가족법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지만, 법 경제학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방법론을 연구하기도 했다.

 

"지난해 수영장의 공작물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2017다14895)에 '핸드 공식(Hand Rule)'이 처음 언급돼 눈길을 끌었습니다. 미국의 핸드 판사가 처음 제시한 이 공식은 '사고예방을 위해 조치하는 비용' 이 '사고발생 확률'과 '사고발생 시 피해의 정도'를 곱해서 나온 기댓값보다 낮을 경우,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법 경제학적인 사고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저는 이러한 핸드 공식이 법원이 재판을 할 때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제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더 연구해 논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영역인 셈이죠."

 

‘전관예우’가 존재하는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관예우가 실재 한다’고

믿는 인식이 더 큰 문제


윤 교수의 제자 중에는 유독 '교수 제자'가 많다. 권재문(50·33기) 숙명여대 교수, 현소혜(46·35기) 성균관대 교수, 이동진(42·32기)·최준규(42·34기) 서울대 교수, 장보은(40·35기)·신지혜(42·36기) 한국외대 교수, 신동현 한림대 교수가 모두 그의 제자다. 실무가 제자 중에는 정재오(51·25기) 대전고법 고법판사와 박기주 국가과학기술연구회 박사가 있다.


그는 "학문의 길을 걷는 제자들이 많다는 점에 대해 뿌듯하게 생각한다"며 "교육자로서 큰 보람을 느끼는 부분 중 하나"라고 했다.


윤 교수는 지난해 제8대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협의회는 전관예우 방지 및 법조브로커 근절을 통한 법조윤리 확립을 목적으로 2007년 개정 변호사법에 따라 출범한 기구로, 법조계 윤리를 확립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 

 

교수제자 많아 뿌듯

 교육자로서 가장 보람 느껴


"전관예우 관행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관예우가 실재한다'고 믿는 인식이 더 큰 문제입니다. 협의회 활동만으로 변호사 사회를 향한 불신이 모두 없앨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러한 상황을 억제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관의 퇴직기관 수임제한 기간을 1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등 정부 시책에 따라 역할과 위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만 협의회에서 판사나 검사에 대한 윤리까지 감독해야 한다는 견해는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법원과 검찰은 독립적으로 고유의 감찰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협의회의 예산과 인력에도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다른 직역으로의 권한 확대는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년 퇴임 후 그는 서초동에 작은 사무실을 낼 예정이다. 변호사 개업 신고도 할 예정이지만, 변호사 업무보다는 연구와 협의회 활동을 위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학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그에게 재야(在野)로 돌아가는 소회를 물었다. 


"운이 좋은 세대에 태어나 후회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부족함 없이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미진한 부분이 남았다면 순전히 제 탓이겠지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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