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의 유·무효 기준을 제시한 대법원 첫 판결이 '통상임금 사태'에 버금가는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판결 선고 직후부터 로펌에는 자신들이 도입한 임금피크제와 관련한 법률리스크를 묻는 기업들의 자문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판결의 의미를 묻는 질문과 함께 판결문을 구해달라는 기업들의 요청도 꼬리를 물었다. 특히 대법원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근로자들의 연령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는 고령자고용법 위반에 해당해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각 기업 노조 등의 임금피크제 관련 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로펌들은 전담팀을 구성하고 긴급 세미나를 준비하는 등 '임금피크제 사태' 대응에 잰걸음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26일 대법원 민사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임금피크제 적용으로 이전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던 A씨가 자신이 재직하던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을 상대로 낸 임금청구소송(2017다292343)에서 원고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임금피크제’ 퇴직자,
추가 임금 청구 소송 움직임도
기준 까다로워 개별소송으로
“제2의 통상임금 판결”
대법원은 이번 사건에서 임금피크제의 유효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목적의 타당성 △적용 대상 근로자들이 입는 불이익의 정도 △임금 삭감에 대한 다른 조치의 도입 여부 및 적정성 △임금피크제로 줄어든 돈이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을 위해 사용됐는지 여부 등을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이 까다로워 개별 사업장과 사안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것이므로 결국 개별소송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통상임금에 관한 기존 해석을 바꾼 이후(2012다89399 등) 통상임금 관련 소송이 잇따른 것에 빗대 이번 판결이 '제2의 통상임금 판결'이라는 말도 나온다.
정상태(46·35기) 바른 변호사는 "대법원은 임금피크제가 무조건 무효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이유'가 있는 차별인지 여부에 따라 임금피크제의 효력이 달라질 수 있다고 판시했는데, '합리적 이유'가 있는지 여부는 여러 사유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하도록 했다"면서 "통상임금 소송의 '신의칙' 및 불법파견 사건의 '파견'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방법과 유사하므로, 법원의 최종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누구도 결과를 예상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기업 입장에서도 법원의 판단 이전에 현재 운용 중인 임금피크제가 스스로 무효라고 보고 인사제도를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인사제도 운영상에 많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결국 소송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박상훈 화우 대표변호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판결이 내려진 것이 9년 전인데도 아직도 관련 소송이 계속되고 있다"며 "(이번 임금피크제 판결로) 새로 제기되는 사건들도 적어도 4~5년 후 대법원까지 올라간 뒤에야 관련 법리가 구체적으로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임금피크제 관련 소송이 진행된다면 개별 기업이 적용한 임금피크제가 정년연장형(정년을 연장하며 연봉 감액)인지, 정년보장형(정년 유지하며 연봉 감액)인지가 쟁점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번 판결의 사건에서처럼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의 경우 정년은 그대로 두고 연봉만 깎는 구조는 정년연장형에 비해 무효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정상태 바른 변호사는 "판결 이후 대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정년보장(유지)형 임금피크제의 경우에만 해당 판결이 적용되는 것처럼 설명했으나, 임금피크제는 2016년 1월 1일(상시 300인 이상 근로자 사용 사업장)부터 고령자고용법상 정년이 60세로 늘어남에 따라 그 무렵 도입된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법 시행 이전에 미리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경우와 정년을 60세 초과한 나이로 정하지 않은 경우 외에는 모두 정년연장형이 아니라 정년유지형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임금피크제 도입 비율이 높은 공공기관과 금융사에서 소송이 잇따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정년이 있는 300인 이상의 사업체 중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곳은 54.1%에 달했다. 업종별로는 금융·보험업, 도소매업, 제조업 순으로 많았다.
배현태(53·23기)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임금피크제를 일률적으로 적용 중인 공공기관과 연공서열제·호봉제를 채택한 기업들이 임금피크제 관련 소송 리스크가 클 것"이라며 "사용자와 근로자 간 협상을 통해 연봉을 정하는 계약연봉제를 채택하는 외국계 기업들은 연공서열제를 도입한 국내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적다"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이 기업들의 채용 등 인사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상민(43·37기) 태평양 변호사는 "금융권을 중심으로 근로자가 정년을 앞두고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대신 희망퇴직 등을 통해 조기 퇴직하는 경우 활발하다. 고연차 직원들의 희망퇴직으로 줄어든 인원 수만큼 신규채용을 하는 식으로 인사 순환이 일어났다"며 "하지만 임금피크제가 무효화되면 희망퇴직 신청자가 감소함에 따라 신규 인력 채용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송현석(48·34기) 광장 변호사는 "기존 노동쟁송에서는 해고무효확인소송 또는 비정규직소송으로 대표되는 '고용의 안정성' 확보가 중요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여성, 비정규직 등에 대한 차별이슈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을 기점으로 '고령자 차별'에 관한 이슈가 드디어 우리 사회에서도 전방위적으로 제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업들은 차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컴플라이언스 이슈가 없는지 재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윤지·임현경 기자 hyj·hy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