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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
박솔잎 기자
2022-06-2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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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소묘 (素描) ① 잔뼈가 굵어지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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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도 없던 시절 ‘골필’로 직접 쓴 공소장에 자존심 걸어


눈물 어린 닭 두 마리…악취 나는 거액 수표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1969년 5월 1일 이날이 내가 검사로 첫발을 내디딘 날이다. 대구지방검찰청을 찾아간 첫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당시 대구지방검찰청은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 있었다, 군법무관 시절 나는 육군 제5관구 사령부와 제2군 사령부에서 도합 8개월 정도 근무한 적이 있고, 삼덕동에 하숙하고 있었으므로 법원 검찰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정문에서 마주 보이는 3층 벽돌집 본관 건물은 대구고등법원과 대구고등검찰청이 쓰고 있었으며, 그 본관 건물의 좌측, 즉 정문에서 들어서면 우측에 대구지방검찰청이 있었다. 2층의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이었던 것 같다.


현관에 들어서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현관에서 좌측 통로로 들어가면 가운데 복도를 좌우로 대여섯 개씩의 검사실이 있었으며, 부장검사나 서열이 높은 나머지 상석 검사들은 1층 검사실 위의 2층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본관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건축되었던 것이어서 제법 위용을 갖춘 건물이었던 반면, 지방검찰청의 건물은 검찰의 규모가 커지자 후에 증축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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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전 처장은 1969년 대구지검 검사 임관 후 10일 뒤 결혼식을 올렸다.

 

2명의 초임 검사가 대구지검에 발령받아 부임하였다. 동료 검사보다는 내가 서열이 앞서서 그의 앞방이 나의 집무실이 되었다. 나와 함께 일할 검찰사무직은 대구지검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사람으로서 체구가 당당하여 내 책상에 놓인 명패가 없다면 검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검사로 볼 만한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검사실이라야 그분과 수사 업무를 보조하는 기능직 여직원 등 3명뿐이어서 3개의 책상과 의자가 전부였으나, 여러 개의 캐비닛이 한쪽에 놓여 있었다. 그 속에는 나의 시선과 손놀림을 바라는 수많은 기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검사로 발령받기는 하였으나 사법대학원 시절, 서울지방검찰청 인천지청에서 2개월간 검사 직무대리로 일한 경력 외에 군법무관으로서 검찰관의 임무를 맡았던 것이 그나마 검사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의 전부였다. 군법무관의 경력이라고 해 보아야 군무이탈죄나 업무상과실치사상죄 등 몇 가지 종류의 사건만을 주로 취급하였으므로 검사로서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을 생각하니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임관되기 이전에는 초임 검사로서 서울지방검찰청 본청의 검사로 임관되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임관 당시의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이 초임 검사로서 대한민국 수도검찰인 서울지방검찰청의 본청에 임관되면 본인을 위해서나 조직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인사권자인 법무부 장관이 그 의견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우리 때부터 초임 검사는 지방인 부산, 대구 등의 큰 청 순서로 발령해 왔다.


나의 사법대학원 수료 성적이 부산에 발령받지 못할 순서였던지, 하여튼 부산 다음의 큰 검찰청인 대구지방검찰청으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결재 올린 공소장 못마땅하면
‘수정 지시’ 부전지 달아 반환
한 건에 부전지 8개나 받기도


저승사자 같았던 차장검사
연휴에도 하숙집서 기록검토
직무에 철저한 검사의 師表로

 

대구지방검찰청! 이 검찰청으로 발령받은 사실이 내 일생을 좌우할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니 사람의 팔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내 앞으로 재배당되어 온 사건 기록들을 살펴보니 우선 그 숫자가 수십 건인 데다가 당시로서는 용어조차 생소한 내사사건 기록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그 기록만 보아도 이미 험로가 예고되어 있었다.


나는 타 청으로 전출한 K 검사의 사건 대부분을 재배당받았는데, 그 검사는 나의 대학 동기생으로서 대학 재학 중 고등고시에 합격한 수재였다. 그 역시 대구지검 초임검사로 근무하다가 나의 임관 일자에 다른 검찰청으로 전출되었으나 그는 이미 상사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던 검사였으므로 그가 남기고 간 사건 기록 중에는 내가 책에서나 보았던 죄명이 표시된 두툼한 사건 기록들이 여러 건 포함되어 있었다.


내 방의 검찰사무직은 수사의 보조 실력은 상당하였으나 글씨체가 별로 아름답지 못하여 조서를 제외한 사건결정문은 모두 내 손으로 작성해야 할 형편이었다. 사건의 결정문인 공소장, 약식명령청구서인 약식공소장과 불기소장은 검사가 수사한 결과를 요약해 나타내는 검사 명의의 문서이므로 당연히 검사 스스로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약식명령과 불기소장은 1부만 작성하면 끝나나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공소장은 원본 이외에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송달할 부본을 첨부하여야 하므로 검사가 직접 쓰더라도 경우가 다르다.


