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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2)
박솔잎 기자
2022-07-05 14:03
1부 소묘 (素描) ② 보복 수사와 제3의 인생 - 대전지검 강경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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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한 일에 나서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

(1971. 8. 26. - 1973. 4. 6.)

 

대구지방검찰청의 검사로 약 2년 4개월간의 근무를 마치고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으로 전보되었다. 인사 발령을 받고 강경이란 이름 자체가 생소하여 지도를 펴 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호남선 위에 전라도 쪽으로 논산역 다음에 그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워낙 의외의 발령이었으므로 선배 검사들에게 물어보니 마침 그곳에 근무한 선배 한 분이 있었다. 그 선배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쩌다 하필 그런 청으로 발령받았느냐는 취지였다. 별로 좋지 못한 곳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공직자는 어차피 인사 발령에 따라 임지를 옮겨 다니는 처지인지라 마침 대전지방검찰청 본청에 근무하던 대학 동기생에게 전화를 걸어 강경 가는 길에 한번 만나기로 했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함께 강경지청 근무를 명받은 나머지 한 검사가 나의 대학 동기생이었던 김기석(金基錫) 검사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초임 발령지가 전주지방검찰청이었는데, 강경으로부터는 불과 100리를 넘지 못하는 전주에서 근무하다가 서울 쪽으로 겨우 그 거리밖에 올라오지 못하고 강경에 근무하게 된 것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강경의 풍경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넓은 평야 지대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큰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고 나지막한 단층집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은 전혀 찾을 수 없고, 강경지청 청사로 향하는 길목 교차로에 강경경찰서 건물 한 개가 그나마 그곳이 읍 소재지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경찰서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법원과 검찰청의 건물이 있었다. 전라북도 경계로부터 5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법원 검찰의 건물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강경법원 및 검찰의 관할구역인 논산군과 부여군은 호남평야가 시작되는 넓은 평야 지대로서 그 외곽의 산악 지역에 인접한 몇 개 면을 제외하면 농경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논산과 부여 두 군에 현감이 상주하던 곳이 다섯 군데나 되는 지방이었다. 논산군의 은진(恩津), 연산(連山), 노성(魯城) 등 세 곳과 부여군의 석성(石城), 임천(林川) 등이 그곳이었다. 은진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송씨(宋氏)의 세거지(世居地)가 현재 대전광역시에 편입된 대덕군(大德郡)에 산재하여 있기는 하나, 이 송씨들의 관향이 은진이다.


그러나 사후에 살펴보니 이곳에는 은진 송씨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런데 연산이란 곳은 기호학파의 태두(泰斗)였던 광산(光山) 김씨(金氏) 문중(門中)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께서 돈암서원(遯巖書院)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였던 유서 깊은 고장이다. 그곳에 인접한 양촌면 일대는 현재까지도 광산 김씨 문중의 후손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이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나의 11대조인 우암(尤庵)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선생과 김씨 문중과의 인연 때문이다.


사계 선생 문하에서 정승 반열에 오른 두 분의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었다. 우암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그들이다. 이 두 분께서 사계 선생의 학풍을 진작시켜 일세를 풍미한 것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 여기에 적어 둔다.


아마도 이런 선대와의 인연 때문에 내가 연산현을 관할하는 강경지청의 검사로 부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곧바로 이곳 양촌으로 내려와 나의 만년을 보내게 되었으니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다시 검찰청으로 되돌아간다.


검찰청사에 임하여 보니 일제강점기에 지은 목조건물인 듯한데 단층 건물 한복판에 현관이 있고, 그 현관을 중심으로 한편은 법원, 다른 한편은 검찰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현관에 들어서니 건물의 바닥재인 나무판자가 모두 낡아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고, 그 현관 좌측에 두 명의 평검사가 함께 쓰는 검사실이 있었다. 면적은 15평도 못 되는 방이었다.


