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검찰청사는 부산의 구도심지인 부민동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2층 구조의 웅장한 건물이었다. 정부 수립 후 경남도청의 청사로 사용되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해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는 바람에 한동안 정부종합청사였던 건물이다.
1986년 당시에는 부산지방법원 및 검찰청으로 쓰였던 옛 경남도청 건물 <사진제공=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나와 같은 날짜로 같은 청의 차장검사로 부임한 사람은 13년 전에 서울지방검찰청 성동지청에서 평검사로 함께 근무하였던 문종수(文鐘洙) 검사였다. 문 검사에 대해 내가 평소 미안하게 생각했던 사정은 이미 설명했다. 우리 두 사람이 대학 동기생이었기는 하나, 그는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으며, 나는 그 6개월 뒤에 시행된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휴학했다가 복학해 대학 재학 중이어서 대학 졸업 후에 임관되기 위해 사법시험 제2회 합격자들과 함께 사법대학원을 수료했으므로 검사 임관도 그는 나보다 1년 이상 빨랐다.
제1차장은 총무부, 공안부, 특별수사부 3개 부와 사무국을, 제2차장은 형사 제1~제4부와 공판부를 관장하는 자리였다. 소속 검사의 수만 하더라도 1차장 산하 3개 부의 검사는 몇 명 되지 않았으나, 2차장 휘하 5개 부에 소속된 검사의 수는 1차장 소속 검사 수의 2배 가까운 숫자였다. 경찰 등 1차 수사기관에서 송치되는 거의 모든 사건이 2차장 소속 형사부에 배당되고 있었으므로 따지고 보면 2차장은 1차장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돼 있었다. 초대부터 제21대까지의 차장검사는 1명이었으나, 제22대부터 제28대까지 양 차장 체제로 운영됐다.
1차장은 십수 년 동안 항상 2차장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온 사람이었고, 2차장은 같은 기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1차장 덕분에 생명을 연장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고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형이라, 동생이라 할 것 없이 정말 친형제 이상의 우의를 돈독히 하며 근무했음은 불문가지이다.
두 사람이 현격히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주말에 틈만 나면 명산을 누비며 그곳 명당에 자리 잡은 고찰의 대웅전을 기웃거리는 사람이었던 반면, 그는 감리교 교회를 찾아가 예배와 찬송을 하면서 주일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활동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곳저곳 다니면서 그를 유혹하려 했으나, 그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 이외에는 전혀 눈을 돌리려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장검사 한 사람이 상경하는 때에는 나머지 한 사람은 관내에 있어야 했으므로 오히려 내가 부산에 남아있는 것을 고맙게 여겨 상경하는 처지였다. 그에게 진 빚도 갚을 겸 나는 주말에 상경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그를 상경하도록 배려했다. 혹시 내가 상경했다 돌아와 휴일을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는 족족, 그는 교회에 나가 애들과 잘 지냈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이 바람에 나는 관내의 명산을 찾으며 경승을 즐겼다.
1차장은 2차장에게 항상 죄지은 마음 2차장은 1차장을 ‘생명의 은인’으로 관사 입주는 2차장부터 1차장은 뒤에 출퇴근 차 운전은 1차장이 전속 기사로 지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만당’
두 차장검사가 모신 검사장은 박희태 씨 아래 사람 전적 신임하며 조직 이끌어 “송종의·문종수가 본 건 볼 필요 없다” 부속실에 쌓인 서류 모두 결재 지시 현장 목격 이후 직무수행에 더욱 만전
당시의 부산지방검찰청은 부산과 경상남도 전 지역을 관할하던 지방검찰청으로서 산하에 울산, 마산, 진주, 통영, 밀양, 거창 등 6개 지청이 있었다. 오늘날 울산과 마산지청이 울산지방검찰청과 창원지방검찰청으로 승격되고, 부산에 동부지청이 신설됨으로써 마산, 진주, 통영, 밀양, 거창 등 5개 지청이 창원지검 소속으로 변경됐으니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당시의 부산지검에는 차장검사의 관사가 없었다. 부임하는 그해에 관사를 구입할 예산이 책정돼 내려왔으나 이곳저곳을 알아보니 그 예산으로는 두 개의 관사를 구입하기에는 부족한 예산이었다. 검찰청이 옛날의 구도심 지역에 있었으나 부산이 북동부지역으로 확장되면서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검찰의 신청사도 그 지역으로 이전이 추진되고 있었다. 따라서 관사를 마련하더라도 신청사와 멀지 않은 곳이어야 했으므로 경관이 좋은 해안가인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 부근에 마련하기로 작정했다.
광안리 해수욕장 부근 남천동의 매립지를 중심으로 삼익건설에서 비치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해 그 부근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 아파트 단지의 적당한 아파트 1채가 매물로 나왔다. 새로 지은 아파트로서 위치와 구조가 좋아서 우선 그 아파트 1채 만이라도 사서 검찰청과 집 밖에 다닐 줄 모르는 문종수 차장을 입주시키기로 작정했다. 1차장과 2차장의 아파트 규모가 달라서는 안 될 일이므로 나중에 법무부에 요청해 추가로 예산지원을 받을 작정으로 상부에 보고한 후 그 아파트 1채를 매입하고 즉시 2차장을 입주시켰다. 스스로 형이라고 자부하던 사람을 형 대접해 주는 최초의 배려였다. 관사인 아파트 구입의 예산 집행은 1차장의 소관 사무였다.