그 당시에는 타자기가 보급되어 있지 못했으므로 검사가 미농지 사이에 작성할 숫자에 해당하는 먹지를 끼워 골필(骨筆)을 사용하여 공소장을 작성했다. 미농지가 골필의 압력으로 찢어지지 않도록 담뱃갑 포장용 셀로판 용지를 대고 골필로 글을 썼다. 이 골필이란 것은 볼펜이 아니라 뼈를 깎아 연필처럼 뾰족하게 만들어 놓은 것으로서 먹지에 압력을 가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다. 볼펜을 사용한다면 편리했겠지만 볼펜은 그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개발되었다.


이 셀로판 용지가 귀해 고급 담뱃갑의 포장지를 벗겨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급으로 지급되는 셀로판 용지가 있었으나 저질이어서 골필로 쓰다 보면 찢어지기 일쑤였다.


당시 최고급 담배로 청자라는 담배가 있었다. 청자 담배의 수급이 여의치 못해 다방 등 업소에서만 이를 단골손님에게 제공해 주었다. 다방 마담을 잘 사귀어 놓아야 그나마 청자 담배를 구하여 그 담뱃갑의 껍질인 셀로판종이를 구할 수 있었던 옛날의 사정이 이렇게 딱했다.


이 셀로판종이를 구해 공소장 표지 위에 얹어 놓고 용지 1장마다 작성되어야 할 숫자대로 먹지를 넣어 골필로 글씨를 써야 했다. 이 먹지란 것은 검은색이 묻어나는 종이이다 보니 잘못 다루다가는 흰색 와이셔츠 소매가 검게 오염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와이셔츠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토시를 만들어 와이셔츠 소매를 덮고 공소장을 작성해야 했다. 요즈음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공소장을 작성하고 그 내용을 인쇄하라는 명령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명령한 숫자대로 프린터에서 줄줄이 인쇄되어 빠져나오는 이 세상에 사는 내가 생각해 보아도 꿈같은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공소장을 작성해야 하니, 이 노동을 직접 하기가 여간 지겨운 게 아니어서 검찰사무직원이 글씨를 잘 쓴다면 공소장 초안을 써 주고 그 내용대로 골필을 사용하여 공소장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여 노력을 덜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사람의 필체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니 이렇게 시킬 일도 못 되었다.


법원의 사건 기록이란 것이 공소장 1본주의 원칙에 따라 이 공소장이 기록의 제일 앞에 편철된 후 공판의 진행에 맞춰 각종 서류가 작성되는 순서로 그 뒤에 편철됨으로써 법원의 형사 사건 기록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이 공소장이야말로 사건의 얼굴이다. 얼굴이라도 제대로 생겨야 그 뒤에 나오는 기록도 그럴듯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 공소장이야말로 검사가 법원에 시집보내는 신부의 면사포인 것이다.


이런 문서에 분칠은 못 할망정 어떻게 함부로 작성하여 삐뚤빼뚤한 글자를 써서 작성한단 말인가? 검사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손에 먹이 묻든 말든, 와이셔츠가 검게 물들든 말든, 무조건 내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이를 계기로 검사가 작성하는 검사 명의의 문서인 결정문은 그 이후 수십 년간 한 건도 예외 없이 내 손으로 작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건을 결재하는 차장검사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검사의 결정문인 공소장의 내용이 못마땅하면 그 내용을 대폭 수정하여 다시 작성하라는 내용의 부전지가 여러 개 달려 검사실에 반환되어 오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검사들은 이 부전지를 ‘문어 다리’라고 불렀다. 이 부전지는 차장검사가 자신의 취향에 맞게 특별히 지정한 규격인데, 종서(縱書)로 내려쓰도록 적색의 테를 둘러 인쇄된 것이다.


나는 심지어 한 개의 공소장에 8개의 부전지가 달려 반환되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위에 올라가 다투어 보았자 그 여덟 개를 차장검사 스스로 제거할 가망이 별로 없고, 한두 개를 떼 준다 해도 결국은 새로 작성하여야 하므로 대부분은 시간에 쫓겨 그의 지시 내용대로 수정하여 다시 작성해서 결재를 올리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사건 내용이 비교적 간단한 사안은 이런 대로 해결되었으나 상사로부터 신임을 얻어 가기 시작하면서 배당되는 사건의 질이 달라진 것이 문제였다.


당시의 구속 사건은 절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3종류의 사건이 대부분이었고, 사기·횡령 등 속칭 경제범죄로 구속된 사건은 가물에 콩 나듯 볼 수 있는 세상이었다.