그 사무실을 들어가면서부터 인상적인 것은 사무실 한편 구석에 굵은 통나무 기둥 한 개가 서서 건물의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풍경이었다. 워낙 낡은 목조건물이므로 대들보의 붕괴 위험이 있어서 응급조치로 이렇게 큰 나무 기둥으로 보완을 해 놓은 것이라 했다.


이 건물이 언제 축조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이 공주지방법원 검찰국의 강경 분국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수십 년이 지난 건물임은 분명할 것이다. 이런 검사실이 두 명의 검사와 세 명의 직원 등 모두 다섯 명이 근무해야 했던 사무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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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 관사(왼쪽)
1940년대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 현관(오른쪽)

 

한겨울에 추위를 피하려면 방 한가운데 난로를 피워야 했으나, 이 난로가 설치되면 검사나 입회 계장 앞에 앉을 피의자 또는 참고인의 의자를 제대로 놓기 힘든 상황이었다. 검찰청 반대편의 법원 판사실도 이와 같은 규격이었으나 그 방엔 세 명의 판사 책상만이 있었으므로 형편은 검사실보다 좀 나은 듯했다. 1970년대 초반 국가의 재정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것이 강경지청만의 사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게 남아 있는 몇 개의 자료를 들추어 보니, 내가 검사로 임관되기 직전인 1967년 당시 법원, 검찰청 그리고 교도소, 등기소 등 사법 시설은 238개 건물이고, 그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50년 이상이 된 것이었다. 이런 시설들이 점진적으로 개·보수되거나 신축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데에는 법률상 특별한 계기가 마련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므로 그 내용과 연혁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 둔다.


1967년 3월 30일 사법시설조성법(법률 제1923호)이 제정·공포되었다. 사법시설 조성은 당해 연도 벌과금 및 몰수금 수입 예산액과 당해 연도의 인지수입 예산액을 합산한 금액 중 일부를 재원으로 연차적인 시설 개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사법시설 특별회계를 설치하되, 그 적용은 1968년 회계연도부터 1972년 회계연도까지로 했다. 그해 11월 29일에 공포된 동법 중 개정법률(법률 제1979호)에 따라 조성 재원에 일부 국유재산의 매각대금을 포함시키게 되었으며, 동일자로 사법시설특별회계법(법률 제1978호)이, 1968년 7월 3일에는 사법시설조성법시행령(대통령령 제3498호)이, 각 개정·공포되었다.


또한 1972년 10월 7일에 공포된 사법시설조성법 중 개정법률(법률 제2343호)에 의거, 그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 시설에 경찰시설도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법률의 명칭도 사법시설등조성법으로 변경하였으며 그 적용 시기도 1976년 회계연도까지로 연장하였다.


이런 법률적인 혜택이 있었으나 그 당시까지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전혀 손대지 못했던 이런 검찰청사에서 나는 1년 9개월 가까이 근무했다. 당시는 농촌 인구가 상당히 많아서 강경지청의 관할인 논산군과 부여군의 상주인구는 40만 명 정도였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인구 중 태반이 대도시로 이주하여 현재는 그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인구가 많고 또 논산시에 육군훈련소가 있어서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으므로 사건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지역적 특성상 형사 사건이라고 해 보아야 크게 이목을 끌 만한 사건은 별로 없었다. 대구지검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단련되었던 탓에 사건 처리로 고생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위에 말한 대로 이 지역은 옛날부터 다섯 곳에 현감이 상주하던 곳이었으므로 선대의 풍습과 전통이 많이 남아 있어서 정서적으로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씨족끼리 다투어 오면서 검찰과 법원을 괴롭히는 사건들이 많았다. 그 밑바탕에는 이 송사에서 패하는 쪽에서는 남의 이목이 두려워 조상 대대로 이어 살아온 세거지를 떠나야 한다는 설움이 있었기 때문에 거의 생사를 걸고 민형사상의 쟁송을 벌이는 사례가 더러 있었다. 그 근원을 찾아 올라가 보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로부터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사건 당사자인 쌍방이 화해하도록 한 나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쌍방을 불러 조사를 마친 후 서로가 납득할 만한 타협점을 제시하고 화해하도록 몇 번 종용한 다음, 고소취하서를 작성해 주고 잘 생각해서 날인해 오도록 했다. 그들은 “알았시유.” 하고 돌아갔으나 그다음 날 다시 찾아와서는 “검사님! 다시 생각해 보니 안 되겠는디유.”라며 나의 권유에 따르지 않는 사례가 많았다.


