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이 변호사 양성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로스쿨 평가위원장으로서의 직무를 성실하게 해 나갈 것입니다."
지난 4월 제57회 법의 날을 맞아 최고의 영예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한 김주덕(67·사법연수원 9기·사진) 변호사의 말이다. 그는 현재 대한변호사협회 산하 로스쿨 평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 변호사는 검사로 16년, 변호사로 18년간 일해왔다. 법조인으로서 그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한 활동을 해왔다. 국제형법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범죄인인도법' 제정에 기여했고, 대검찰청 3대 환경과장으로 재직하며 환경범죄 수사의 기틀을 다졌다. 사단법인 맑은환경국민안전본부를 설립해 회원 8000여명의 시민단체로 길러내는가 하면, '국제형법' 등 법률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바쁜 와중에도 미국 등 세계 각국을 찾아 다양한 전문가를 만나고 자료를 모았다.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열정적으로 도전해 척박한 토양을 일궈 새로운 초석을 쌓아왔다. 그는 "당분간 로스쿨 평가위원장으로서 전국 25개 로스쿨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실시하는 데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서초동 사무실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그의 삶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기도 포천 출신인 김주덕(67·사법연수원 9기·사진) 변호사는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네살이 되던 무렵 가족이 이사를 간 대전에서 고등학교까지 생활했다. 꼬마 시절 제재소를 하던 아버지 덕에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컸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사업이 급격히 기울어져 김 변호사는 수학여행을 못 갈 정도로 힘든 형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난 첫 해 서울대 법대에 응시해 불합격했습니다. 재수를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학원을 못 다녔죠. 당시 우리 가족은 살 집을 직접 짓고 있었습니다. 저는 시멘트를 나르며 공사일을 거들다 저녁이 되면 곯아떨어지는 생활을 여름까지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올라와 중학생들을 과외하며 생활비를 벌어 공부한 끝에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기가 막히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시절이었어요."
유신 때 대학 입학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류도
그는 유신정권 때인 197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친구 3명과 함께 동천동 술집에서 이른바 민중가요를 부르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 때 한 친구가 술집에 도착한 경찰에게 "박정희면 다냐"는 말을 했고 그와 친구들은 국가원수모독죄로 구류 20일을 살게 됐다.
"아찔했죠. 서슬퍼런 시절에 국가원수모독죄라는 전과가 생겼으니 사법시험에 붙어도 임관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낙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의 경험이 법조인의 길을 걷는데 큰 가르침이 됐습니다. 구금된 고통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에, 형사사법이 적확하고 엄중하게 집행되는데 일조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죠."
그는 대학 졸업 후 당시 한양대가 다른 대학 학생들에게 제공하던 고시반에 적을 두고 공부해 1977년 제1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방위판정을 받은 상태였지만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현역 입대를 희망해 군법무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2년 군법무관을 마치고 서울지검 검사로 임관했다.
司試에 붙어도
임관하기 어렵겠다고 한때 낙담
"다른 동기생에 비해 나은 성적으로 임관했지만 막상 서울지검에 발령 받고 보니 배경도 없고 스스로 가진 게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어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업무가 과중하다는 초임 검사 시절부터 출근 전에 서울시청 인근에 있는 학원에 달려가 강의를 듣고, 퇴근하며 다시 영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들었어요."
노력을 거듭한 끝에 그는 검찰 내에서 영어에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4년에는 미군범죄전담검사가 되어 한·미행정협정(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관련 형사사건들을 다수 처리했다. 그러는 중에도 영어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일요일에는 미8군 교회에 가 영어로 설교를 들었고, 1986년에는 토플 시험 성적을 따기도 했다.
이때 경험이 법조인의 길 걷는데
큰 가르침으로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국가적 행사였던 '88 서울올림픽' 준비에 분주했다. 테러범죄 등 국제형사법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국제테러나 범죄인인도 등 국제형사법 지대의 불모지(不毛地)나 다름 없었다. 검찰 차원에서 국제형사법 체계를 세울 필요성이 점차 커져갔다.
그는 국제형사법 체계를 연구하기 위해 1986년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로 유학을 갔다. 이곳에서 미국, 호주, 캐나다 등 국제형법이 발달한 국가를 방문하며 강의를 듣고 자료를 모았다. 비교법적으로 모범적인 범죄인인도법을 연구했고, 올림픽을 앞둔 상황인 만큼 국제테러 문제를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또 각국의 외무통상부를 방문, 한국 법무부를 대표해 범죄인인도조약 체결 업무도 수행했다.
