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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곤 회고록] 제6화 : ICTY의 출범 전후
권오곤 전 재판관
2023-02-09 07:35
국제 평화·안전 회복을 위해 UN 안보리가 설립한 IC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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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화 : ICTY의 출범 전후

 

ICTY의 창설
1990년대에 들어 구 유고슬라비아(Former Yugoslavia, 이하 ‘구 유고’), 정확하게는 여섯 개의 공화국들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 SFRY, [지도 참조])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1991년에 짧게 끝난 슬로베니아 전쟁에 이어 크로아티아 전쟁이 일어났고, 1992년에는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 집단 수용소에서의 잔학행위, 대량 학살 등의 만행이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알려지자, 국제사회에는 이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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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된 구 유고 연방(SFRY)


결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는 1993년 5월 25일 결의 827호로, 구 유고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국제 평화와 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 아래, 유엔헌장 제7장의 권한에 근거하여, 전쟁을 억지하고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위와 같은 만행에 책임이 있는 개인들을 형사처벌하기 위한 임시(ad hoc) 국제형사재판소인 ICTY를 설립하였다. 만장일치의 결의였다.

ICTY는 유엔헌장 제7장의 권한에 근거하여 설립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유엔 회원국은 이에 협조할 의무가 있고, ICTY 규정(Statute) 제9조에 따라 ICTY는 국가의 사법기관에 대하여 우선권(primacy)이 있다. 따라서, ICTY는 한 나라의 사법기관에 대하여, 절차가 어떤 단계에 있든지 불문하고, 사건을 ICTY에 이양할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이 점은 다자조약에 의거하여 생긴 ICC가 ‘보충성의 원칙(principle of complementarity)’에 따라 국내 사법기관이 소추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가 없는(unable or unwilling)’ 경우에 한해서만 관할권을 발동할 수 있는 것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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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재판의 피고인들

 

 

뉘른베르크 이후의 최초의 국제형사재판소
ICTY는 2차세계대전 후에 있었던 뉘른베르크 재판소 및 도쿄 재판소 이후의 첫 국제형사재판소였다. 후자의 재판소들은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강제한 것으로, 그 재판은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였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ICTY는 이와 달리 세계 평화와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제3자인 유엔의 안보리가 설립한 것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전범의 처리와 관련하여,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처음에는 모겐소(Henry Morgenthau Jr.) 재무장관의 의견에 따라 나치의 거물급 전범들은 즉결처분(summary execution)하고, 나머지는 노역에 처하는 방안을 선호했다. 국제형사재판을 열게 되면 나치들에게 선전 기회만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복수(復讐)에 의한 응보보다는 문명사회의 정의 관념에 따라, 공정한 재판에 의한 형사 처벌을 하고 이를 후세의 교훈으로 삼자는 데 합의하여 뉘른베르크 재판소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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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사건들을 심판하지만, 나중에는 그 사건들이 법원을 심판한다”는 취지의 말을 남긴 Robert Jackson. 그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으로 근무 중 Harry Truman 대통령의 임명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소 수석 검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감안할 때, 나는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으로 근무하던 중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의 임명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소의 수석 검사로 근무했던 잭슨(Robert Jackson) 대법관이 모두(冒頭) 진술(opening statement)에서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특히 좋아했고, ICTY에서 재판하는 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다.

“우리가 이들 피고인들을 심판하는 기록이 후세에 역사가 우리를 심판할 기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 피고인들에게 독이 든 성배(聖杯)를 넘기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입술에도 그것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We must never forget that the record on which we judge these defendants is the record on which history will judge us tomorrow. To pass these defendants a poisoned chalice is to put it to our own lips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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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인들

 


국제정치의 현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전쟁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행은 각종 미디어를 통하여 온 세계에 생생하게 전해졌고, 국제사회가 무력 개입을 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은 1990년대 초의 걸프전쟁(Gulf War) 이후 무력 사용에 소극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보리가 ICTY를 창설한 것은, 국제사회가 사실상 무력개입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구 유고 사태를 방기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취해진 극적인 제스처에 불과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ICTY가 창설된 후, 처음으로 선출된 11명의 재판관들이 1993년 11월에 ICJ가 있는 평화궁에서 취임선서를 하였을 때, ICTY에는 사건이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는 소추관(Prosecutor)도 없었다. 1993년 10월에 임명되어 1994년 2월에 취임 예정이었던 베네수엘라 출신의 소추관이 취임 전에 사임하는 바람에, 실제의 초대 소추관인 골드스톤(Richard J. Goldstone,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재판관들이 취임한 지 아홉 달이 지난 1994년 8월에야 취임했다. 재판관들의 취임 당시 재판부(Chambers)에 제공된 것은 평화궁 내에 있는 사무실 몇 개, 연구관 한 명, 그리고 비서 한 명뿐이었다. 아마 유엔 당국자들은 취임선서를 마친 재판관들이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 있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헌트 재판관(David Hunt, 호주)의 코멘트를 빌리자면, 이는 ICTY의 초대 재판소장이 된 카세세 재판관(Antonio Cassese, 이태리)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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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안보리는 1993년 5월 25일 만장일치에 의한 결의 제827호로 ICTY를 창설했다.