나의 대구지검 검사 말년에 초임 검사로 대구에 발령받았던 모 검사는 사기라는 죄명이 붙어 있는 구속 사건을 한번 처리해 보면 좋겠다고 하면서 내방을 찾아와 그런 사건 기록을 구경할 정도였다.

 

어느 날 그는 사기죄로 구속 송치된 사건을 배당받고 기분이 좋아서 급히 기록을 살펴보았으나 크게 실망했다. 남의 자전거를 한번 빌려 타 보자는 거짓말로 자전거를 빌려 간 후 도망쳐 버린 사기 사건임을 알고 실망했다고 푸념할 정도였다. 그러나 농촌 지역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부터 간간이 부동산 사기 사건이 신종 지능 범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수없이 처리한 사건이 사문서위조, 동 행사, 공정증서원본부실기재, 동 행사, 사기, 횡령, 배임 등 죄명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이런 부동산 사기 사건은 공범 여러 명이 있어서 사람에 따라 공통된 죄명 이외에 여러 사람에 대한 범죄 사실을 따로따로 기술하면서 많은 분량의 공소장 부본을 첨부하여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꺼번에 10여 개의 죄명과 범죄를 기술하는 공소장은 어떤 때는 10여 페이지가 넘는 내용의 공소 사실을 골필을 사용하여 작성했다. 만약 차장검사가 그 어느 한 부분을 못마땅하게 여겨 수정하라는 내용의 부전지를 달아 검사에게 반환한다면 결과가 어떨까?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이 공소장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 더구나 그 사건은 구속 사건이어서 그날이 구속 기간 연장 만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궁리 끝에 위층에 있는 부장검사실을 찾아갔다. 그 부장검사실에는 타자기가 있었다. 부장검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부속실의 여직원으로 하여금 나의 공소장을 찍어 달라고 통사정했다.


부장검사 왈, “차장께서 무슨 이런 사건을 초임 검사에게 배당하여 부장실에까지 피해(?)를 주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일이 잘되어 나는 골필로 공소장을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큰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차장검사의 호출이 있다는 여직원의 보고가 있었다. 당시에는 검사실마다 개별적인 전화가 없었고, 검찰청의 전화 교환수가 있어서 이 방 저 방 벨을 울려 신호를 보내던 시대였다.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듣고 나는 차장검사의 호출임을 직감했다. 교환수가 차장검사의 호출일 때 울리는 신호음은 다른 신호음보다 긴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그 교환 전화의 벨 소리만으로도 그 사정을 직감할 수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무슨 지적 사항이 있을 텐데, 만약 이 공소장을 다시 작성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부장검사실에까지 찾아가 이 공소장을 찍게 된 내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이 많은 분량의 공소 사실을 부장실의 타자기까지 빌려서 알아보기 쉽게 공소장을 작성하였으니, 그 사정을 참작하여 사소한 지적을 하지 말라는 나름의 주문이 있었다.


차장검사실에 불려 간 나에게 그는 이렇게 물었다.


“어디서 타자기를 구해 이 공소장을 찍었소?”
“공소 사실이 너무 길어서 탈자나 오자가 있으면 안 되겠기에 부장검사실에 부탁하여 찍었습니다.”
“만약 내가 이 공소장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정당한 지적이라면 그 명령에 따를 것이나, 저의 생각으로 부당한 것이라면 따를 수 없습니다.”
“그만한 자신이 있소?”
“수사는 저의 책임으로 제가 한 것이고, 차장검사님께서는 기록만 보셨으니 제 결론과 표현은 저의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빙그레 웃던 그는 공소장에 도장을 찍어 결재했다.


사건 결재를 마친 차장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런 사건을 송 검사에게 배당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소. 사건 처리가 치밀하지 못한 검사에게 이런 사건을 배당한다면 담당 검사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로운 사람은 나요.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여러 개의 부전지를 달아야 하고, 또 그 검사를 차장실로 불러야 하니 그 검사가 괴롭겠소, 아니면 내가 더 괴롭겠소?”


이 무렵이 내가 상사로부터 신임받기 시작하였던 때인 듯하다. 1개월에 한 번씩 차장검사의 주재로 전 검사가 참석하는 회의가 열렸다. 각종 지시 사항을 하달하는 내용의 회의였다. 이 회의 시에 회의 자료로 배포되는 문건으로 「차장검사 지시 사항」이란 두툼한 유인물이 있었다.


