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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목)
한국법조인대관
연구논단
[연구논단] 항소이유서 제출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안재명 기자
2023-03-0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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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제기
1)
월터 쉐퍼(Walter V. Schaefer, December 10, 1904 - June 15, 1986)는 ‘일국의 문명수준은 그 형사법의 적용을 보면 대충 측량이 가능하다’라는 말을 남겼다(“The quality of a nation's civilization can be largely measured by the methods it uses in the enforcement of its criminal law.” - Schaefer, Federalism and State Criminal Procedure, Harvard Law Review Vol. 70, No. 1, 26 (1956)).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 헌법이 천명하고 있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매우 기이한 형태로 변형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극명한 사례는 항소이유서 제출 과정에서 변호인 조력권이 어떠한 내용으로 보장되고 있는가 하는 데에서 엿볼 수 있다.

2)
형사 항소심의 경우, 피고인이 항소법원으로부터 소송기록접수통지서를 받은 날로부터 20일 이내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여야 하고, 그 기간 내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아니하는 경우 (직권조사사항에 해당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결정으로 항소를 기각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그 기간 준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이 항소이유서 제출은 항소심 재판의 심리범위를 설정하는 기능을 하는 동시에 항소법원으로서도 그 제출이 없으면 아무리 1심 재판이 잘못되었더라도 이를 변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1심 판결에 불복한 항소인이 그 당부를 가리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항소심 재판의 첫 관문이자 항소법원의 본안판단을 받기 위한 요건이 되는 것이다. 구금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인에게, 항소제기 후 항소이유서 제출과정에서의 변호인 조력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2. 대법원 판례의 입장
1)
대법원 2018. 11. 22.자 2015도10651 전원합의체 결정은 ‘필요적 변호사건에서 항소법원이 국선변호인을 선정하고 항소인인 피고인과 그 변호인에게 소송기록접수통지를 한 다음 피고인이 사선변호인을 선임함에 따라 항소법원이 국선변호인의 선정을 취소한 경우, 새로 선임된 사선변호인에게 다시 같은 통지를 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판시하는 한편, 대법원 2013. 6. 27. 선고 2013도4114 판결은 ‘필요적 변호사건이 아닌 사건에서 피고인이 항소이유서 제출기간이 도과한 후에 국선변호인 선정청구를 하여 국선변호인이 선정된 경우, 변호인에게 소송기록접수통지를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때 변호인의 항소이유서 제출기간의 기산일은 피고인이 소송기록접수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계산된다’고 판시하고 있다(미로처럼 복잡한 판례 내용의 소개는 우선, 김태형, 〈항소이유서 제출기간과 관련하여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의 실질적 보장 방안〉, 법률신문 2019. 2. 28.자 참고. 국선변호인이 법정기간 내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아니한 경우, 대법원 2012. 2. 16. 자 2009모1044 전원합의체 결정도 참조).

2)
요컨대, 이들 대법원 판례를 종합하면, 국선변호인의 경우와 사선변호인의 경우를 달리 취급하고, 필요적 변호사건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달리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형사소송법과 형사소송규칙에서 소송기록접수통지를 어떤 경우에 어떻게 하라고 규정하고 있고, 그 문리에 따라 해석한 결과가 위와 같다면 대법원이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탓하기 어렵다고 볼 수도 있다.

3)
그런데 멈추지 않는 의문은 도대체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이를테면 형사소송규칙이 정한 내용에 따라, 혹은 사선변호인인지 국선변호인인지에 따라, 또는 필요적 변호사건인지 아닌지에 따라 극명하게 좌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이를 쉽게 긍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피고인이 자신의 헌법상 권리를 알고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포기한 것이 아닌 이상, 이를 포기한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3. 변호인 조력권의 헌법상 가치
1) 미란다 고지의 배경과 내용

그렇다면 문명국가에서는 변호인 조력권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Miranda v. Arizona, 384 U.S. 436 (1966)에서 정립된 미란다 원칙은 다음과 같은 4가지(four-fold warning)를 의미한다. 즉, 구금상태에 있는 피의자의 자백진술이 임의적인 진술로서 법원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첫째, 그가 진술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점, 둘째, 어떠한 진술이든 일단 그가 진술한 것은 그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 셋째, 그는 심문과정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 넷째, 만일 그가 변호인을 선임할 자력이 없는 경우 국가가 변호인을 선정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구금상태에 있는 피의자가 변호인의 조력 없이 자백 진술을 한 경우, 검찰은 피의자가 위와 같은 권리를 알고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knowingly and intelligently) 포기하고 진술에 나아갔다는 점에 대하여 무거운 증명책임을 부담하여야 한다.

