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법무정책 연구의 새 장을 열겠습니다. 연구원의 '제2의 도약'을 이뤄 형사·법무정책을 뒷받침하는 통합적 싱크탱크로 자리매김 하겠습니다."
지난달 2일 취임한 하태훈(63·사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의 말이다. 그간 '사회참여형 형법학자'로서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세상에 개혁을 외쳐오던 그가 형사분야를 넘어 법무정책까지 연구영역을 확장한 연구원의 수장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은 범죄 및 형사정책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1989년 설립된 국책연구기관으로, 올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명칭을 바꾸며 그동안의 형사영역에 더해 법무정책 연구까지 외연을 확장했다. 하 원장은 "변화의 출발점에 선 지금 안정적 정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며 "연구원이 처음 생겼을 때 마음과 제도로 돌아가 제2의 도약을 준비하겠다. 신진 학자들의 신선한 아이디어와 중견 학자들의 경험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활발한 소통 창구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교장으로 퇴임한 아버지 영향
6남매 모두 교육자
그는 "연구원이 처음 출범했던 과거에는 국내에선 독일 형법학 잡지를 연구원 도서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며 "당시 연구원 도서관에서 그 잡지를 읽고 복사하던 일, 실무·학계와 신진 연구자 간 교류의 장이었던 연구원 콜로키엄과 형사판례연구회에 매달 참석했던 기억 등이 바탕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32년 역사의 연구원이 새로운 한 세대를 기획하고 준비해야 할 제2의 출범 앞에 서 있는 지금, 연구원의 위상과 역할을 새로이 자리매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한 것 같다"고 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으로 기관 명칭이 바뀌고 사업 스펙트럼이 넓어졌습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이걸 정착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당장 수많은 연구가 쏟아지는 건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연구 이슈를 발굴하고 연구 기반을 닦기 위해 협조 체계를 구축해놓는 것이 제가 할 일이죠. 새로운 인력의 충원은 물론 신진 학자들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중견 학자들의 연륜과 경험이 조화를 이뤄야 할 것입니다. 89년 형사정책연구원 출범 초창기 신진 연구원들과 연구실장직의 교수들이 함께 힘을 합쳤던 기억을 더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권유로 독일유학
獨語 배우며 부인도 만나
그는 앞으로 연구원을 이끌 경영기조로 '더블(Double) ESG'를 강조했다.
"지금까지 형사법 연구자이자 학자였던 제가 이제부터는 국책연구기관의 행정가이자 경영자로, 그간 사회참여형 학자로서 쌓아온 경험과 역량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연구원 경영에 열과 성을 다하려 합니다. 특히, 기업경영의 ESG(Environment·Social·Governance, 환경·사회·지배구조)에 더해 국책연구기관 고유의 ESG를 연구원 경영의 나침반으로 삼겠습니다. 이는 제가 고안한 것으로, 이 둘을 합쳐 '더블 ESG'라 부르는데 친환경적 업무수행 방식의 추구와 실천(Environmental),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가치를 실현하는 연구수행(Social), 투명하고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통한 이해관계 조정 및 갈등 해소(Governance), 그리고 더 나아가 연구윤리·경영윤리 등 윤리적 측면(Ethic)과 수요자를 만족시키는 책무성과 봉사정신(Served), 그리고 성 인지 감수성과 성평등 의식(Gender)을 의미합니다."
부부가 함께 법 전공
대화가 잘되는 장점도 있어
하 원장은 학자이자 행동하는 실천가로 사법절차 전반의 변화를 이끈 법조계 개혁 전문가다. 최근까지도 형사판례를 연구하며 로스쿨은 물론 법원·검찰·경찰·법무 등 제도 개선에 힘써왔다. 1997년 참여연대 실행위원 참여를 계기로 세 차례 공동대표까지 역임한 그는 사법감시 활동 등 사회참여도를 높이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 등 사법개혁을 위한 개혁적 목소리를 통해 법조계를 포함한 사회 발전에 공헌했다. 그는 법률신문 필진으로도 참여해 법원·검찰·경찰 등 사법절차 전반은 물론 입법·사법·행정을 아우르며 일침을 가했다.
"홍익대 재직 시절 교수협의회 활동이나 칼럼 등을 통해 저의 성향과 관심사를 알게 된 한인섭 전 원장의 권유로 참여연대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당시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활동을 하고 있던 그처럼 실행위원으로 시작해서 사범감시센터 소장을 지냈고, 운영위원장을 거쳐 공동대표까지 되는 아주 드문 역사를 남기게 됐습니다. 임기 2년의 공동대표직을 2번 더 연임해 약 5년 6개월 간 재직했는데, 연구원장으로 오게 되면서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주로 법원·검찰·변호사 등 권력감시 역할을 했으며 사법개혁을 위한 활동, 공수처 설치 주장, 수사권 조정 주장 등은 오랜 투쟁 끝에 성과를 얻기도 했지요. 법조인 양성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로스쿨 제도 도입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명칭 변경에 걸맞은
종합정책연구기관 위상 확립
이처럼 그는 탄탄한 형사법이론연구를 바탕으로 부당한 권력과 권위에 일침을 가하고 잘못된 제도를 과감히 개선하는 역할을 자처해왔다. 이력도 화려하다. 김대중정부가 출범한 1998년 대검찰청 제도개혁위원회 참여를 시작으로, 1999년 대통령직속 사법개혁추진위원회 등 꾸준히 관련 활동에 참여하며 사법개혁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또 경찰혁신위원회 위원 등 경찰개혁은 물론 검찰제도개혁위원회 위원, 법무부 수사공보제도개선위원회 위원 등으로 참여하며 검찰·법무 개혁에도 이바지했다.