당시에는 복사기가 없어서 이 유인물을 인쇄소에서 필사(글씨 잘 쓰는 사람)가 가리방을 긁어서 여러 부 인쇄하는 방법으로 제작했다. 그 원고를 제1호 검사실에서 작성하거나 차장검사 스스로 작성하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나는 차장검사 지시 사항의 원고를 작성해야 하는 매우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원고를 작성하기 위하여 내게 제공되는 것이 차장검사가 사건 결재 시에 사건 기록과 검사의 결정문에 핀을 꽂아 검사실에 반환하는 용도로 사용된 속칭 문어 다리라는 부전지들이었다. 수백 장에 달하는 이 문어 다리 묶음이 곧 내가 작성할 차장검사 지시 사항의 기본 자료였다.


차장검사의 부전지는 대부분 한자로 쓰여 있고, 특히 이분은 초서(草書)에 일가견이 있던 분이어서 종서(縱書)로 내려쓴 이 초서로 된 부전지의 내용은 읽어 보기조차 힘든 것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검사실에서는 이 부전지에 쓴 한문 초서를 읽을 수 없어서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읽어 달라고 하는 때도 있었다. 내가 부전지의 수집자(?)가 된 이후로부터는 사건 기록에 매달린 부전지를 들고 내게 찾아오는 경우가 심심치 않을 정도로 많았다.


차장검사 지시 사항의 책자를 만들기 위한 자료로 내게 내려 준 부전지는 수백 개에 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는 고무줄 묶음을 사용하여 마치 돈다발을 100장씩 묶듯이 여러 묶음의 부전지를 내게 전달해 왔다. 그러므로 나는 이 부전지를 일일이 살펴보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린 다음, 내용과 유형을 구분하여 체계적으로 차장검사가 검사들에게 지적해 준 과오를 정리하여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했다.


대부분 월초에 이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부전지가 달려 있던 자리가 기록의 어느 부분이고 결정문의 어느 부분인지 알 수 없는 것도 있어서 때로는 차장검사에게 그 구체적인 경위를 물어 확인한 후 내용을 정리하여 지시 사항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매우 번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보람은 있었다. 이 부전지 내용을 전부 파악하다 보니, 내가 처리해 보지 못한 많은 사건의 경우에 어떤 부분에서 검사의 수사상 잘못이 발생하는 것인지, 또 이를 어떻게 보완해 나가면서 수사해야 하는지, 나의 사건이 아니었던 많은 사건의 처리를 어떻게 해야 적절하게 할 것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는 각 검사실에서 부전지 내용을 읽어 달라고 내 방으로 찾아오는 사례가 더욱 빈번해졌다. 차장검사가 줄줄이 내달리며 종서로 내려쓴 한문 초서를 읽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내가 그의 한문 초서를 흉내 내면서 쓰기 시작한 한문의 내 글자체는 그때 형성되었다 할 것이다.

이분께서는 검찰청 직원의 근무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가지의 일화를 남겼다.


당시 대구지검 근무 검사 중 객지에서 생활하며 주말에 서울을 오가던 검사도 있었으므로, 차장검사가 특히 월요일 출근 시간에 맞춰 각 검사실을 순방하면서 검사의 출근 상황을 점검하는 일이 많았다. 점심시간을 제대로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오후 1시경에 각 검사실을 돌아보는 일도 잦았다.


어느 날 이분께서 그 시간에 내 사무실을 둘러보았던 모양이다. 그날 구속 기간이 연장된 사건을 기소하기 위하여 공소장을 작성했는데, 그 공소장에 반드시 편철되어야 할 구속영장은 있으나, 판사가 서명한 구속 기간 연장결정서를 찾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 비상이 걸린 것은 당연하다. 직원들이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문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기록을 샅샅이 찾아보아도 결국 이 문서는 보이지 않았다. 궁리 끝에 그 연장결정서를 발부하였던 법관을 찾아가 이를 새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법관이 내용을 들은 후 다시 연장결정서를 만들어 주기에 고맙다고 인사한 후 즉시 그 문서를 들고 와서 이를 공소장에 첨부하여 결재를 올렸다.


얼마 뒤 차장검사의 호출이 있기에 또 무슨 잘못을 지적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차장검사실에 올라갔더니, 그는 오늘 점심시간에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사실대로 고할 수밖에….

 

그런데 그 방의 직원들은 다 어디에 갔길래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방에 아무도 없었느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늦었을 뿐, 직원들은 제시간에 사무실에 들어와 있었을 것으로 알고 있는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송 검사는 참 재주도 좋은 사람이로구먼.”이라며 뚱딴지같은 말씀을 하시기에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랬더니 “이 공소장에 구속 기간 연장결정서가 붙어 있는데, 이 연장결정서는 또 어떻게 된 것이요?”라고 하시며 책상 서랍을 열면서 무슨 종이를 꺼내므로 쳐다보았다. 그것은 내 사무실에서 없어졌던 그 구속 기간 연장결정서였다.


