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디스커버리 제도(증거개시 제도)' 도입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 주목된다.
이 제도는 주로 영미법계에서 상대방이나 제3자로부터 소송에 관련된 정보를 얻거나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변론기일 전에 진행되는 사실 확인 및 증거수집 절차로, 의료기관이나 기업, 국가기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개인 등의 증거 확보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제도가 도입되면 그동안 증거 확보에 애를 먹어 패소하는 일이 줄어들어 개인이나 소비자의 승소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돼 국민의 권익 보장은 물론 법률시장 파이(pie)도 커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
대법원 사법행정자문회의(의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지난 8일 제17차 정기회의를 열고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등의 안건을 논의했다.
자문위원들은 이날 사실심 충실화와 재판 신뢰 제고를 위해 디스커버리 도입 여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또 이를 위해 법원행정처가 디스커버리 도입 여부와 도입 방안에 대해 심층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사법행정자문회의에 보고하도록 했다.
법원행정처는 사실심 충실화와 재판 신뢰 제고를 위해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여부 연구·검토를 목적으로 지난 11월 '디스커버리 연구반'을 구성한 상태다. 10명으로 꾸려진 연구반은 판사와 변호사,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연구반을 통해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여부와 도입할 경우 그 방안 등에 대해 심층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주요 선진국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을 시작하기 전 증거조사를 먼저 할 수 있도록 하는 '증거개시절차'로도 불린다. 법원은 소송절차가 시작되기 전 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상대방에게 문서제출명령 등을 내리게 된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해 자료 제출을 사실상 강제한다. 예컨대 자동차 급발진 관련 소송에서 소비자로부터 소송을 당한 기업 측이 급발진 원인과 관련된 문서제출명령을 거부하면 곧바로 패소할 수도 있다.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원·피고 당사자 양측이 가진 증거와 서류를 공개해 쟁점을 명확히 하는 본안 재판 전 독립된 증거조사 절차인 것이다.
최승재(50·사법연수원 29기) 법무법인 우리 변호사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논의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며 "법원이 증거가 제대로 현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한적인 증거를 가지고 판단을 하면, 그 판단이 오랜 노력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수긍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된다면) 사법신뢰를 높이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증거가 많이 현출된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은 관철될 필요가 있지만 그 과정에서 효율적으로 절차를 진행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도 향후 숙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근우(48·35기)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될 경우 변호사가 참여할 수 있는 폭이 커지거나 관련 업무가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며 "일반 당사자로서는 증명력이 높고 법률요건에 맞는 증거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증거 판단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법률전문가가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면 무의미한 공방이 줄어들 수 있어 법원의 업무 부담이 줄어 재판이 빨라지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사법행정자문회의는 이 밖에도 이날 국유재산관리기금 중기사업계획 신규사업과 우선순위 선정 안건과 관련해 법원 등 신축 사업의 경우 2023년 춘천지법, 성남지원, 충주지원, 법원기록관, 2024년 마산지원, 의성지원, 논산지원, 2025년 제천지원, 경주지원, 장흥지원, 2026년 해남지원, 영월지원, 대구가정법원의 순서로 진행하도록 우선 순위를 정했다. 증축 사업의 경우 2023년 밀양지원을 우선으로 하기로 했다.
다음 회의는 2022년 1월 3일 대법원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