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15~2021년 대법관을 역임한 뒤 법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 중인 이기택 서강대 로스쿨 석좌교수가 민사소송법 교과서 관련 글을 보내왔습니다. 앞으로 약 한 달에 한 번 약 6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랜 기간 재판실무에 종사하다가 로스쿨에서 민사소송에 관한 실무를 강의하게 되면서 새롭게 민사소송법 교과서를 보게 되었다. 의외로 필자의 평소 생각과 다른 부분이 적지 않아서 몇 차례로 나누어 필자의 생각을 밝혀본다. 모든 교과서는 아니라도 여러 교과서에서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면 이 부분도 대상으로 한다. 교과서의 설명이 부적절하거나 불명확하여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힘들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관한 것이고, 대립되는 학설에 관한 것은 아니다. 아울러 실무계에서도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민사절차법 분야에 관한 좋은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1. 교과서의 설명많은 교과서에서 판결 외의 소송종료사유로서 화해와 함께 나란히 조정을 들고 있다. 더 적극적으로 조정을 ‘화해간주’라고 하면서 양자의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2. 민사소송사건의 단위하나의 소송사건에서 여러 절차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처분권능의 행사를 포함한 여러 소송행위를 하거나 수소법원이 여러 형태의 재판을 한다. 가압류, 가처분은 별개의 사건이지만 소송이송, 법관기피, 소송승계, 소송비용담보제공, 강제집행정지, 소송계속 중의 소송구조 등은 모두 특정 소송사건의 소송계속을 전제로 한 것으로서 그 소송사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의 소송사건 단위로 포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만큼 이는 모두 수소법원의 직무에 속한다. 소송계속 중에 이루어지는 소송상 화해, 청구의 포기·인낙, 소취하, 화해권고결정 등도 하나의 소송사건 단위에 속한다. 이는 모두 소송사건 안에서 발생하므로 그 자체가 바로 그 소송의 종료사유가 된다. 민사소송법전에서 소송사건의 심리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절차는 그 소송사건의 단위에 속한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관련 문제로서, 가집행선고가 붙은 판결 후에 소송기록을 상소법원에 송부하기 전에 신청된 강제집행정지사건을 따로 떼어내어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하게 하는 실무는 타당하지 않다. 하나의 본안소송 단위에 속하는 절차이므로 이러한 실무는 마치 며칠 동안 본안재판부 자체를 변경하는 것과 같다. 또한 본안사건의 소송계속 소멸 후에 누락되었던 본안 부수 신청사건에 관하여 따로 재판을 하는 것도 문제이다.
한편 사건 단위의 문제와 관련하여, 소송기록의 개념과 범위의 명확성, 즉 어느 문서가 소송기록의 일부가 되는지 아니면 소속기관에 대한 민원서류가 되는지에 관하여 실무상 분명하게 정리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표시한 적이 있다. 소송기록은 판사가 보아야 하고, 판사가 본 것은 결론에 영향을 미친다.
3. 조정과 소송의 관계민사조정은 민사조정법에 의하여 마련된 독립의 분쟁해결제도로서, 민사조정법은 민사소송법의 일부 규정을 준용하는 외에는(민조 38조) 다른 규정이 없는 한 그 성질에 반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비송사건절차법 제1편의 규정을 준용하고 있다(민조 39조). 민사소송과 민사조정은 어느 하나로 포괄할 수 없는 별개의 분쟁해결절차이다.
조정사건과 소송사건의 흐름을 보면, 조정사건에서 소송사건으로 이행하는 경우(a), 소송사건이 조정으로 회부되는 경우(b) 그리고 동일한 분쟁에 관하여 조정신청과 소제기가 병행하는 등으로 조정사건과 소송사건이 병존하는 경우(c)가 있다.
먼저 a의 경우에는 조정사건은 종결되고 새로운 소송계속이 발생하게 된다. 그 이후에는 처음부터 소제기가 있었던 사건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관계는 지급명령이나 제소전화해로부터 소송으로 이행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c의 경우는 중복소송도 아니므로 각각 별개의 사건으로 진행된다. 다만 이 경우에는 조정으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수소법원은 조정이 종료될 때까지 소송절차를 중지할 수 있다(민조규 4조 1항). 먼저 조정이 성립되거나 조정갈음결정이 확정된 경우에는 소송사건은 소취하가 없다면 그 기판력에 구속될 뿐이고 그대로 진행될 것이다. 소송의 종료와 관련하여 특별히 논의할 것은 없다.
b의 경우에 관하여는 다음 항에서 살펴본다.
4. 조정에 회부된 소송사건의 운명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민사소송법과 민사조정법에 따르면 조정절차는 하나의 소송사건 단위에 포괄되지 아니하며, 양자는 이를 규율하는 법체계도 다른 별개의 사건이다. 위에서 본 a, c의 경우의 처리는 이러한 일반론에 따른 결과이다. 민사조정법의 문언상으로도 달리 볼 여지가 없을 것이다.