오후 1시경 검사실을 순시하던 그가 내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내 책상 위 기록 속에 끼워 두었던 그 연장결정서를 빼내 가지고 간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재주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큰일이 날 뻔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서울에 가족을 두고 대구에 내려와 근무하면서 유명한 호텔의 방을 빌려 지내며 지프차로 출퇴근하는 검사가 있었다. 그의 처갓집이 부자였던 덕분이다. 이 검사가 차장검사의 눈 밖에 난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결재를 올리는 많은 사건이 한두 개씩의 부전지가 달린 채 다시 반환되고 있었다. 그가 처리했던 어떤 사기죄의 공소장에 달린 부전지의 사연을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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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간 검찰 재직 시 작성했던 업무일지.

 

몇 개의 부전지 중 한 개의 내용은 공소 사실에 달려 있던 것인데, ‘동인을 구체적으로’라는 것이었다. 그 보기 싫은 부전지가 달려 있으니 검사가 스스로 다시 공소장을 작성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는 입회 계장에게 다시 공소장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던지, 그 계장이 부전지의 내용대로 ‘동인을’이란 세 글자를 ‘구체적으로’라고 고쳐 쓴 공소장이 다시 차장검사실에 올라갔다. 곧이어 다른 부전지가 그 공소장에 달려 반환되었다.


그 부전지의 내용은 ‘동인(同人)을 구체적(具體的)으로라고 함은 동인의 성명(姓名) 3자(字)를 구체적으로 적시(摘示)하라는 지적(指摘)임’이었다. ‘동인을 기망(欺罔), 그 지(旨) 오신(誤信)케 하여’라는 공소 사실이 ‘동인을 구체적으로 기망, 그 지 오신케 하여’로 고쳐졌으니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공소 사실은 아니었다. 이런 웃지 못할 사정을 알게 된 것은 내가 그 부전지의 수집자였기 때문이다.


차장검사의 미움을 받았던 또 다른 검사가 있었다. 그가 미움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사건 처리가 치밀하지 못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겠지만, 그의 헤어스타일이 마치 연예인 같은 모양이어서 단정한 검사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이 두 검사가 초임 검사 시절에 많은 고초를 겪으며 상사로부터 철저한 지도를 받은 것이 도움이 되었던지, 아니면 세상이 변하면서 정권이 뒤바뀌는 세월의 흐름 탓이었던지, 두 검사 모두 명예롭게 퇴직하지는 못하였으나 먼 훗날 어떤 정권에서 법무 검찰의 최고위직에 임명되었다.


초임 검사로 근무할 당시 저승사자와 같았던 차장검사는 오래전에 이승을 떠났다. 많은 검사로부터 원망을 듣던 그분은 직무 수행에 있어서만은 너무도 철두철미한 직업인이었다. 그가 연초의 연휴에도 가까운 부산 집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수많은 결재 사건 기록을 하숙방에 싸 들고 가서 검토하면, 연초 시무식 직후 각 검사실에 부전지가 달린 사건 기록이 줄줄이 반환되었다.

 

나는 그의 하숙집에 불려 가 그가 사건 기록 검토에 매달려 있는 동안 연초 시무식에서 차장검사가 검사들에게 지시할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 사실을 직접 보아 알고 있다.


그가 나를 그토록 신임하였으니 내게 배당되는 사건이 어떨 것인지는 검사라면 곧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지내면서 초임 검사 시절을 겪었다. 나는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 검사로, 그는 서울지검의 부장검사로 발령된 날 작별 인사차 차장검사실에 간 나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송 검사! 송 검사는 이제 어느 청에 가서 어떤 사건을 맡더라도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는 검사가 되었다고 나는 믿소.”

 

이 글을 쓰기 전 내가 보관하고 있던 『대구지방검찰사』(1992년)를 잠시 훑어보니, 나의 2년 4개월 경력 기간 중 대구지검 본청과 지청에서 처리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 7개의 사건 중 1971년도의 2건이 내가 주임 검사로 처리한 사건임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초임 검사 시절, 대구지검에서 있었던 두 개의 에피소드를 여기에 적어 둔다. 하나는 내가 뇌물을 받은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뇌물을 거절한 이야기이다.


첫 번째는 뇌물을 받은 사례이다.

