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부장판사는 합의부를 맡게 된 후 배석판사들 눈치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함께 일한 시간도 꽤 흘렀지만 배석판사들이 싫어할까 싶어 휴대전화로 연락하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어린이날이 다가오자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배석판사들의 자녀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핑계로 용기를 내 배석판사들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A부장판사는 곧 왠지모를 씁쓸한 감정에 잠겼다.
지적하면 재판독립 침해로 오해
부장과 배석 경험 공유도 못해
재판 관련 이야기는 거의 없어
경륜·경험에 대한 존중 사라져
부장이 배석 휴가 간 줄도 몰라
나무와 숲 함께 보는 지혜 필요
소통 부재로 업무처리 과정에서 오해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합의부의 도제식 교육이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한 부장판사는 "합의부에서 배석판사가 판결문을 작성해 오면 부족한 부분이나 고쳐야 될 부분을 알려주기 마련인데, 배석들이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것 같다. 판사 대 판사인데 굳이 지적을 해야 하느냐는 식이다"라며 "부장과 배석들이 더 넓은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고 의견도 충분히 교환하지 못해 미흡한 판결문을 양산하는 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합의사건에서 서로 생각이 달라 합의가 잘 안 될 때가 있는데 이견이 안 모아지면 나중에 서로 마음이 상하고 갈등처럼 길어질 때가 있다"며 "예전에는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종종 있어 밥을 먹으며 얘기 하다 보면 마음이 풀리고 원활하게 합의에 나아갔는데, 요즘은 그런 자리가 드물어 서로의 마음을 풀 기회가 많지 않다"고 했다.
◇ "소통 확대돼야 재판·사법 서비스 질도 높아진다" = 일각에서는 판사가 혼자 고립되는 것이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법원장을 지낸 한 법관은 "법관이 홀로 고립되면 자기 생각에만 갇혀 오로지 자신의 판단만 맞다고 단정하기 쉽다"며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안을 보려면 여러 법관들과 교류할 필요가 있다. 단절되고 침체된 현재의 법원 분위기를 혁신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한데, 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들의 의지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 이후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 등 선배 법관들의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졌기 때문이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로 판사들이 갈갈이 찢겨지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굳어져 버렸다"며 "여기에 법원장 추천제가 확대되면서 후배 법관들에게 지지를 얻으려고 더욱 간섭하지 않는 분위기가 된 것 같다.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전직 부장판사는 "한번은 배석판사를 찾으니 '휴가를 갔다'는 얘기를 다른 직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같은 합의부 소속 부장에게 휴가를 간다는 언질도 없이 떠난 것이라 매우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최근 법원 모습을 보면, 경륜과 경험에 대한 존중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며 "배석들이 '나무'를 보면, 부장들이 거리를 두고 '숲'을 보며, 사건에 대한 시야가 좁아지지 않도록 소통하고 매니징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런 긍정적인 면들이 소통 단절로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재판이나 사법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국민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경륜있는 부장판사들로 합의부를 구성해 재판의 전문성과 질을 높이겠다는 경력 대등 재판부도 결국 내부 구성원들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단독 재판부화 될 수밖에 없다"면서 "좋은 재판, 선진 사법을 이루기 위해서는 법관 사회에서 의견 교환이 활발히 이뤄지고 소통이 원활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박수연·한수현·이용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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