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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라운지 커버스토리] 수사 정석 보여준 외유내강… 허익범 前 ‘드루킹 특별검사’
이용경 기자
2021-10-05 11:47
“오직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수사원칙 고수

"특별검사를 하면서 한 번도 원칙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특별수사관들이 의견서를 써올 때 제가 가장 강조했던 것은 '어떠한 의견이든 주장에 대한 근거와 증거를 모두 제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헌정 사상 13번째 특별검사로서 드루킹 일당과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등의 댓글 공작 선거 개입 의혹의 진상을 규명한 허익범(62·사법연수원 13·사진) 변호사의 말이다.

 

32개월에 달하는 수사와 공소유지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특검 팀원들에게 언제나 '철저한 준비'를 당부했던 허 변호사는 대법원에서 김 전 경남지사와 '드루킹' 김동원씨 등 댓글 조작 범행에 공모한 12명 모두에게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며 지난 7월 특검으로서의 임무를 마쳤다. 당시 420여페이지에 이르는 어떤 특검 의견서에는 각주를 900개 첨부했다고 회고하는 허 변호사의 말 속에 20여년의 검사 생활을 포함해 40년 가까이 법조인으로 활약하며 쌓아올린 치밀함이 오롯이 느껴졌다. 2018년 특검으로 임명돼 "오직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나아가겠다"며 수사의 원칙과 방향을 밝혔던 허 변호사를 지난 달 23일 그의 옛 특검 사무실 앞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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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익범 변호사는 만 5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공부에 소질이 있어 반장을 맡기도 했었지만 나이가 많게는 여섯 살까지 많은 학우들 틈에서 소극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

 

"여덟 살 터울의 형을 따라나가는 일이 많아 어머니께서는 '학교를 일찍 보내야겠다' 싶으셨는지 만으로 다섯살이었던 저를 학교에 청강생처럼 보내셨습니다. 문제는 당시 시골에는 같은 학년에도 불구하고 학생마다 여섯 살 터울이 나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같은 학년 친구들에게 계속 동생이나 막내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시골 초등학교 시절 반장 맡기도

6학년 때 서울로

 

6학년이 되던 해에 고향인 충남 부여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허 변호사는 소극적이던 시절을 뒤로 하고 '검사'의 꿈을 어렴풋이 꾸기 시작했다. 가세가 기울어 취업을 위해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안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져 19691월 서울에 올라온 뒤부터 남의 집 셋방살이를 시작했는데, 중학교를 다니면서 일찌감치부터 대학교를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덕수상고에 시험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은행 취업을 위해 주산, 부기 등 자격증을 취득한 허 변호사는 고교 2학년 때부터는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져 진학반에 들어갔고, 1년 재수 끝에 1977년 고려대 법대에 수석 입학했다. 허 변호사는 집안 형편을 고려해 무조건 졸업 전까지 사법시험에 합격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때마침 한 언론사가 주최하는 장학생 선발 프로그램에 선발돼 전액 장학금은 받았지만, 대학 졸업 이후까지 시험을 준비할 수는 없었던 허 변호사는 '배수의 진'을 치고 수험 준비를 했다.

 

집안사정 어려워 商高진학

재수 끝 고대법대 입학


"법대 수석은 1학기 장학금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2학기 때부터는 돈이 없어 어머니께서 간신히 융통해주신 돈으로 겨우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언론사 장학생으로 선발됐습니다. 그야말로 '천우신조'였죠."

 

허 변호사는 치열하게 공부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사법연수원에는 한 기수 늦게 들어가야만 했다.

 

"사법시험 공부를 결심한 게 대학교 1학년 때인 197712121212분입니다. 미신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제 나름의 큰 뜻을 세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4학년이던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보통 사시에 합격하면 곧바로 같은 해 9월부터 사법연수원을 들어가는 게 정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대는 1979~80년 긴급조치 7호로 휴교령이 내려졌고, 당시 고대 법대 학장이시던 김진웅 교수께서 '연수원은 연수원이고, 졸업은 별개이니 학점 이수를 제대로 안 하면 졸업장을 못 준다'고 하셔서 졸업을 위해 1년을 더 다닌 후에야 사법연수원 13기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김 학장께서 '원칙대로' 하신 것이죠."

 

허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에서 자신의 적성은 역시 검사라고 생각했다.

