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법무부장관의 이른바 '휴대전화 비밀번호 강제해제법' 제정 검토 지시에 대한 비판이 법조계 안팎에서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때아닌 날벼락을 맞은 곳도 있다. 디지털 증거에 대한 피의자 등 관계자의 협조 의무 도입의 타당성 여부를 연구하고 논의하던 형사법학자들과 실무자들이 그 피해자들이다.
이들은 수첩이나, 장부, 종이서류 등의 물적 증거와는 속성이 다른 디지털 증거 관련 법제도들을 장기간 연구해왔다. 어떻게 하면 디지털 증거 확보 과정 등에서 피의자의 방어권과 참여권을 적정하게 보장하면서도 실체적 진실 규명 요청에도 부응하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또 이 같은 방안을 어떻게 수사실무에 구현해낼 것인지 고심을 거듭해왔다. IT 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따른 국민들의 삶과 시대상 변화가 형사법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뚝딱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디지털 증거에 대한 압수수색 범위와 절차, 디지털 증거의 활용 한계 등에서 수사 실무상의 요청들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수반하기 때문에 학자와 실무가들은 이 문제에 신중하게 접근했다. 휴대전화 비밀번호 제출과 같은 디지털 증거에 대한 피의자 등의 협조 의무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추 장관의 돌출 행동에 산통이 다 깨졌다. 정진웅 광주지검 차장을 독직폭행 혐의로 기소한 과정에 문제는 없는지 진상을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하면서, 사건 피해자이기도 한 한동훈 검사장 사례를 콕 집어 휴대전화 비밀번호 강제해제법 제정 검토를 지시해 위헌 논란만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와 실무가들은 '멘붕'에 빠졌다.
법무부는 뒤늦게 "디지털 증거에 대한 과학수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인터넷상 아동 음란물 범죄, 사이버 테러 등 새로운 형태의 범죄에 대한 법집행이 무력해지고 있는 만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수습에 나섰지만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 중차대한 문제를 학계와의 공동연구 및 각계 의견수렴 등 최소한의 사회적 공감대 형성 절차도 거치지 않고 느닷없이 장관 지시 한마디로 추진한다는 말인가. 정책 추진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