신진·중견학자들의
활발한 교류·소통의 장으로
실질적인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법무부 교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교정 관련 활동을 오랫동안 해오며 교정시설 과밀화 해소 방안으로 가석방 요건 완화를 건의하고 실제로 가석방 대상 확대 성과를 냈다. 또 대법원 양형제도연구위 위원 및 양형위 출범 당시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양형기준의 틀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기관 내부 직원이 안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권고 수준의 의견을 제시하는 다른 위원들과 그는 국가인권위원회 혁신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위원들과 함께 인권위 개혁권고안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하 원장은 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으로 취임하며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학계, 사법분야를 비롯해 교육부 등 10여개가 넘는 개혁위원회 활동을 그만뒀다고 한다.
새로운 연구이슈 발굴
연구협조체제 기반도 구축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사안들을 두고 오는데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6개월 정도 임기가 남았던 참여연대 공동대표직을 내려놓을 때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요. 사실 참여연대는 정부기관이나 정치권 등의 자리로 가는 것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경우 연구기관으로 가는 것인데다 세번째 연임을 하는 것이다보니 크게 염려하거나 만류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배운 걸 가르치고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자는 취지로 각종 위원회 활동 등을 해왔는데 이제는 연구기관에서 연구로 그 역할을 다해보려 합니다."
올해는 공수처 출범, 수사권 조정안 시행 등 형사법 체계에 대변화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인내심으로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형사·법무정책 연구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새롭게 도입된 제도의 후속작업에 연구로써 힘을 보탤 것"이라며 "아울러 앞으로 변화와 개선에 있어 찬반 논쟁만을 벌이다 졸속으로 제도를 도입하거나 법 개정을 하는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규제영향평가나 입법영향평가 등을 전문가들을 통해 진행해 안정적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학교수로 후학 양성과 함께
참여연대 활동 참여
"검·경 수사권 조정, 공수처 설치 등 형사법 체계는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이제는 개혁보다도 도입된 제도의 안착이 중요한 만큼 과거 실무 관행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닌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므로 인내심으로 지켜보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법조인, 언론 등이 너무 성급한 비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연구원은 앞으로 관계기관과 협력해 새 제도 시행상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실무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과 향후 입법이 필요한 부분을 찾아내는 연구를 진행할 것입니다."
유의미한 변화에도 아쉬움은 여전하다. 그는 "공수처 설치 및 수사권 조정 등을 주장해 오랜 활동 끝에 성과를 냈지만, 검사장 직선제 등 아직도 참여연대가 주장하는 검찰개혁 이슈들이 남았다"며 "이 밖에도 지난 20년간 주장해왔지만 막상 설치 당시 충분한 논의가 부족해 실행 이후 잡음이 끊이지 않는 공수처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학자로서, 전문가로서 개선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연구원이 법무부를 비롯해 정부부처는 물론 국회 등 입법기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며 "같이 큰 그림을 그려 제도 및 정책, 법 제·개정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법개혁·공수처 설치·수사권 조정 등에
힘 보태
하 원장은 충남 공주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장으로 퇴임했고 그를 포함한 남매 모두 교편을 잡았다. 남동생은 가천대 공대에서 교수로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어린 시절 대전지법 공주지원 바로 앞에 살며 당시 지원장 아들과도 소꿉친구였던 하 원장은 당시에도 어렴풋이 법조계를 꿈꿔왔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법조인 또는 법과 관련한 직업을 소망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공부 잘해서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희망이자 부모님의 기대였고 공부 좀 하면 법대 가고 사법시험 준비해서 법조인이 되는 것이 당연한 진로인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이었기도 하죠. 대학 재학 당시 사법시험은 연 합격자가 80~1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상당히 어려운 시험이었고 마침 어머니께서 대학원 진학과 독일 유학을 권유하는 까닭에 진로를 바꾸게 됐습니다. 6남매 모두가 교육자가 된 것은 교원이셨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으나 국민학교만을 졸업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대단한 교육열과 결단 덕분인 것 같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된 독일 유학 과정은 그의 평생 배필을 이어주는 계기도 됐다. 독일 문화원에서 독일어를 배우다 만난 아내와 함께 독일 유학을 떠났고 각자 형사법과 민사법 박사학위를 취득해 같은 비행기로 귀국했다. 하 원장의 부인은 현재 서울대 로스쿨에서 민사소송법과 중재법을 가르치며 한국민사소송법학회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선주 교수다.
“이제는 개혁보다
도입된 제도의 안착이 더 중요”
"아내와 함께 한 5년여의 독일 유학 시절은 이후에도 우리의 삶에 '검소한 생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생각과 자세, 식탁에서의 가족 간 대화 등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법학을 전공하다보니 대화가 잘 통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대화 내용이 주로 법, 사회 및 정치 이슈 등에 국한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웃음). 독일 유학 후 귀국해서 뒤늦게 얻은 아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법학자가 될까 기대했었지만, 제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방문 교수를 갔을 때 함께 갔다가 그 뒤로 혼자 남아 중·고·대학과 대학원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해 현재는 의경 제대 후 진로 개척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과 심리학을 전공한 아들은 요새 진로 등에 관해 조언을 많이 구하는데, 가끔 저희 부부가 우리집에 유일한 비(非)박사라고 놀릴 때도 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연구원 경영비전 발표를 위해 간부회의장으로 떠나던 그는 "3년여의 원장 임기를 처음 계획한 대로 잘 마치는 것이 1차적인 계획"이라며 "임기 이후에는 그간 취미활동으로 해오던 색소폰 연주에 좀 더 매진하고 텃밭과 정원 가꾸기 등 법학 외에 해보지 못한 일들을 해보는 것이 소박한 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