이 지방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알았시유.”라는 말의 뜻은 “당신의 말을 지금 듣고 있습니다.”라는 뜻에 불과할 뿐, 말하는 사람의 뜻에 공감한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이를 알 턱이 없는 내가 의례적인 그들의 말을 듣고 내 말에 동의하여 고소를 취소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사건 처리의 결정문을 미리 써 놓았으니 이것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몇 번이나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이 고장 사람들에게 화해를 종용하는 일은 삼가야 했다. 느릿느릿하지만 좀처럼 자기가 품고 있었던 뜻을 굽히지 않는 끈덕진 성품, 이것이 충청도 출신의 많은 우국지사와 충신열사가 배출된 지역적 이유이다.


나에게 교훈이 되었던 한 사건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강경지청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사건이다.

 

검사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무과가 매우 소란스러웠다. 일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사무과 직원을 불러 사연을 알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근무하였던 선배 검사가 처리한 어떤 사건의 고소인이 검찰청을 찾아왔다. 그 사건이 불기소처분되어 그 통지를 받은 고소인인 중년에 갓 이른 여자가 그 검사의 처분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항의하고 있었으므로 검찰청이 떠들썩했다.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하여는 법률상 항고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항고장을 제출하면 상급검찰청의 판단을 다시 받아 볼 수 있다. 그 절차를 밟으면 되는 사건이었으나, 이 여자는 막무가내로 검사를 비방하면서 검찰청의 사건 처리가 잘못되었다고 항의하며 떠들고 있었다.


그날은 동료 검사가 출장 중이어서 검사는 나 혼자 검사실에 있었는데, 원래의 사건을 처리한 검사의 후임 검사는 내가 아닌 동료 검사였다. 내가 그 고소인을 설득해 볼 심산으로 그 여자를 검사실로 데리고 오도록 지시했다. 그대로 떠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이 여자를 검사실로 데리고 오라고 한 내가 드디어 화를 자초하게 된다.


검사실에 들어오는 그 여자의 외모를 살펴보았더니 이목구비가 반듯한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옷도 제대로 차려입어서 전혀 촌사람 같지 않았다. 내가 사건의 자초지종을 물어볼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불기소처분에 대한 항고의 법률적 의미를 나름대로 소상히 일러 준 다음, 돌아가서 내가 알려 준 대로 절차를 밟으라고 타이르며 돌려보내려 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외모와는 달리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더니 검사님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해결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저 사무실의 직원들과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검찰청이란 곳이 이런 곳이냐는 취지로 항변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여자는 내가 주임 검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다시 조사하여 즉시 무슨 조치를 해 주는 것이 검찰의 본분이라고 생각하여 이런 항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더라도 내가 참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정색을 하고 그 여자를 타일렀다. 당신이 취하여야 할 모든 조치를 소상히 일러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관공서에 와서 행패를 부린다면 처벌받게 된다는 취지였다.


이 말이 그 여자를 자극한 듯하다. 눈에 쌍심지를 돋우더니 억울한 백성의 사정을 들어 볼 생각은 않고, 불쌍한 백성을 처벌하겠다고 공갈 협박하는 것이 검사로서 할 일이냐며, 우리나라의 검찰청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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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검 강경지청 근무 당시 송종의 전 법제처장 모습.

