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이유서에 타당한 항소이유를 구체적으로 기재하도록 해 기계적 항소를 막는 한편 1심에서 보석을 늘려 구속기한 제한에 따른 부실 재판을 줄여야 한다는 현직 판사의 주장이 나왔다. 1심 부실화와 상고심 폭증 등 우리나라 형사소송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항소심의 사후심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취지다.
경북대 법학연구원 형사법센터(센터장 김성룡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4일 '형사소송법의 정상화'를 주제로 제1차 특별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는 온·오프라인 병행 방식으로 진행됐다. 같은 주제를 이어가는 2차 특별세미나는 오는 11일 열린다.
박병민(45·37기) 사법정책연구원 판사는 이날 '형사 항소심의 사후심화 방안'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지난 50년 이상 형사 항소심은 별다른 입법구조 변화 없이, 사실상 속심(1심의 변론과 증거조사 결과를 그대로 이어 받아 심증을 형성하는 경향)을 원칙으로 하는 법리전개와 실무운영이 이뤄져왔다"며 "항소로 인한 불이익은 거의 없는 반면, 미결수 대우·감형가능성·벌금집행 지연 등 항소로 인한 이익은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박 판사는 항소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1심에서 모든 주장과 증거가 현출돼 당사자가 충분한 변론과 공방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상고심의 사건 부담을 감소시켜 상고심의 법령해석 통일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담당도록 하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항소심의 속심적 기능을 강화하면 항소와 상고가 늘어 대법원이 정책법원 기능을 못하게 되며, 1심에서 공판중심주의·구술변론주의·집중심리주의가 이루어지도록 한 형사소송법 규정이 형해화된다"며 "항소심을 사후심으로 운영해 1심에서 실체판단을 거쳐 형사분쟁이 종국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해야 각 심급이 제 기능을 다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361조의3을 개정해 항소이유가 구체적으로 기재되지 않으면 법원이 항소를 기각하자고 주장했다. 또 같은법 361조의5 개정을 통해 항소이유 요건을 '명백한' '현저한' 등으로 강화하자는 제안도 했다. 1심에 대해서는 "6개월 제한규정으로 구속기간에 쫓긴 졸속재판 우려가 있고, 이에따라 항소심에서 추가 심리가 불가피해진다"며 "1심에서 보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심리 충실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법원 판례(2006도4994) 등을 고려한 (항소심에서의) 사실 인정 폭을 분명히 설정할 것 △항소심의 사후심적 사실심리에 도움이 되는 규정인 대법원 형사소송규칙 제156조의5를 적극 활용할 것 △1심 판결 인용범위를 확대할 것 △법령적용 오류 등을 이유로 한 파기를 자제할 것 △필요적 변호사건이 아닌한 변호인 불출석 사건에서도 판결이 가능한 규정을 마련할 것 △항소심에서만큼은 특별변호인 제도를 폐지할 것 △항소심 증거조사 제한 규정을 형사소송규칙에 명문화 할 것 등을 골자로 한 다양한 개선안과 입법안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허황 동아대 교수는 "항소심 제도 개선 기준은 속심이냐 사후심이냐가 아니라, 신속한 재판과 실체적 정의라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을 조화롭게 구현하는 것"이라며 "항소심을 정책형 법원인 상고심 쪽으로 당겨오는 것은 권리구제형 법원으로서 항소심을 그만큼 포기하는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고, 피고인의 권리보장이 허술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이날 이건웅(41·40기) 대구지검 반부패수사부 검사가 '수사절차 관련 형사소송법 개정 필요성'을, 류부곤 경찰대 법대 교수가 '새로운 시대 형사소송법을 위한 몇가지 제언'을, 박용철 서강대 로스쿨 교수가 '형사절차상 피의자·피고인의 권리'를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토론에는 최준혁 인하대 로스쿨 교수, 강동범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 송도근(50·38기) 변호사 등이 패널로 참여했다.
김 센터장은 이번 특별 세미나에 대해 "1954년 제정된 우리 형사소송법은 법률이 거의 바뀌지 않고 실무와도 동떨어졌다는 비판을 받아왔다"며 "다양한 전문가들이 개선 필요성이 있다고 느껴온 부분을 자유롭게 발표·토론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형사소송법제가 어떤 헌법적 철학적 기초에서 출발했는지, 원칙과 맥락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지, 앞으로 유지될 수 있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지 돌아보는 성찰적 비판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