소송사건이 조정에 회부된다고 하여 이와 달리 취급할 이유도 없다. c의 경우와 달리 소장 하나만 제출된 사건에서 수소법원의 조정회부결정에 의하여 소송사건과 그 외부의 사건이라고 하는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되어 병존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수소법원이 담당하고 있는 소송사건을 재량으로 조정에 회부한다고 하여 소송사건이 소멸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것은 실무상 생각하기 어렵다. 조정회부만으로 그 소송사건이 그 재판부의, 그 소속법원의, 사법부의 소송사건 미제에서 제외되고 이후 소송으로 복귀하는 때에 새롭게 소송계속이 발생한다고 하게 되면 법원의 현실적인 사건현황, 재판부의 업무부담과 그 귀속, 사실상의 사건관리 등에 있어서 감당하기 어려운 왜곡이 발생할 우려가 적지 않다.
실무에서는 조정회부시 소송계속은 유지한 채로 별도의 조정사건번호를 병기하는 방법으로 조정사건이 추가되는 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조정절차가 종료될 때까지 소송절차는 중지되도록 하고 있다(같은 조 2항). 소송사건이 조정에 회부된 이상 조정사건 하나만 진행되는 것이 법리상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정사건이 소송사건과는 다른 별개의 사건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별개의 사건인 이상 조정사건에서 절차종결을 포함한 어떠한 절차적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여 그 자체가 바로 소송사건의 종료사유 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민사조정규칙은 소송사건을 조정에 회부한 경우 조정이 성립하거나 조정갈음결정이 확정된 때에는 소송사건은 소취하로 종료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같은 조 3항).
소송사건이 조정에 회부되면 조정과 소송의 두 사건이 계속된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지만 앞에서 본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두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지는 않게 하면서도 소송사건이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불가피성이 있는 점, 회부된 조정사건에서 조정성립 등으로 분쟁 자체가 종결된 마당에 별개의 사건임을 내세워 소송사건을 유지할 실익이 없는 점, 이 경우 두 절차의 충돌 우려와 당사자의 의사 등을 감안할 때 현행법상 소송의 종료사유 중에서 소취하간주로 처리함이 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위와 같은 민사조정규칙의 입장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민사조정법에 의하면 조정성립이나 확정된 조정갈음결정은 절차적으로는 조정사건을 종결시키고 내용적으로는 재판상화해와 같은 효력이 있다(민조 29조, 34조 4항). 그 효력이 재판상화해와 같다고 하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사건 단위와 절차 종결의 문제와는 별개의 장면이다.
5. 문제의 정리민사소송절차는 각각의 절차가 단계별로 이어지는 시간적 흐름의 측면, 소송의 3요소라고 하는 법원과 당사자, 소송물의 상호관계의 측면, 그리고 사안의 결론에 이르는 판단 구조의 측면 등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마치 하나의 물건에 관한 정면도, 평면도, 배면도가 각기 달리 그려지듯이 소송절차 역시 한 권의 책자로 정리하는 것은 여러 각도에서 조망하는 모습을 일부씩 잘라내어 적당한 순서로 배열하는 것과 같아서 하나의 최선의 방식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본론으로 돌아온다. 화해와 조정은 실무상으로도 ‘당사자의 합의에 의한 자주적 분쟁해결’이라는 공통점이 강조되어 그 절차법적 위치상의 차이가 간과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양자는 민사소송법상으로는 하나의 소송사건 안에서의 절차와 소송사건 밖에서의 절차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분쟁해결의 실질에 있어서 매우 비슷하기는 하지만 ‘소송의 종료사유’라는 측면에서는 구별되어야 한다.
부연하자면, 소송과 조정은 별개의 절차이므로 소송사건이 조정에 회부된 경우에도 두 사건이 병존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이상 c의 경우와 같이 처리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할 것인데, 입법적으로 조정성립 등의 경우에는 소송사건은 소취하간주로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고 경정의 경우에(민소 260조) 종전 피고에 대한 소송관계에 관하여, 그 피고의 이익을 고려하여 소송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고, 피고 경정이라고 하는 소송종료사유를 창설할 수도 있으며, 현재의 소송법 질서의 틀 안에서 소취하간주로 처리하는 것도 가능한데, 현행법은 마지막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조정성립 등을 소송법 체계에 흡수하여 화해권고결정 확정과 같이 그 자체를 소송종료사유로 규정할 수도 있겠으나 현행법은 그리 하지는 아니하고 기존의 소송종료사유에 관한 틀 안에서 비송사건인 조정사건에서의 일정한 상황 발생시 소송사건은 소취하간주로 종료된 것으로 처리하기로 정한 것이다. 조정회부시 두 사건이 병존한다고 본다면 c의 경우처럼 처리할 수도 있겠으나 현행법은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조정성립시 당연히 소송사건은 종료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를 바로 소송종료사유로 볼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현행법 체계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소송종료사유가 조정성립이라고 한다면 소취하간주시에 발생하는 법률효과도 발생하지 아니할 것이므로 양자의 경우는 그 법적 의미에서도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교과서에서 조정과 소송종료의 관계를 명료하게 구분함으로써 절차법의 체계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소의 취하 부분에서 소취하로 간주되는 경우를 열거하면서 소송사건이 조정에 회부된 후 조정이 성립되거나 조정갈음결정이 확정된 경우를 누락한 것도 아쉽다.
한편 소송의 종료사유의 하나로 재판상화해를 들면서 그 부분에서 소송상화해와 함께 제소전화해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제소전화해는 소송계속을 전제로 하지 아니하므로 소송의 종료사유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소송계속이 없음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으므로 오해의 우려는 없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소송절차를 설명하는 방법의 까다로움으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그 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기택 석좌교수(서강대 로스쿨·전 대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