문 차장이 남천동 삼익아파트에 입주한 다음, 법무부에 사정을 설명하고 추가예산 지원을 약속받기에 이르렀다. 그 몇 개월 뒤 위 아파트와 같은 규모의 관사를 구입할 예산이 지원됐으므로 이제는 내가 들어갈 아파트를 물색하기 시작해 드디어 1차장의 관사용 아파트 1채를 추가로 계약했다. 이때 새로 마련한 아파트는 위치가 2차장 관사보다 더 좋아서 아파트 뒤편으로 광안리 해수욕장의 전경이 들어오는 경관 좋은 집이었다. 그 아파트 단지 308동의 고층이었다. 두 차장검사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게 됐으므로 출퇴근을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서울지검 평검사 시절부터 자가 운전을 시작해 그때까지 자동차를 3번씩이나 바꾸며 누적 주행거리 50만km 이상을 운전하며 다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 차장은 운전면허는 있으나(이것은 본인 주장이므로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자동차 운전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내가 운전사로서 그를 모시고 다음처럼 농담하며 출퇴근을 했다.
"너. 대통령 전용차량 운전기사의 직급을 알고 있니?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그 차량의 운전사는 서기관급에 불과했다. 검사 중에서도 최고위 고등검찰관인 차장검사를 전속 운전사로 둔 너, 문종수의 벼슬은 도대체 무슨 이름의 벼슬이냐?"
"너는 복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을 차량 조수로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아라. 네가 상습적으로 난폭운전을 하기에 너의 목숨을 이어주려고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하면서 조수석에 앉아 너를 모시고 다니는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모른다는 말이냐?"
하여튼 1년 가까이 함께 다니며 친형제 이상 가는 우의를 지키면서 차장검사의 직을 마쳤다. 부산지검에 1,2차장 제도가 시행된 기간 중 두 차장검사가 이렇게 지낸 사례는 없었다고 자부한다. 따라서 검찰청 전체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화기만당’이었던 것이다. 부산시절 내가 운전한 자가용은 현대자동차의 코티나 마크Ⅳ였다.
두 차장검사가 함께 모신 검사장은 박희태(朴熺太) 씨였다. 우리가 부임하기 얼마 전에 김성기(金聖基) 장관이 시행한 검사장급 인사 이동으로 대전지검장으로부터 부산지검장으로 발령돼 이미 그 직위에 있었다. 우리와 함께 부산지검장직을 떠나 신설된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을 끝으로 정계에 입문해 먼 훗날 국회의장직까지 역임했다. 수많은 인재가 배출됐던 고시 13회 선두 그룹의 한 사람이었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 재치 있는 말과 적절한 유머를 곁들인 화법으로 많은 사람을 웃기는 등 소탈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 분은 1983년 자신이 양조기법을 개발해 전국으로 확산시켰다고 자부하는 폭탄주의 대가이기도 했다. 성품이 원만해 부하들을 괴롭히는 일이 전혀 없었음은 물론, 오히려 부하들을 전적으로 신임하면서 청을 이끌어가고 있었으므로 검찰청은 늘 화기가 충만한 직장 분위기였다.
어느 날 퇴근에 앞서 두 차장이 검사장께 퇴근 전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가서 내가 직접 본 일이다. 부산에 검사장의 고향인 남해 출신 저명인사들이 많아 늘 바쁘게 지내며 각종 지역행사에 참가하는 일이 잦아서 거의 퇴근 무렵에 사무실에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 그날도 그런 사정이었던지 검사장 부속실에 검사장의 결재를 바라는 수많은 사건기록과 결재서류가 쌓여 있었다. 우리 두 차장이 검사장실로 들어오는 것을 본 검사장이 부속실의 비서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야! 거기 있는 모든 결재서류에 내 도장을 다 찍어 내려 보내라. 송종의와 문종수가 다 본 건데, 내가 또 볼 필요 없다." 검사장으로서 의도적으로 한 말인지 여부는 내가 판단할 수가 없으나, 저녁 무렵 검사장실에 쌓여 있던 수많은 결재서류와 사건기록이 한꺼번에 결재돼 내려가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한 바 있다. 검사장의 결재방법이 이러했으므로 우리 두 차장은 다음과 같이 상의했다.
검사장이 진실로 우리를 신임해 저러는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검사장의 결재가 저렇게 이루어지니 차장검사인 우리가 철저히 살펴보고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정말 큰 일 나겠다. 둘이 합심해 철저히 보필해야 청이 제대로 돌아갈 것 같으니 서로 명심하여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자.
하여튼 검사장이 일일이 지시하거나 감독할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 두 사람이 철저히 사무를 처리한 것은 이런 사정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박희태 검사장님께 경의를 표한다. <정리=박솔잎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