 

퇴근한 후였는지 아니면 그날이 공휴일이었는지 기억에 없으나, 내가 집에 있는 때에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중년의 아낙네였다. 등에 한 아이를 업고, 한 손에는 걸어 다닐 만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다른 손에는 닭 두 마리가 묶인 채 들려 있었다. 나를 찾아온 이유를 물어보니, 검사님께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집에서 기르던 닭 두 마리를 이렇게 들고 온 것이라고 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여인은 내가 업무상과실치사죄로 기소한 운전사의 부인으로서 그의 남편은 파월 근무를 마친 예비역 육군 대위였다. 귀국 후 제대하여 어떤 차량의 운전사로 일하다가 피해자가 사망한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되었는데, 내가 그 사건의 주임 검사였다. 나를 고맙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그 사건의 송치를 받은 그다음 날 그를 기소해 법원으로 넘겼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그 사건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 피의자가 나와 같은 파월 근무의 경력이 있는 육군 장교였기 때문이다. 사건의 내용이 검사의 직권으로 구속취소하여 불구속으로 재판받도록 해 줄 사안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빨리 재판받아 집행유예로라도 석방되는 길이 그 사람에 대한 최선의 배려라는 생각으로 송치된 날 조사를 마치고 그다음 날 공소장을 작성하여 기소한 것이었다.


그의 남편을 석방해 준 것도 아닌데, 나를 고마운 사람으로 여겨 찾아왔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남편이 구속된 후 여러 군데 물어보았더니 재판을 빨리 끝내게 하려면 먼저 검사에게 빨리 기소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검사님께는 전혀 부탁도 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신속히 결정하여 사건을 법원에 넘겨주었으니 참 고마운 일이므로 검사님의 집을 여기저기 물어보면서 찾아온 것이라 했다.


듣고 보니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사건을 배당받았다면 신속히 조사하여 그 사건에 맞는 결론을 내주는 것이 검사의 당연한 직무가 아니겠는가? 그 많은 사건 기록에 파묻혀 지내는 검사가 더 조사할 필요가 없는 사건을 책상 위에 놓아둘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를 고맙게 여겨 그 여인은 경북 청도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한 어린애의 손목을 잡고, 젖먹이는 업고, 나머지 한 손으로 이 닭 두 마리를 들고 나의 거처를 물어물어 내 집에까지 찾아온 이 기막힌 사연!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지극히 당연한 일도 부탁해야만 통한다고 알고 살아온 이 순진한 백성! 백 리 가까운 길을 시외버스를 타고 많은 시간을 들여 고생하면서 검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들고 온 가련한 닭 두 마리!


나는 한참을 물끄러미 그 여인을 바라보다가 크게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인사한 후, 그 닭 두 마리를 받아 놓고 그 여인을 보냈다. 그 여인은 내게 자기 남편의 구형을 가볍게 해 달라는 말조차 할 줄 모르는 순박한 백성이었다.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아! 우리 검찰만이라도 이런 썩어 빠진 비리의 구렁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이 닭 두 마리는 법률상 뇌물이 분명하지만 나는 이 일을 참 잘한 일이라고 지금껏 생각하고 있다. 만약 내가 그 닭 두 마리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 여인은 그 닭을 들고, 애들을 업고 걸린 채 다시 집으로 그 먼 길을 가야 했을 테니 사정이 어떠했겠는가?


일찍이 자허원군(紫虛元君)께서 『성유심문(誠諭心文)』에 이르되 “물순래이물거(物順來而勿拒)”라 하여 순하게 오는 재물은 거절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 이처럼 순하게 오는 재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 운전사는 법원에서 집행유예의 형을 받고 석방되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늘, 그 재판의 결과를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순진한 백성들을 괴롭혀 뇌물을 받아먹는 공직자가 있다면 나는 이렇게 고함칠 것이다. “네 이놈, 당장 지옥으로 가라!”

 

남편 빨리 기소한 게 고맙다고
아이 업고 닭 두 마리 들고 온
교통사고를 낸 피의자의 아내


두 번째는 뇌물을 거절한 사례이다.


이 사건은 『대구지방검찰사』에 정사(正史)로 기록되어 있다. 그 사건은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날 뿐, 사건의 정확한 내용이나 수사 경위와 상황 등은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분명히 각인된 내용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유명한 재벌가의 집안 어른이라 할 만한 사람이 관련된 사건이었다. 그는 내가 직접 입건한 피의자였다.


이 사건 수사 중 그 집안과 오랜 인연을 이어 오면서 거래했던 서울의 명망 있는 인사 한 사람을 대구로 소환하여 그의 범죄 사실을 밝혀 그에 대한 범죄인지서를 작성했다. 그길로 그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법원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구속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형사소송법상 구속적부심사제도가 있어서 그가 구속된 며칠 후 구속적부심에서 석방되었다.