  

대학 4학년 사시합격 후 

아무 고민 없이 검사 지원


"연수원 시절 검사시보 4개월 동안 무언가를 조사하며 배워나가는 게 정말 재미 있었어요. 그래서 군 법무관을 3년간 마치고 아무 고민 없이 검사로 지원했고 대구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초임지에서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외지인에 대한 지역적 텃세도 있었고, 교통사고와 같은 비교적 간단한 사건 하나를 조사하는 데도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허 변호사는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기에 오히려 검사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할 수 있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술 한잔 하자는 그 흔한 제안도 제게는 별로 없었습니다. 관계 측면에서 늘상 '벽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지만, 검사로서 역할을 생각하는 시간은 많았습니다. 특히 당직을 밥먹듯 하고, 사실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마주한 사건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현장이 말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는 어떤 것인지를 늘 고민했습니다."

 

대구지검서 첫 출발

 검사로서 해야할 일 늘 성찰

 

허 변호사는 "초임 시절 강력 사건을 전담하며 변사체 80여구 정도를 부검했다""검시관에게 맡겨도 될 부분도 명백한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액 채취 등을 일일히 지휘하며 증거에 대한 나름의 원칙을 정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을 땐 제출된 증거를 이해할 때까지 매달렸다.

 

"전두환·노태우 정부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들이 참 많았습니다. 당시 민족해방주의 관련 건을 담당하며 '해방신학''네오맑시즘' 등 압수된 책과 유인물을 꼼꼼히 정독했는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각 제도의 모순에 대한 균형적 시각이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그와 관련된 약어집까지 만들어 동료 검사들에게 돌린 기억이 납니다."

 

검사로 재직하며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괌 칼기 추락 사건, 부산 구포열차 사건 등 각종 대형 사건을 맡았던 허 변호사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인천에서 공안부장을 하던 1999년 무렵 여호와의 증인인 부모 밑에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수술을 위해선 수혈을 해야 했는데, 부모가 극구 반대해 아이의 생명이 위독했습니다. 민법에는 그러한 경우 친권제한을 신청할 수 있는데 검사도 신청권자 중 하나입니다. 부모를 불러 '수술을 시키지 않으면 친권제한을 신청하겠다'고 말했는데도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친권제한 절차를 진행했고 이후 아이가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서울지검 근무 때 

고교 친구를 피의자로 만나 구속

 

허 변호사는 맡은 사건 중에는 소설같은 일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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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월자로 서울지검 공안1부로 발령받았는데, 당시 구속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서류를 보니 낯익은 이름이 있었습니다. 기록을 가져와 살펴보니, 3 시절 단짝으로 친했지만 크게 다툰 이후로 교류가 단절된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를 십수 년이 지나 검사와 구속피의자로 만났던 것이죠. 서울 명동에서 좌판연합회 총무를 맡았던 그 친구는 서울 88올림픽을 계기로 단속에 나선 철거원 및 경찰들과 싸워 집시법 위반과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서울구치소에서 소환돼 온 친구에게 커피를 타주며 '우리가 이렇게 만나야 되냐'고 말했습니다. 자그마치 14~15년 만에 만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법에 기초해 그를 기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석이나 가석방이 일체 없었을 때니 징역 2년을 온전히 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출소 이후 한동안 연락을 했지만, 이내 연락이 끊어졌던 그 친구는 학창 시절,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같은 책을 읽으며 현실에 일찍 눈을 떠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던 친구였습니다. 다시금 만나고 싶습니다."

 

대통령 측근인 구청장 ‘뇌물죄’ 기소로

 좌천도 당해

 

서울남부지청 형사5부장 재직 시절 특수·공안 담당 검사로서 그는 구청장과 관련한 뇌물 첩보를 입수해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과정에서 구청장이 당시 대통령 측근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원칙대로 수사와 기소를 진행해 징역 5년의 실형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허 변호사는 이 일을 계기로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검사로서의 의욕이 다소 꺾이던 차에 2003년 산업자원부의 파견 요청으로 장관 법률자문관으로 갔다. 당시 전북 부안에서는 '방사능물질 폐기장' 설립을 두고 군민들이 군청을 에워싸는 등 결사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산자부가 군민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내는 방안을 검토하기에 우선 혼자서 현장으로 갔습니다. 집회시위 상태를 목격해보니 '보통 수준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만약 손해배상청구까지 한다면, 시위가 더 촉발될 수 있어 손해배상청구는 재고하는게 좋겠다고 자문했습니다."