 

이 말을 듣고도 적당히 타일러 그 여자를 되돌려 보내야 했다. 그러나 당시 내 나이는 30세에 불과한 열혈 청년이었다. 그 여자를 향해 책상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큰 소리로 모욕적인 언사를 써 가며 욕설을 퍼부어 그 여자를 꾸짖고 직원을 시켜 그 여자를 밖에 대기시킨 후, 즉시 강경경찰서 보안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여자를 즉결심판에 넘기라고 지시했다. 경찰서가 검찰청에서 불과 몇 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경찰서 보안과장이 황급히 달려와 그 여자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시킨 후 즉결심판을 청구하기에 이르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체구가 당당한 건장한 청년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명함을 내밀기에 받아 보니 중앙 모 일간지의 부여지국장 겸 기자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내가 즉결심판에 넘기도록 지시한 그 여자가 자신의 친여동생인데, 나의 지시가 부당하니 이를 취소해서 선처해 달라는 취지였다.


그제야 비로소 이 여인이 검찰청에까지 찾아와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리게 된 그의 배경(?)을 짐작하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여인은 당시 사법부 수장이었던 분과 가까운 친척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나를 찾아왔던 이 기자라는 사람의 태도가 매우 거만하여 선처를 부탁한다는 구실만 앞세웠을 뿐, 내가 부당한 지시를 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은근히 협박하는 말투였다.


나는 그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며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다.


내가 이 검찰청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경찰 간부에게 직접 즉결심판의 청구를 지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스스로 이 지시를 거두어들인다면 앞으로 검찰청에서 검사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다른 사건은 모르겠으나, 이번 지시는 철회할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가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검사실을 나간 다음, 나는 즉시 인접한 법원의 판사실을 찾아갔다. 즉결심판 대상인 이 여자의 오빠가 기자였으므로 이 사건이 흐지부지된다면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담당 판사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그 여자에 대하여는 구류형을 선고해 줄 것을 청탁하였다. 이것이 또 잘못된 것이었다.


법원에서 당일 즉결심판이 열려 이 여자에게 구류 5일의 형이 선고되었다. 구류형을 선고받은 이 여자는 태도가 돌변하여 순한 양처럼 이에 승복하고 강경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면서 가족에게 통보하여 당시 젖먹이였던 아이를 데리고 오게 한 후 그 아이와 함께 5일 동안의 구류형을 살고 귀가했다.


이런 젖먹이가 딸린 사정을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경찰 관계자로부터 그 내용의 보고를 받고 나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일이 잊힐 만한 기간이 흐른 뒤, 대전지방검찰청 본청의 모 부장검사의 호출이 있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이 여자가 석방된 후 수십 통의 진정서가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각 기관에 제출되어 이 모든 진정서가 대전지방검찰청 본청으로 이첩됨으로써 대전지검의 진정사건부에 등재되기에 이르니, 아무리 신분이 검사라 하더라도 담당 부장검사가 나를 불러 조사하지 않고는 이 사건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부장검사님께서 진술서를 써 오라고 지시하였으므로 나는 그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쓴 진술서를 작성하여 대전지검의 부장검사실로 출두했다. 그 진술서를 본 부장검사와의 대화 내용이다.


“그 여자에게 욕설한 내용까지 자세히 적어 놓았군 그래!”


“제가 그 여자를 욕한 것이 사실이니 그대로 썼습니다.”


“쯧쯧, 알겠네. 앞으로 사건관계자를 다룰 때는 조심스럽게 해야 하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에 대한 진정 사건을 맡았던 분은 먼 훗날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직에서 대법관으로 임명된 이명희(李明熙) 씨였다.


이런 일을 당하고 돌아와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또 분하기도 했다. 요즈음은 검사가 사건관계인으로부터 고소당하거나 진정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겠지만, 당시에는 검사를 상대로 고소하거나 진정서를 내는 경우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세상이었다.