 

 

카세세 재판소장과 초기의 재판관들
카세세 재판소장은 동료 재판관들과 함께,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에서 제안한 초안을 기초로, ICTY 소송규칙(Rules of Procedure and Evidence)을 만들어 내는 등 ICTY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그러는 한편 예산과 인력을 확보하면서, AEGON이라는 이름의 보험회사의 건물을 재판소 건물로 확보하기도 했다.[1] 그리고 이들 초기 재판관들은 ICTY의 첫 사건인 타디치 사건을 계기로 국제형사재판과 국제인도법에 관한 판례들을 생성해 내기 시작한다.


[각주1] 이 건물은 ICTY가 2017년에 문을 닫을 때까지 사용했고, 아직도 유엔 잔여업무 처리기구(UN International Residual Mechanism for International Tribunals, IRMCT)가 사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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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Antonio Cassese 초대 재판소장(1993-1997, 이태리)과 Gabrielle Kirk McDonald 제2대 재판소장 (1997-1999, 미국). 타디치 사건에서 McDonald 재판관은 1심 재판장이었고, Cassese 재판관은 항소심 재판장이었다.


첫 사건 타디치 사건
타디치(Duško Tadić)라고 하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이 1994년 2월 독일에서 구속되어 오마르스카(Omarska) 캠프에서의 살인, 고문 등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었다. 오마르스카 캠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이 보스니아 북부의 프리예도르(Prijedor) 지역을 장악하고 무슬림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무슬림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설치한 집단수용소들 중의 하나였다. 이를 알게 된 골드스톤 ICTY 소추관은 1994년 10월 12일 재판부에 ICTY 관할권의 우선권에 근거하여 독일 정부가 타디치 사건을 ICTY에 이양하도록 명해 줄 것을 신청했다. 1심 재판부는 1994년 11월 8일 심문기일을 열어서, 독일 정부, 타디치의 변호인 등 관계자의 의견을 들은 다음, 같은 날 독일 정부에 대하여 타디치 사건을 이양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이후, ICTY 소추관은 1995년 2월 타디치를 기소했고, 독일은 입법으로 국내 사건을 ICTY에 이양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다음, 1995년 4월 24일에 타디치를 ICTY에 인도했다. 이로써 ICTY의 역사적인 첫 사건이 시작되었다.

타디치의 변호인들은 준비절차 과정에서 ICTY의 재판권을 다투는 본안전 항변(preliminary motions)을 제기했는데, (1) 안보리가 ICTY를 설립할 근거가 없고, (2) ICTY의 우선권은 국가 주권의 원칙에 반하며, (3) 구 유고에서 벌어진 사태는 내전(internal armed conflict)인데, ICTY 규정 제2조(제네바 조약의 중대한 위반), 제3조(전쟁에 관한 법 또는 관습법 위반) 및 제5조(인도에 반한 죄)는 국제전(international armed conflict)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ICTY는 사안을 다룰 권한(사물관할)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1995년 8월 10일자 1심 결정, 그리고 1995년 10월 2일자 항소심 결정으로, 위의 본안전 항변은 모두 기각되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다양한 반대의견, 보충의견이 있었다. 이는 ICTY의 재판권을 확립한 획기적 결정이었다.

1심 재판은 1996년 5월 7일에 시작되었고, 1심 판결은 1년 후인 1997년 5월 7일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양형은 유, 무죄 판결과 별도로 정했는데, 양형 판결은 1997년 7월 14일에 있었다. 항소심 판결은 2년 여 후인 1999년 7월 15일에 있었다. 항소심 판결에 따른 1심의 재차 양형 판결은 1999년 11월 11일에 있었고, 이에 대한 2000년 1월 26일자 항소심 판결을 마지막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타디치는 최종적으로 20년 형을 받았다. (ICTY의 모든 판결, 결정, 명령, 속기록 등은 그 웹사이트 icty.org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타디치 재판의 전 과정에서 모든 쟁점은, 절차적인 것이든 실체적인 것이든, 새로운 이슈를 담고 있는 것들이었다. 뉘른베르크 이후의 첫 국제형사재판이기 때문에 선례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따라서 이들 초기의 재판관들은 위의 본안전 항변부터 시작하여, 제네바조약의 중대한 위반, 전쟁에 관한 법 또는 관습의 위반, 인도에 반한 죄 등 각 구성요건의 해석, ‘Joint Criminal Enterprise’라고 하는 공범 이론의 확립, 증거 개시(disclosure), 증인 보호 등등, 실체법과 절차법에 걸친 수많은 쟁점에 관해서 결정을 내려 가면서, 엄청난 양의 판례를 만들어 냈다. 국제재판소가 조무래기(small fish)들의 재판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예산을 썼다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달리 거물(big fish)들을 데려올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국제형사재판을 부활시킨 공로는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오곤 전 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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