이 사람은 서울에 사는 사람이었다. 나의 소환에 응하여 대구지검에 출두하였다가 그길로 대구에서 구속된 것이다. 그가 석방되던 날, 그는 아무도 없는 나의 동인동 집을 찾아와 케이크 상자를 놓고 갔다. 저녁에 퇴근하여 그 포장을 뜯고 보니 성명 석 자가 표시된 봉투 속에 수표 1매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자기앞수표는 물론 서울에서 발행된 것이었는데, 당시 검사 1개월 봉급의 몇 배나 되는 금액의 자기앞수표였다. 금액이 너무 커서 놀랐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조속히 처리해야 할 사건으로서 구속된 공범의 구속 기간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대구지검에 출두하면서 전혀 구속되리라 예측 못하고 검사의 소환에 응하여 대구에 내려왔던 것인데, 그 사정으로 미루어 보면 내가 다시 소환하더라도 검찰에 자진 출두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건 공범의 구속 기간 연장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아 며칠 내에 결정문을 써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므로 이 사람을 불러 그 수표를 되돌려주지 않는 한, 내가 뇌물을 받아 놓은 상태로 사건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생각 끝에 나는 이 사건 처리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울행 통일호 열차표를 샀다. 이 사건의 처리를 위한 마지막 한 가지 절차가 남아 있어서 서울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위 재벌가 어른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울 출장의 절차를 밟은 후 수표를 놓고 간 피의자에게 연락하여 서울에서 은밀하게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내가 지정한 장소는 당시 서울 법원과 검찰청의 청사가 있던 서소문의 배재다방이었다.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온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구가 자기에게는 객지로서 설마 구속이야 되겠는가 싶어서 당일로 돌아올 것으로 예상하여 별로 준비도 없이 검찰청에 출두하였는데, 그길로 구속되었다. 며칠 만에 석방되기는 했으나 당시 가지고 있었던 돈이 별로 없었고, 그 수표 한 장만이 주머니에 남아 있어서 부득이 그 수표만을 넣어 드렸다. 이를 저의 불찰로 여기고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는 취지의 말을 먼저 꺼낸 다음, 오늘 검사님을 만난 곳이 서울이고, 미리 연락을 주셨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 나름대로 섭섭지 않을 만큼의 성의를 마련했다고 하며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돈 봉투 하나를 슬며시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똑바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래는 그와의 대화 내용이다.


“내 나이가 몇 살이나 되어 보입니까?”
“검사님은 30 초반 정도 되어 보입니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세상을 살 것 같소?”


이상한 질문으로 생각되었던지 나를 한참 쳐다본 후,


“검사님께서야 물론 70 넘어 장수하시겠지요.”

“이놈아! 내 인생 40년을 네가 가져온 이 돈과 바꾸자는 것이냐?”


나는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그가 대구에 놓고 간 봉투를 내던지고 돌아섰다. 그러자 그는 급히 나에게 다가와 “이번 성의는 적은 것이 아닙니다. 받아 두시지요.”라고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체도 않고 나는 급히 그 다방을 빠져나왔다.


다방을 나선 그길로 위 노인께서 입원해 있던 그의 병실을 찾았다. 방문하겠다고 이미 통보해 두었던 터이므로 그의 병실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탁자에 정갈스럽게 마련한 다과와 따뜻한 차 그리고 음료수 몇 병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노인께서는 불편한 몸을 추슬러 가며 예의를 지키려고 애썼다.


사건의 전말에 관하여 충분한 대화를 나눈 후에 조서 작성에 들어가기까지 약 3시간에 걸쳐 그 노인과 문답을 진행하며 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그가 진술한 취지는 대강 다음과 같다.


오래전부터 고미술품의 수집과 보존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수집해 왔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그간에 모아 두었던 쓸 만한 물건들은 모두 ○○대학교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된 이 물건을 보니 과거에 보던 것과는 모양과 색감 등이 전혀 달라서 매우 특이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골동품이란 것은 비유하자면 선보러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규수와 같아서 처음 감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가치가 천차만별이 된다. 처음 본 사람이 식견이 높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 준다면 이 물건은 이후 그 이상의 가치를 계속 유지하지만, 그렇지 못한 때에는 높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물건을 보는 순간 이것만은 내가 사서 죽는 날까지 내 곁에 두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요구하는 대로 값을 치르고 샀다. 이 물건을 아무개가 몇 천만 원에 산 것이라 하면 이 물건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문화재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사지 않았더라면 이 물건은 이미 일본 같은 외국에 헐값에 팔려 나가 우리나라에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조사가 끝날 즈음, 그 노인께서는 “이 물건이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라고 물어 왔다. 나는 정중히 그에게 말했다. “이 물건이 현재 압수되어 있으나 판결은 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지금까지의 법률상 소유자는 노장님입니다. 그 처분은 당사자의 자유의사와 판결의 내용에 따라 결정될 것이므로 그것은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 노인께서는 “검사님 말씀대로라면 내가 주인이 틀림없으나 나는 이미 주인이 아닌 것 같소. 나와는 인연이 다하였으니 이 물건을 나라에 기증하리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소유권 포기서를 내밀었다. 그 문안을 읽어 본 그 노인께서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껄껄 웃으시더니, “검사님의 추궁을 받는 과정에서 내가 이미 짐작했습니다. 그 물건에 이제 미련은 없소. 도장을 찍어 드리리다.” 도장을 찍은 다음 나에게 하는 말은 이랬다.


