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든 무거운 일탈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형벌로 다스린다.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이 수시로 자행되었다. 사람들은 고문이 그래도 가장 덜 나쁘다고 말했지만, 몽테뉴는 참으로 비인간적이고 무익하다고 생각했다.
고문은 위험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진실의 시험이라기보다 참을성 시험인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불확실하고 위험천만한 방법이다. 그처럼 극심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 무슨 짓인들 못 할까? 그래서 판사로서는 죄 없이 죽게 하지 않겠다며 고문한 그 사람이 고문당해 죄 없이 죽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짓 자백으로 자기를 고발했다.고문을 견뎌 낼만한 범죄인은 진실을 감추고, 허약하고 소심한 사람은 허위로 자백할 것이다. 누구나 위험에 처하면 현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모순된 진술을 할 수 있다. 고문에 못 이겨 불리한 진술을 하는 사람이면 무고한 타인도 끌어들일 수 있다. 고문을 저지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단순한 죽음 이상의 것은 모두 내가 보기엔 잔인성이다. 우리의 사법제도는 목이 잘리거나 매달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지을 자가 뭉근한 불, 집게, 바퀴에 대한 상상 때문에 제지되리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게다가 오히려 그들을 자포자기에 던져 넣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몽테뉴에 따르면 사람의 잔인함이 권력을 통해서 외부로 드러나 또 다른 잔인함을 유발하고,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고문이 시행된다. 고문이 일상화되면 형벌도 더욱 가혹해진다.
나는 내전으로 인해 고삐가 풀린 이 악덕(잔혹성)의 믿기 어려운 예들이 넘쳐나는 시절을 살고 있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한 인간의 애처로운 신음과 비명, 가련하게 꿈틀대는 몸부림을 재미나게 구경하자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전에 없던 고문과 새로운 살인법을 만들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는 괴물 같은 마음씨들이 있다는 게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믿어지지 않았다.잔인함과 악행에 대한 복수심에 바탕을 둔 엄벌주의에 대해 몽테뉴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목숨을 끊는 행위를 넘는 처벌은 과도하고, 이런 사형도 가급적 피해야 한다고 보았다.
법 집행에서조차 단순한 사형 이상의 것은 모두 순전히 잔인한 행위라고 본다.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충격을 주고 절망시킨 다음 죽게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범죄자를 판결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차라리 사법 정의가 소홀히 되는 쪽을 택했다. 일반적으로 판결은 악행에 대한 혐오 때문에 복수심으로 끓어오른다. 그런데 나의 복수심은 그 때문에 차갑게 식는다. 최초의 살인에 대한 혐오는 두 번째 살인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사법 정의가 소홀히 되는 쪽을 택했다는 말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동해 보복형)’가 아니라 온화하게 처벌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살인이라는 말은 사형 제도를 또 다른 살인행위로 보았다는 것이 아닐까. 사형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살인에 의해 피살된 사람보다 법관에 의해 사형된 사람의 수가 많다고까지 할 수 있다. 18세기에 고문과 공개 처형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범죄인은 행위에 비례해서 처벌받아야 한다. 잔인한 고문과 신체형을 완화하고, 공개 처형을 금지하며, 범죄인을 감옥에 가두는 자유형이 시행되어야 한다 등등.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고문과 가혹한 형벌은 줄어들었고, 범죄인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는 자유형이 주된 형벌로 자리 잡았다.
현대 사회에서 잔인함은 공개적으로는 많이 표출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론은 흉악범죄를 엄하게 처벌하라는 쪽인데, 그 마음속엔 범죄자에 대한 혐오가 깔려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끔찍한 살인자나 아동 성범죄자를 ‘인간쓰레기’ 또는 ‘짐승’처럼 여긴다. 흉악범죄가 일어나면 자신의 인간적 약함을 숨기려고 범죄자의 비정상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관건은 내 마음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다. 몽테뉴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잔인성에 대한 혐오는 너그러움의 어떤 모범도 그리 이끌지 못할 정도로 나를 너그러움 쪽으로 훌쩍 나아가게 해 준다.
박형남 부장판사(서울고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