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러 가면서 내심 경계한 게 있었는데, 소위 성공한 이의 말을 그대로 받아적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그건 비록 매체를 빌어 글을 쓰는 처지에서도 명확히 가져야만 할 윤리적 태도였다. 함윤식 ㈜우아한형제들 부사장(52세·사법연수원 27기)은 내 입장에선 충분히 그런 경계를 품을 만한 커리어를 가진 이였다. 서울법대를 나와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연수원을 나온 후 판사로 임용되고 서울고법 판사를 거쳐 로펌의 대명사인 김앤장에 갔다가 잘나가는 스타트업 기업의 경영자로 스카우트된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 커리어는 충분히 범인들을 기죽게 할 만한 것이다. 여기에 스타트업 기업에 대한 내 편견까지 더해졌을 테니 더 말해 뭣하랴. 그런데 그를 만나고 나서 내가 품은 경계심이 불필요했던 거라는 걸 깨닫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 약 력 ]
함윤식(52·사법연수원 27기) 우아한형제들 부사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5년 제3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해 서울지법 동부지원 판사, 법원행정처 민사심의관, 사법연수원 교수, 울산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판사를 지냈다. 2016년 변호사로 개업해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활동했다. 2020년 법무법인 KHL 변호사로 일하다 같은 해부터 우아한형제들 고객중심경영부문장 겸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인터뷰 장소인 ㈜우아한형제들 방이동 사옥의 안내데스크까지 내려와서는 차와 음료를 뽑을 수 있는 라운지까지 몸소 안내하고 거기서 직접 주문 결제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낮고 차분한 말씨와 매너 역시 배타적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전북 김제가 세거지라고 했다. 아버지 형제는 모두 세 분인데 큰아버지는 이념에 의해 벌어진, 사실상의 내전인 6·25 당시 경찰이었다가 북에 의해 희생되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친부는 고향에서 서울로 이주해 생존을 위해 가릴 것 없이 일하다가 건축업으로 성공해 식솔을 건사했다. 그리고 그 밑의 작은아버지는 신학대를 나와서 빈촌에서 걸식하는 이들과 지내다가 매우 은유적인 질병인 폐병을 옮아 삶을 마쳤다. 바로 위 형으로부터 번번이 돈을 얻어다가 빈민들을 돕는 성자와 진배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그러니까 1965년경에 서울 월계동에 올라왔고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일하시다가 우연한 기회에 집을 하나 지어서 팔았는데 제법 이윤이 나서 그때부터 작은 건축업을 하셨어요. 연립주택 같은 걸 주로 지으셨고 마지막에는 아파트 한 동을 지으셨어요. 그러고선 IMF를 맞으셨죠. 말년에 몸이 편찮으셔서 몇 년 앓으시다가 2019년에 돌아가셨어요.”
이념투쟁 속에 삶을 마친 큰아버지, 상경해서 갖은 노력 끝에 세속적 성공을 거두고 식솔에게 생존의 터전을 남긴 아버지, 이상적인 삶을 좇다가 신화적인 삶을 마친 작은 아버지. 자신의 바로 윗대의 삶에서 전형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한국 현대사를 축약한 상처를 보았던 그에게 새겨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 생각에는 그것은 삶에 대한 깊은 외경과 냉엄한 현실에 대한 자각, 그리고 희생에 대한 성찰이었을 것이다.
“대학교 들어가면 ‘현타’가 오는데, 우리 집의 가계사, 이념에 희생당한 분,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분, 이상주의적인 삶을 추구하다가 일찍 돌아가신 분, 이런 것이 안겨준 무게감 때문에 저도 3학년 때까지는 공부보다는 학생운동을 좀 했어요. 앞에서 나서서 한 스타일은 아니었고 따라다니는 정도였어요. 휩쓸리지 못했달까요. 매사 좀 우유부단하고 회의적이었는데, 만화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대학 생활에 그나마 흥미를 느끼게 됐어요.”
그의 개인사를 듣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그가 좀 음울하게도 보였는데, 다행히 그의 집무실은 16층 빛이 아주 잘 들어오는 환한 방이었다. 창밖에는 푸른 공원이 보였다. 두 평 남짓한 이 방을 회사로부터 배정받은 지는 석 달 정도밖에 안 됐다고 했다.
“우리 회사는 대표님만 방이 있었어요. 그것도 그나마 얼마 안 됐다고 해요. 부사장이든 누구든 직급을 막론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책상 하나씩 받아서 같은 조건에서 일했어요. 그리고 호칭도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는 걸로 통일했어요. 그래서 직원들이 저를 윤식님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저도 의장님을 봉진님이라고 부르고 있고요.”
조금 이르게 그에게 질나쁜, 어쩌면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하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서울고법 판사에서 대형로펌 변호사로, 변호사에서 각광받는 스타트업 회사의 CEO로 변신을 했는데, 그의 이런 행보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존경받는 직에서 세속의 자리로 내려오는 과정이다. ‘세속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 그는 어떻게 이런 결정들을 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어떤 욕망이 개입되어 있을까.
“법원에서 나올 때 주변의 많은 분들이 의아해했어요. 그런데 변호사를 하다가 다시 기업으로 간다고 하니까 그때도 의아해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사실은 호기심이 많은 편이에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속이 어디든 내가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그리고 사회에 도움이 될까 하는 거였어요. 사실 법조인은 우리 사회 각 분야에 가치를 재분배하는 것이 일이고 기업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일이잖아요. 기업에 들어가서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데 힘을 보태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법조인은 또 원래 좀 회고적인 성향이 있는데, 기업은 미래지향적이잖아요. 새로운 감각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도 필요하고요. 그래서 고민이 많긴 했는데, 여기 김봉진 의장님이나 김범준 대표님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가치도 이해하는 분들이더라고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하는 분들이었고요. 그것에 교감하게 되어 합류를 결심했죠.”
함윤식 부사장은 이제 2년 남짓 기업의 경영자로 살고 있다. 그가 이곳에서 맡고 있는 정확한 역할은 고객중심경영의 최고책임자로서 식당 사장, 라이더, 고객 가운데에서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갈등을 해소하면서 회사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역할에 대한 확고한 자각만으론 이처럼 막중한 미션을 수행하기는 어려울 터. 그는 대체 어떤 마법의 ‘비단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직원들이 저를 윤식님이라고 부르고
저도 의장님을 봉진님이라고 부른다
법조인은 가치를 재분배하는 것이고
기업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