미 연방대법원이 구금상태에서의 진술의 임의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지장치를 판례로써 정립한 이유는, 헌법이 공표하고 있는 피의자의 기본권이, 단지 정부 관료의 손아귀에 좌우되는 언어 형식에 그치지 않고, 명실상부한 헌법상 권리로서 보장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과도한 공명심에 불타는 경찰이 구금상태에서 진술을 확보하려는 본질적 이유는 결국 피의자로 하여금 외부로부터의 조력을 일체 단절시킴으로써 저항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incommunicado interrogation'은 헌법상 자기정죄금지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고, 따라서 구금상태에서의 강제성을 해소할 수 있는 보호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그와 같은 상태에서의 진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자유선택이라 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던 것이다.

2) 피의자의 명시적인 요청에 의존하지 않음

한편, 변호인의 조력을 받기 위해서는 피의자가 심문 전에 반드시 요청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요청을 명시적으로 표명하였을 때 그는 조력권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가 이러한 요청을 하지 않았다 하여 곧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리를 몰라서 조력권을 행사하지 못한 피의자야말로 조력권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자이기 때문이다(필자 재강조 - 자신의 권리를 모르는 자야말로 조력권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자이다). 만일 변호인의 조력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의자가 명시적인 청구를 해야 한다고 해석한다면 우연적인 사정에 따라 조력권을 요구하지 않은 피의자를 차별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미 미연방대법원은 Carnley v. Cochran, 369 U. S. 506, 513 (1962) 사건에서 “[I]t is settled that, where the assistance of counsel is a constitutional requisite, the right to be furnished counsel does not depend on a request”라고 판시함으로써 ‘변호인 조력권은 피의자가 명시적인 요청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원칙을 정립하였고, Miranda v. Arizona 사건에서도 이를 재확인하였던 것이다.


4. 항소이유서 제출강제와 변호인 조력권

1) 다시 우리의 논의로 돌아와서 볼 때, 항소이유서 제출과정에서 변호인 조력권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필자가 변호한 사건 중에 하나는 이런 것이 있었다. 피고인은 기결수로, 관련사건이 추가 기소되는 바람에 불구속상태에서 1심 재판을 받고 항소를 제기하였다. 항소법원으로부터 소송기록접수통지서 및 국선변호인 선정을 위한 안내장을 송달받았으나, 본인의 법률적 부지로 항소심 첫 기일까지도 국선변호인 선정청구를 하지 않았고, 또한 적법한 항소이유서 제출기간 내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피고인은 구금된 피고인에게 당연히 국선이 선정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구속 피고인은 필요적 변호사건의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기결수로 확정판결에 의해 형을 살고 있는 피고인이 추가 기소되는 경우, 그에게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는 법률상 불구속 피고인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경우 구속 피고인이 아니므로, 피고인이 국선변호인 선정청구를 해야 조력을 받을 수 있고, 따라서 선정청구가 없었다면 변호인 조력권을 포기하였다고 볼 것인가? 보다 현실적으로 항소이유서 제출기간 도과 후에는 국선 신청을 하더라도(또는 사선 선임 후 항소이유서를 제출하더라도) 이는 법률상 방식에 위배된 것으로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볼 것인가?

2)
이에 대하여는 아니라고 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필요적 변호사건에서 말하는 구속피고인은 당해 사건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된 자인가라는 형식적인 잣대로 판단될 것이 아니라, 현재 구금된 상태로 재판을 받는 자인가라는 실제적인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하고, 항소이유서 제출기간 20일은 피고인이 70세 이상자인지, 미성년자인지에 대한 판단이 뒤바뀔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어서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할지 의문이 생길만한데, 이 모든 경우에 대법원이 선례를 남길 수는 있다 할 것이나, 과연 그 차이가 변호인 조력을 받을 권리의 취급을 극명하게 달리할 정도인가는 매우 의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5. 결론

결론적으로 필요적 변호사건인가 아닌가에 따라 변호인 조력을 받을 권리를 극적으로 달리 취급할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같은 이유로 사선과 국선을 달리 취급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해석론은 형사소송규칙이 헌법의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요컨대, 문명국가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피고인이 자신의 헌법상 권리를 알고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포기한 것(knowingly and intelligently waived)이 아닌 이상, 이를 포기한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피고인이 항소제기로 항소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이상,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적어도 한번은 그 이유를 정리하고 진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라야 비로소 국가 형벌권이 최소한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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