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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2)
박솔잎 기자
2022-06-27 09:10
1부 소묘 (素描) ② 보복 수사와 제3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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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한 일에 나서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

(1971. 8. 26. - 1973. 4. 6.)

 

1971년 이름도 생소한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에 발령됐다. 워낙 의외의 발령에 ‘어쩌다가…’라는 선배들의 걱정도 있었지만, 공직자는 인사발령을 따라야 하는 법.

물어물어 찾아간 강경 풍경은 넓은 평야 지대에 형성된 시가지, 나지막한 단층집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 같았다. 청사로 향하는 길목 교차로에 강경경찰서 건물 한 채가 그나마 읍 소재지임을 나타내는 전부였다. 지척에 법원과 검찰청이 있었다. 전라북도 경계로부터 5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관할구역인 논산군과 부여군은 호남평야가 시작되는 넓은 평야 지대로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시 상주인구는 40만여 명이었다. 검찰과 법원은 일제강점기에 지은 것 같은 단층 목조건물에 현관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위치했다. 현관에 들어서니 건물 바닥재인 나무판자가 모두 낡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두 명의 평검사가 함께 쓰는 검사실 면적은 15평도 못 되었다. 건물이 워낙 낡은 탓에 응급조치로 사무실 구석에는 굵은 통나무 기둥 한 개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었다. 강경지청이 공주지방법원 검찰국 소속이었던 것에 비춰 이 건물은 수십 년이 지난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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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 관사(왼쪽)
1940년대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 현관(오른쪽)

 

2명의 검사와 3명의 직원, 총 5명이 근무하던 사무실에서는 겨울이면 방 한가운데 난로를 피워야 해 검사나 입회 계장 앞에 의자 하나 제대로 놓기 힘들었다. 1970년대 초 국가 재정 형편이 이랬다.

이곳에서 1년 9개월 가까이 근무했다. 인구도 많고 논산 육군훈련소가 있어 사람 왕래가 잦은 곳으로 사건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지역 특성상 크게 이목을 끄는 사건은 없었고, 대구지검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단련됐던 덕에 사건처리로 고생한 적도 없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꽤나 만만치 않았다. 오랫동안 다퉈 온 씨족 간 사건이 많았고, 송사에 졌을 때는 이목이 두려워 오랜 주거지를 떠나기도 해 거의 생사를 걸고 쟁송을 벌이기도 했다. 막상 짚어보면 사소한 일이므로 당사자끼리 화해하도록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화해 권고에 “알았시유” 하고 돌아선 다음 날 “다시 생각해보니 안 되겠는디유”라며 번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알았시유’는 그저 듣는 것이지 결코 공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알 턱이 없었다. 고소 취하로 이해하고 사건처리 결정문을 미리 써놨다가 몇 번이나 이런 일을 당한 후 화해를 종용하는 일은 삼가야 했다. 자기가 품은 뜻을 굽히지 않는 끈덕진 성품, 이것이 충청도 출신의 우국지사와 충신열사가 많이 배출된 지역적 이유다.


무익지언막망설(無益之言莫妄說) 불간기사막망위(不干己事莫妄爲)

“쓸데없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나와 무관한 일에 덤벼들지 말라”


큰 교훈이 된 한 사건을 적어본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사무과가 소란스러워 사정을 들어보니, 앞서 근무했던 선배가 불기소한 사건의 고소인이 부당하다며 항의를 하고 있었다. 중년에 갓 이른 그 여자는 항고 절차를 밟으면 될 것을, 막무가내로 검사를 비방하며 검찰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하필 그날은 그 사건 후임 검사가 출장 중이라 검사는 나 혼자였다. 그녀를 설득해 볼 심산으로 검사실에 불렀는데, 화를 자초한 시발점이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보기 드문 미인으로, 전혀 촌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데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항고 절차에 대해 일러 준 다음 타이르며 돌려보내려 하니 태도를 돌변하며 항변을 하는 것이었다. 주임 검사도 아닌 내가 본인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재조사해 즉시 무슨 조치를 취하는 것이 검찰 본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참아야 했는데, 나는 정색하고 관공서에 와 행패를 부린다면 처벌받는다고 그를 타일렀다. 이 말이 그 여자를 자극했던 것 같다. 불쌍한 백성을 처벌하겠다고 공갈 협박하는 것이 검사냐며 눈에 쌍심지를 켜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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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검 강경지청 근무 당시 송종의 전 법제처장 모습.

 

당시 30세 열혈 청년이었던 나는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모욕적인 언사를 써가며 욕설을 퍼부어 꾸짖었다. 즉시 강경경찰서 보안과장에게 연락해 그녀를 즉결심판에 넘기라고 지시했다. 보안과장이 급히 달려와 그녀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한 후 즉결심판을 청구하기에 이르렀다.

한 시간쯤 지나, 체구가 건장한 청년 하나가 찾아와 자신을 중앙 모 일간지 부여지국장 겸 기자라고 소개했다. 유치장에 있는 여자가 친동생인데, 내 지시가 부당하니 이를 취소해 선처해달라는 거였다.