 

허 변호사는 이 시절 기술유출범죄 근절의 필요성을 느껴 산업기술보호법 초안 제작에 관여하기도 했다. 2007년 서울고검을 끝으로 변호사로 개업한 이후에도 산자부와 지식경제부 규제심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까지 맡아 산업과 국제상사 중재 분야의 전문성을 키워나갔다. 특히 2007년에는 국제상사중재법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해 중국과의 국제무역 분쟁 등에도 큰 관심을 두고 변호사 업무를 이어갔다. 2008년부터 법무법인 산경에서 10년간 활동해 온 허 변호사는 2009년과 201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제1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다 2018년 드루킹 특검 도입이 논의될 무렵 이찬희 당시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 개업 직전 

국제상사중재법으로 박사학위 취득

 

"이 서울변회장이 저를 '특검 후보로 추천하고자 한다'고 말하기에 수락은 했지만, 실제로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특검 역할은 허 변호사에게 운명처럼 맡겨졌다.

 

"경력도 탄탄하지 않은 검사였고, 하물며 검사장을 지낸 것도 아니고, 현직에 있을 때 수사력을 유별나게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언론에 오르내릴 만한 사건을 맡은 적도 없었죠. 역대 특검들이나 후보들에 비하면 경력면이나 검증된 능력면에서나 우려를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특검을 하면서 한 번도 원칙을 놓친 적은 없습니다. 특별수사관들이 의견서를 써오는데, 제일 강조했던 게 무슨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주장에 대한 근거와 증거를 각주든 괄호가 됐든 어떤 형태로든 다 제시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얘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의견서 한 페이지당 근거를 제시한 각주가 대부분 최소 2~3개는 됐습니다. 어떤 의견서는 420여페이지나 됐는데, 각주만 900개였습니다. 그렇게 치밀하게 수사를 했고, 그에 따라 기소를 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나온 것이지, '누군가를 반드시 처벌해야 된다'는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갔을 뿐입니다."

 

특검후보 수락 했지만 

정작 맡을 거라고 생각 못해 

 

특검을 하며 남달리 어려웠던 점도 많았다.

 

"외부적인 압박이 워낙 심했습니다. 여야 정당과 시민단체들도 그랬고, 언론에서도 논조가 거의 '보여주기식 수사만 한다', '정치적 결정으로 수사하는 체만 할 것이다'라고 하는 등 주변만 때린다는 식의 비판 여론과 정치적인 주장들이 특검 활동에 큰 어려움으로 작용했습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개인적인 음모들 예컨대, 아들을 어디에 취업시켰다든가, 수사 도중에 야당 중진하고 따로 술 자리를 가졌다든가 하는 낭설도 파다했습니다. 제게는 두 딸이 있지, 아들은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특히나 (드루킹측으로부터 5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던) 노회찬 의원이 극단적 선택을 한 뒤로는 특검을 지속하는 게 과연 적정한가를 두고 깊이 고민했습니다."

 

허 변호사는 항소심 때 변호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전체 댓글 120여만개를 특별수사관 7, 특검보 2명과 함께 25일간 하루에 17시간씩 밤낮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특검보도 계셨고, 일일히 모니터로 본다는 게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지만, 그 시간을 투입하지 않으면 대상이 불분명한 댓글 유형에 대해 입증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제가 삼은 업무원칙 준비에 실패하면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의 무거운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임무 끝난 사무실서 

팀원들과 자장면에 맥주 한잔… 

 

허 변호사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다들 저를 따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소회를 밝혔다. 특검 임무를 마친 텅빈 사무실에서 종이박스를 펴놓고 앉아 특검팀원들과 자장면에 맥주 한 잔씩 했다는 허 변호사에게 다음 계획을 물었다.

 

"대학에서 제 경험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싶기도 하고, 디지털 포렌식으로 특화된 변호사 업무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증거에 대한 무결성 검토 및 자문 업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만 당분간은 앞으로의 계획을 천천히 생각하면서 쉬고자 합니다."

 

허 변호사는 특별수사관들과 함께 지난 7월 한국포렌식학회에서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 2급 자격증을 땄다. 가족들과 모처럼 떠난 강원도 여행에서도 "라디오로 사건을 듣는 탓에 아내에게 크게 혼났다"고 말하는 그의 말 속에서 현장을 중시하는 법조인의 고집도 느껴졌다. 그는 "3년이 넘는 (특검으로 활동한) 기간 동안 마음 고생 몸 고생한 아내와 두 딸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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