1987년 귀국한 그는 법무부 검찰국 검찰2과로 발령 받았다. 그때부터 3년 간 형법과 형사소송법 개정작업에 매진해, 1988년 제정된 범죄인인도법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형사재판관할권이 있는 중범죄자들을 외국으로부터 가급적 많이 인도 받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작업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로스쿨 마다 갈수록
변호사시험에 대한 부담 가중
김 변호사는 최근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를 운영한 손정우에 대한 법원의 미국 송환 불허결정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국제형사사법의 취지는 자국민 불인도 원칙에서 나아가 아동·테러 범죄와 같이 잔혹한 범죄에 대해서는 범죄인 인도를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아동 성착취 범죄는 국제사회가 마약과 해적 범죄 이상으로 중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강한 처벌을 원하는 국가에 범죄자를 인도해주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전돼야 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번 법원의 결정은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그는 검사 시절 환경법 분야에 정통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환경법과의 인연은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1990년도에 일선 검사로서 환경범죄를 많이 처리했습니다. 1991년 청주지검 제천지청장으로 근무하며 단양군에 있는 시멘트 공장의 환경문제를 점검했습니다. 1994년에는 대전지검 형사1부장으로서 관내 폐수 등과 관련된 환경사범을 단속하기도 했죠. 당시 경희대에서 환경법으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고 1995년에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1994년 대검찰청 환경과장을 맡게 됐습니다. 1대 환경과장인 박주선(71·6기) 전 국회의원과 2대 환경과장인 김희옥(72·8기) 전 동국대 총장에 이은 3대 과장이었죠. 환경사범을 단속하는 환경사범전담검사제를 실시하기도 했고, 환경범죄단속편람을 만들어 전국 검찰청에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학교별 특성화 과목 보다
변시 위주 강의는 문제
1990년대 후반 '시화호 수질오염사건' 등 환경문제들이 불거지며 등 환경범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그는 1995년 검찰총장을 설득해 미국에 2주간 출장을 가서 환경범죄 단속 시스템을 연구했다. 그는 당시 미국의 가장 큰 환경단체인 시에라 클럽(Sierra Club)에 변호사들이 500여명이나 소속돼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느꼈다. 또 워싱턴 D.C.와 덴버를 오가며 대학교수, 환경범죄 담당 검사, 단속 공무원 등을 만났다.
"그곳에서 수질오염을 감시하는 법, 잠복근무를 하는 법 등 환경범죄 수사에 대해 익혔습니다. 통역 없이 100여명을 만나며 많은 분량의 자료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지요."
그는 검사 생활을 하며 신우회장으로 활동한 경험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초임 검사시절부터 다른 검사들과 서대문에서 성경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러다 1996~1997년 서울지검 서부지청에서 신우회장을 맡은 뒤 기념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8년, 16년간의 검사생활을 마치고 변호사로 인생 2막을 열었다. 2000년에는 법무법인 태일을 설립해 대표변호사를 맡았다.
"검찰을 벗어나 변호사가 되고 보니 세상도 완전히 달리 보였습니다. 억울한 사연을 지닌 피의자, 피고인, 형집행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죠. 무수히 많은 형사사건을 맡아 처리했습니다. 또 시민단체 활동을 시작하고, 여러권의 책도 집필했죠."
법조인은 ‘법을 통한 봉사’
실천하는 자세 가져야
변호사가 된 후 그는 검사 시절의 경험을 살려 시민활동을 왕성히 해나갔다. 2005년 '사법정의 실천연합'을 설립했다. 현재 30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단체는 사법절차 중에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피력하지하지 못했거나 피해를 입은 시민에게 상담 및 변론을 제공하며 법률구조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2000년 상임대표로 있었던 '사법정의 국민연대'에 올 7월 다시 상임대표로 취임했다. 그는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으며 최근에는 사법형사 피해자를 위한 구조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환경법 전문 검사로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2000년 사단법인 '맑은환경국민안전본부'도 설립했다. 중국발 미세먼지 등 환경문제를 조사하고 환경법령 개정을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형사법에 정통한 법조인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러권의 책을 집필해 담아내기도 했다.
초임 검사 때부터 영어공부에 열심
86년 美유학
"1993년에 '이렇게 해야 빨리 석방된다'를, 2004년에는 '억울한 뇌물 혐의 이렇게 벗어라'를 썼습니다. 이례적으로 검찰 수사에 대한 대응 방안을 전격적으로 다룬 서적이었기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죠. 또 사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사기공화국에서 살아남기'와 '함부로 사랑하지 마라-애정사기'를 펴냈습니다. 1998년에는 국제형사법에 대한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국제형법' 교과서를 쓰기도 했죠."
이 밖에도 그의 활동 분야는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다. 2001년 출범한 여성가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전국에서 발생한 성차별·성희롱 사건들을 처리했다. 2004년 위원에 재임명될 정도로 열성적으로 활동해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2003년에는 KBS 자문변호사 활동을 하며 KBS-TV '생활법정' 프로그램에서 재판장 역할을 맡았다. 2006년에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경희대 법대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2012~2017년 대한공증인협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하며 국제공증인협회 가입을 이끌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광범위한 활동 중에서도 '대한변호사협회 로스쿨 평가위원회 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국제형법 분야 집중 공부
국제테러 문제도 연구
2011년 대한변협 로스쿨 평가위원회의 특별위원장 및 사무총장으로서 활동을 시작해 2018년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로스쿨의 운영은 법조인 양성과 배출, 그리고 법률서비스 질 문제로 이어지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전국 25개 로스쿨 모두 운영상의 고충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론·실무 교육을 아우르는 평가를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로스쿨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 평가위원회 구성 초기부터 평가 매뉴얼 제정 등 활동에 참여해왔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해온 그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4월 제57회 법의날을 맞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올해 이뤄질 제3주기 로스쿨 자체평가와 2022년 로스쿨 본평가를 성공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목표다.
16년 만에 변호사의 길로
다양한 시민활동 참여
"로스쿨은 종전의 사법시험제도에서 법학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고시낭인을 양산하던 폐해를 극복하고 인성과 실력을 갖춘 변호사 양성기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변호사시험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로스쿨별 특성화 교육이 외면 받고 변호사시험 위주의 교육이 진행된다는 데 문제가 있죠. 법학이론·실무, 인성교육 모두 이뤄질 수 있도록 실효적인 평가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래서 로스쿨이 변호사 양성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에게 후배 법조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법을 통한 봉사', 그리고 '평생 공부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법조인은 법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법과 원칙에 입각해서 사회에 '법을 통한 봉사'를 실천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법조인이 된 다음에도 평생에 걸쳐 자신의 길을 공부하는 자세를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