“나도 보통 사람은 아닌데, 송 검사님도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오. 이런 포기서까지 미리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오. 그런데 내가 준비한 그 음료수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어찌 한 입도 대지 않소? 내가 검사님을 서울역으로 잘 모셔다 드리도록 아랫사람들에게 지시해 두었으니 이 병원 정문에 그 차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그 차를 타고 가십시오.”


정중히 그 노인의 쾌유를 빈다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병실을 나섰으나, 병원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는 기어이 사양한 채 택시를 잡아타고 만 29세의 어린 검사는 그 병원을 떠났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간의 정리가 무엇인지, 받아야 할 호의와 받지 않아야 할 호의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했던 좁쌀만 한 마음가짐의 옹졸한 검사!

 

나의 철없는 행동으로 인하여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불편한 몸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 분명한 우리나라 고미술계의 선각자와 철없는 어린 검사! 이 두 사람이 화제의 주인공이 된 문화재보호법위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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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67호 청자 인물형 주전자

 

이런 과정으로 소유권이 포기된 그 물건은 재판 과정이 끝난 후, 그 노인께서 예측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팔공산 기슭에서 도굴되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희귀한 모습의 청자! 대한민국의 국보 제167호 〈청자 인물형 주전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청자는 위 재판이 끝나 판결이 확정된 이후인 1974년 7월 9일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사건이 처리되던 날, 나의 처리 의견을 듣던 차장검사가 내게 한 말을 듣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송 검사가 엊그제 서울에 가서 아무개에게 돈 봉투를 다시 돌려준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소. 검사장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그런 송 검사의 의견이니 그 뜻을 존중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으나, ○○○에 대하여는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으므로 이를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소?”


듣고 보니 그의 의견이 과연 옳았다. 범죄의 성립 여부에만 매달려 가부를 가리려 하는 초임 검사의 눈에는 오랜 인생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날 검사장실에 불려 가 검사장 역시 내가 돈 봉투를 돌려주고 온 전후 사정을 나보다 더 소상히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서운 세상이었다.

  

고미술계 대부로 불리던 피의자
두 번의 봉투, 매몰차게 거부
사건 보고하니 이미 알고 있어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아


내가 만일 그 피의자로부터 두 개의 돈 봉투를 받아 놓은 채 사건을 처리하였다면 나의 상사들은 나를 어떤 눈으로 보았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자허원군께서도 『성유심문』에 청렴하지 못하면 자리를 잃는다는 뜻의 ‘인불염이실위(人不廉而失位)’란 말을 남기셨을 것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천명편(天命篇)」에 들어 있는 말. 서로 은밀히 속삭이는 사사로운 말을 하늘은 우레처럼 듣고, 어두운 방에서 혼자 품고 있는 삿된 마음도 귀신은 번개같이 본다는 뜻의 ‘인간사어천청약뢰(人間私語天聽若雷) 암실기심신목여전(暗室欺心神目如電)’이란 명언을 다시금 되씹어 보게 하는, 내게는 실로 엄청난 교훈을 준 사건이었다.


상사를 속일 수 있었더라도 차마 속이지 못한다는 뜻의 가기불인(可欺不忍)은 내 마음이었고, 상사를 속이려 해 보아도 결코 속일 수는 없다는 뜻의 욕기불기(欲欺不欺)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내게 두 번씩이나 뇌물을 주려 했던 고미술계의 대부라 할 만한 이 사건의 피고인은 그때로부터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다음, 내가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3부장으로 재임하던 중 그 부 소속 눈 밝은 검사에게 다시 같은 죄명으로 걸려들어 오랫동안 철창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이런 것을 악연(惡緣)이라 하는가?


위에 말한 나의 초임 검사 시절에 일어난 사건이 내게 주는 교훈은 컸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나는 공직자로서 어떤 자세로 근무해야 할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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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인규 차장검사 · 고 조태형 검사장

 

내가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발령받을 당시 우리나라 검사의 총정원은 정확히 300명이었고, 내가 모신 검사장은 조태형(趙台衡), 차장검사는 김인규(金麟圭) 씨였다. 철없는 초임 검사를 철저히 지도해 주신 두 분 검찰 선배님께 경의와 감사의 뜻을 담아 이미 고인이 된 두 분의 명복을 기원하는 바이다.


 

법률신문은 72년 만의 베를리너판으로의 판형 변경을 기념해 송 전 장관이 2015년 써두었던 회고록을 연재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검사와 법조인들에게 길잡이가 되길 소망한다. 회고록은 총 18편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걸 에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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