검사 생활 3년도 안 돼서 사건 당사자로부터 진정을 당하여 상급 기관의 선배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나를 부끄럽고도 분하게 만든 사정이다.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으면 앞으로 벌어질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정도로 넘어갔으면 좋을 텐데 다시 큰일이 벌어졌다. 

 

부임 이전 불기소한 사건 놓고
중년 부인이 부당하다며 행패

결국 즉결심판 청구…5일 구류
후일 진정 당해 내가 조사받아

‘건설업자 등치는 기자’ 투서에
일주일 밤낮 조사로 5명 구속

수많은 기자의 눈총 멀리하고
국유림에 식목…밤나무 단지로

 

며칠 뒤 검찰청에 가명의 투서 한 개가 접수되었다. 그 피진정인 중 위 여자의 오빠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무 당국자의 말을 들었다. 피진정인들의 인적 사항을 살펴본 직원이 혹시 어떤 일이 또 벌어질지 알 수 없으므로 미리 나에게 와서 그 진정서가 접수된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진정서를 잠시 훑어보니 일종의 투서가 분명했고, 범죄 사실도 막연한 내용으로서 부여 주재 중앙 및 지방지 기자 여러 명이 건설업자와 부여군청 공무원을 괴롭혀 거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부여 부소산 중턱에 큰 땅을 마련하여 양옥집 여러 채를 지었는데, 부여 지방에서 이 집들을 ‘아방궁’으로 부른다는 내용이었다. 진정서를 낸 사람의 이름조차 들어 있지 않았다.


사실 이런 투서 내용을 가지고 수사할 필요는 없다. 범죄 혐의 자체가 구체적인 사실이 아니고 사람들을 모함하면서 비방하는 내용이므로 공람종결(供覽終結)로 끝내면 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청장을 찾아가 이 진정 사건을 내게 배당해 달라고 요청하고, 현지에 나가 정보를 수집해서 수사를 벌일 예정이니 당분간 시급한 구속 사건은 내게 배당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 진정서의 배당을 받은 즉시 부여의 한 여관방을 빌려 수사본부로 삼고, 유능한 경찰관 몇 명을 파견받아 내사에 들어간 후 본격적인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약 일주일에 걸쳐 밤낮없이 이 일에 매달린 결과, 부여 및 논산 주재 기자 거의 전원의 범죄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다. 숫자가 하도 많아서 우선 위의 투서 내용대로 부소산 중턱에 터를 잡아 양옥집을 건축한 중앙지 지국장 5명의 범죄 사실을 집중적으로 밝혀낸 다음, 그들 전원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워낙 밤낮없이 이 일에 매달려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수사에 전념하느라고 구속영장의 범죄 사실 초안을 잡아 구속영장 청구서의 표지에 나의 서명만 해 놓고 도장을 동료 검사에게 맡긴 후 영장 청구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다음, 나는 즉시 집에 가서 잠에 떨어졌다. 나머지 10여 명이 넘는 기자들을 불구속 상태로 조사하다가 불구속 기소 또는 약식명령 청구로 이 사건을 종결하였다.


아무리 조그마한 시골 검찰청이라 하더라도 지방 주재 기자 전원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공갈죄로 입건되어 기소되는 이 사건은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부여는 김종필(金鍾泌) 전 국무총리의 본향이며, 당시 지역구 국회의원은 그의 형인 김종익(金鍾翊) 씨였다.


중앙에까지 번질 수 있는 이 사건의 파장이 어떠했겠는가? 철없는 어린 검사는 사전에 이런 내용을 살피지 않고, 오직 복수심에 불타 수사 착수 전이나 수사 과정에서 상급관청인 대전지검에 이렇다 할 제대로 된 정보 보고 하나 없이 전격적으로 수사하여 20명 가까운 기자들을 모두 입건했다.