그제야 비로소 이 여인이 검찰청에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게 된 배경(?)을 짐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사법부 수장이었던 분과 가까운 친척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오빠라며 날 찾아왔던 기자의 태도가 매우 거만해 선처해달라는 구실만 앞세우고 부당한 지시라는 점을 강조하며 은근히 협박하는 말투였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처음으로 경찰 간부에게 직접 지시한 즉결심판 청구를 거둬들인다면 앞으로 검사 노릇 제대로 못 하지 않겠냐며 그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그가 검사실을 나간 후, 나는 즉시 법원 판사실을 찾아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구류형을 선고해 줄 것을 청탁했다. 오빠가 기자인데 사건이 흐지부지된다면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는데, 이 또한 잘못된 것이었다.

당일 즉결심판이 열려 구류 5일 형이 선고됐고, 순한 양처럼 태도를 바꾼 그녀는 가족들에게 젖먹이 아이를 데려오게 한 후 함께 5일 간 구류형을 살았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잊힐 때쯤, 본청의 호출이 있었다. 그녀가 석방된 후 수십 통의 진정서를 청와대 등 정부 각 기관에 제출했는데 모든 진정서가 본청으로 이첩돼 진정사건부에 등재됐다는 것이다. 아무리 검사 신분이라 하더라도 담당 부장검사가 나를 불러 조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위를 자세히 써 부장검사실로 출두했다.

진술서를 본 부장검사와의 대화 내용이다.

“욕설한 내용까지 자세히 적어 놓았군 그래!”
“욕한 것이 사실이니 그대로 썼습니다.”
“쯧쯧, 알겠네. 앞으로 사건관계자를 다룰 때는 조심스럽게 해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이분은 먼 훗날 서울고검장에서 대법관으로 임명된 이명희(李明熙) 씨였다.

돌아와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또 분하기도 했다. 요즘은 검사가 사건관계인으로부터 고소당하거나 진정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겠지만,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세상이었다. 상급 기관 선배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다는 게 부끄럽고 또 분했다.

 

부임 이전 불기소한 사건 놓고
중년 부인이 부당하다며 행패

결국 즉결심판 청구…5일 구류
후일 진정 당해 내가 조사받아

‘건설업자 등치는 기자’ 투서에
일주일 밤낮 조사로 5명 구속

수많은 기자의 눈총 멀리하고
국유림에 식목…밤나무 단지로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쳤어야 했다. 다시 큰일이 벌어졌다.

며칠 뒤 검찰청에 가명의 투서 한 개가 접수됐다. 일종의 투서였던 진정서는 범죄 사실도 막연했다. 부여 주재 중앙 및 지방지 기자 여러 명이 건설업자와 부여군청 공무원을 괴롭혀 거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부여 부소산 중턱에 큰 땅을 마련해 ‘아방궁’이라 불리는 양옥집 여러 채를 지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사무당국자는 피진정인들의 인적 사항을 살펴보다 위 여자의 오빠가 포함됐다는 걸 발견하고 혹시 어떤 일이 또 벌어질지 몰라 미리 내게 귀띔해준 것이었다.

사실 이런 투서 내용은 공람 종결로 끝낼 만한 사안이었다. 범죄 혐의가 구체적인 사실이 아니고 사람들을 비방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청장에게 이 진정 사건을 배당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현지에 나가 정보를 수집하며 수사해야 하니 당분간 시급한 구속 사건은 배당하지 말라고도 부탁했다.

그리고선 부여의 한 여관방을 빌려 수사본부로 삼고, 경찰관 몇 명을 파견받아 내사에 들어간 후 본격 수사를 벌였다.

약 일주일간 밤낮없이 매달린 결과, 부여 및 논산 주재 기자 대부분의 범죄 사실을 밝혀냈다. 숫자가 하도 많아 투서에서 언급된 양옥집을 건축한 중앙지 지국장 5명의 범죄 사실을 집중적으로 밝혀내 전원을 구속했다. 나머지 10여 명에 대해선 불구속기소 또는 약식명령 청구로 이 사건을 종결했다.

아무리 작은 시골 검찰청이었어도 지방 주재 기자 전원이 공갈죄로 입건돼 기소되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복수심에 불탄 철없는 어린 검사는 이 사건이 중앙에까지 번질 수 있다는 걸 살피지 않은 채, 상급관청인 대전지검에 제대로 된 정보 보고도 없이 20여 명의 기자들을 모두 입건했다. 그 중 5명은 구속기소 했으니 다시 생각해봐도 지나친 일이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중앙정부 차원에서 지방 주재 기자에 대한 대대적 정리 작업이 이어졌다.

부임 초 이런 일을 벌였으니 내 처신은 어때야 했겠는가? 수많은 기자가 주시하는 상황에서 집과 검찰청 이외 다른 곳은 마음 놓고 드나들기 어려웠다. 오히려 내게는 행운이었다. 덕분에 민둥산이 돼버린 황폐한 국유림 중 밤나무를 심을 수 있는 임야를 찾아낼 수 있었다.

1973년 4월 6일 서울지검 성동지청으로 발령받았다. 이날부터 1998년 천고재(天古齋)를 짓고 정착하기까지 25년간 객지인 논산 양촌을 수시로 왕래하는 기나긴 인생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강경지청 검사 재직 시절 지청장은 위석(位石) 윤영학(尹榮學) 씨였다. 훤칠한 키에 인자하셨던 충남 청양군 출신의 훌륭한 선배님께 경의를 표한다.


<정리=박솔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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