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 시대 상징은 인공지능(AI)입니다. 2016년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가 바둑 최고수 이세돌을 꺾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합니다. 최근 세계에서 가장 핫한 ‘챗GPT’에 제가 그다지 놀라지 않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느낌을 그때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둑에서 인공지능은 이미 神입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건 새로운 혁명입니다. 이 혁명은 정치를 어떻게 바꿔놓을까요?
미국의 과학사학자인 토마스 쿤은 1962년에 ‘과학혁명의 구조’를 발표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최초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의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법칙·관습·사회적 믿음 등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으로 이 패러다임이 한 시대의 세계관과 과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지배한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동시대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토마스 쿤은 과학의 발전은 개별적 발견이나 발명의 축적에 의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교체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봤습니다. 그는 이것을 ‘과학혁명’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과학혁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치 혁명도 패러다임 교체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는 과정도 동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이 바뀌는 패러다임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생산력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모두 생산력 혁명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생산력 혁명은 누가 더 많이 만드느냐, 누가 더 빨리 만드느냐, 누가 더 싸게 만드느냐의 싸움입니다. 종이·인쇄술·증기기관·인터넷은 그 경쟁의 산물입니다. 산업혁명의 패러다임도 ‘디지털혁명’ 패러다임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습니다. ‘디지털혁명’은 양은 무한복제로, 속도는 빛의 속도로, 비용은 제로로 수렴시키고 있습니다.
디지털 혁명이 오기 전에는 맨 밑에 기술이 있고, 그 위에 과학, 그 위에 철학, 그리고 맨 위에 신학이 있는 질서였습니다. 디지털 혁명이 오자 그 질서가 물구나무 섰습니다. 지금은 맨 밑에 신학이 있고, 그 위에 철학, 그 위에 과학, 맨 위에 기술이 있는 시대입니다. 기술자가 돈과 명예뿐만 아니라 권력까지 갖는 시대입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은 기술자들입니다. 1990년대는 빌 게이츠, 2000년대는 스티브 잡스, 지금은 일론 머스크가 미래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철학이 맨 위에 있는 시대와 기술과 과학이 맨 위에 있는 시대는 패러다임이 다릅니다. 경험의 힘이 약화하고 원로의 역할이 축소됩니다. 과거에 인디언 추장이나 집안의 어른이나 국가의 원로가 힘이 있었던 이유는 경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미래에 대해 점점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험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쓴 더글러스 아담스는 이런 익살스런 말을 했습니다. “태어나서 열다섯 살 이전에 접한 기술은 기술이 아니다. 열다섯에서 서른다섯 살 사이에 접한 기술은 ‘놀라운 기술’이다. 서른다섯 살 이후에 나온 기술은 ‘부담스러운 기술’이다.” 기술의 시대에는 나이가 어릴수록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기술의 시대는 정치 패러다임도 바꿔 놓고 있습니다. 1987년 노태우는 다수당의 다수파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92년 김영삼은 다수당의 소수파, 1997년 김대중은 소수당의 다수파, 2002년 노무현은 소수당의 소수파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기존 정치 상식에서는 없던 일입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2012년 안철수와 2022년 윤석열은 그저 개인일 뿐인데 기존 정당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정치에서 조직과 돈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언론도 힘을 잃었습니다. 국회의원 선수가 올라갈수록 권력 정점에 다가가던 시대는 끝나고 지금은 선수가 올라갈수록 퇴출 대상이 되는 시대입니다. 중진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정치 경험이 적을수록 환호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스마트폰과 SNS는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블록체인 기술은 정보 분산으로 국가 주권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AI) 챗봇 기술은 ‘페이크 뉴스(fake news)’를 양산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정치와 정당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챗GPT'에게 물어보고픈 심정입니다.
박성민 대표 (정치컨설팅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