그중 5명을 구속하여 기소하였으니 내가 생각해 보아도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사정 때문에 내가 마음고생한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중앙정부 차원에서 지방 주재 기자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의 여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이 자기의 잘못으로 친정 오빠가 구속되고 가정이 파탄되었다고 생각하여 가출한 후 내게 보낸 편지로부터 시작되는 후일담은 이에 못지않은 여러 가지 사연과 이야기로 이어져 가지만, 이를 활자화하기 위해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오직 자허원군(紫虛元君)의 가르침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쓸데없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나와 무관한 일에 덤벼들지 말라는 뜻의 ‘무익지언막망설(無益之言莫妄說) 불간기사막망위(不干己事莫妄爲)’ 이 두 구절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나와 상관없는 일에 뛰어들어 말을 함부로 하면서 사심을 앞세워 수사했던 내 젊은 시절의 잘못을 이 말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 여자나 내가 만약, 권세를 부리면 재앙이 늘 따르니 마음을 가다듬고 허세를 멀리하라는 뜻의 ‘의세화상수(依勢禍相隨)’란 다섯 글자와 모든 재앙은 입으로부터 생긴다는 뜻의 ‘화생어구(禍生於口)’란 네 글자의 뜻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이 소설 같은 사건은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강경지청 부임 초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나의 처신이 어떠해야 했겠는가? 하찮은 잘못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나의 주위에 늘 어슬렁거리는 그 많은 기자가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겠는가? 집과 검찰청 이외에는 거의 다른 곳을 마음 놓고 드나들기 어려웠다.


이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오직 나무 심을 궁리만 하면서 틈만 나면 조림 적지를 찾아 산판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국유림을 찾아 헤맸다. 그 결과 민둥산이 되어 버린 황폐한 국유림 중에서 그래도 밤나무를 심어도 될 만한 임야를 찾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밤나무의 품종과 생태적 특성에 관한 수십 종의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숙지하면서 밤나무 심을 준비를 진행하였다. 나의 사비를 출연하여 맹지(盲地)인 국유림에 이르는 2㎞의 농로를 새마을사업과 같은 형태로 넓히면서 도로를 닦았다.


수십 필지의 사유지를 거쳐야 비로소 길을 낼 수 있었던 국유림이었기에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 설득한 후 막걸리 파티를 벌이며 마을 회의를 열어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도저히 설득할 수 없는 몇 사람에게는 박봉을 쪼개 보태 주면서 그 어려운 도로 공사를 끝냈다.


이 도로 공사를 끝내고 나서 주말에 그 도로에 가 보았더니 내가 첫 번째 통행자가 아니라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그 길을 이용하여 각종 영농자재를 운반하고 있었다.


1973년 4월 6일 서울지검 성동지청의 검사발령을 받기 이틀 전인 4월 4일부터 3필지의 국유림에 밤나무 10,000여 주와 리기다소나무 및 낙엽송 등 용재림 수만 주가 식재되기 시작하여 인근 마을 사람 수백 명이 동원된 이틀간의 식목 행사가 있었다.


몇 달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그 긴 봄 가뭄 속에서 시행된 이 행사를 축복해 주려는 뜻에서였던지, 이 식목 행사가 끝난 직후 하늘은 많은 비를 내려 주어 타들어 가는 대지를 적시면서 새로 심은 어린 밤나무의 뿌리를 적셔 주었다. 한 젊은이의 집념 어린 뜻을 갸륵히 여긴 하늘의 크나큰 선물이었다.


이 식목 행사를 끝내고 밤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린 송 검사는 그다음 날 아침 서울지방검찰청 성동지청의 검사가 되었다. 이날부터 1998년 내가 살 집인 천고재(天古齋)를 논산의 양촌에 짓고 정착하기까지 25년간 객지인 논산을 수시로 왕래하여야 하는 기나긴 인생 행보가 시작된 것이기도 했다.


나의 강경지청 검사 재직 시의 지청장은 위석(位石) 윤영학(尹榮學) 씨였다. 훤칠한 키에 인자하셨던 충남 청양군 출신의 훌륭한 선배님께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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