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는 재판을 불신했는데, 앞서 보았던 고문과 잔혹한 형벌, 마녀재판과 오판 말고 다른 이유도 있을까?
우리 사회를 다스리는 재판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라. 그야말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진정한 증거가 거기 있다. 그만큼 모순과 오류로 가득하다. 재판에서 봐주기식 판결이나 지나치게 가혹한 판결로 생각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둘 사이의 중도라고 할 만한 경우도 그쯤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인데, 이것은 사법의 정신과 몸체에 자라고 있는 부패하고 병든 부분이다.
어느 시대든 법관에게 요구하는 판단 기준은 법과 양심이다. 하지만 법관이 기존의 법적 견해가 상충될 때 자의적으로 편드는 것 또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아무렇게나 법리를 만들고 적용하는 것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진 부정의다.
우리 시대의 변호사들과 판사들은 모든 소송 사건에서 자기 좋을 대로 둘러맞출 구멍을 충분히 찾아낸다. 그렇게도 광범위하고 그렇게도 많은 견해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다지도 임의적인 주제를 다루는 분야에서 극도의 판단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지 않을 만큼 깨끗한 소송은 거의 없다. 이 법정이 판결한 것을 저 법정은 다르게 판결하며, 그 법정도 다음에 다르게 판결한다.
어떤 법 해석 문제에 부딪쳤을 때, 다양하고 상호 모순되는 견해를 만들고 비교하는 것이야말로‘ 법적 사고방식(legal mind)’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문제는 법관이 권력자나 부유한 사람들 눈치를 보고 유리하게 미리 결론 낸 후, 그에 맞추어 법리를 짜내는 것이다. 설령 나쁜 의도가 없더라도, 법관이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면 올바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재판관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자기 마음을 잘 챙기지 않으면 우정, 인척 관계, 미모, 복수심에 기우는 마음, 우연한 충동이나 그 비슷하게 헛된 어떤 기미까지도, 소송 사건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암시를 그의 판결에 스며들게 해 저울대가 기울어지게 할 수 있다.
공정한 재판을 하려면 법관이 자기 마음을 잘 챙기는 것 즉, 양심을 지켜야 한다.
나는 나를 재판하기 위해 나의 법과 나의 법정이 있으며, 다른 곳보다 더 많이 나를 세운다. 당신이 비겁하고 잔인한지 혹은 충직하고 헌신적인지를 아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보지 못하며, 그저 막연한 추측으로 당신을 짐작할 뿐이다.
몽테뉴는 자기 마음을 잘 챙겼는지, 양심대로 살았는지 되돌아보기 위해 가상법정에 자신을 내세우곤 했다. 양심이란 무엇일까? 소극적으로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고, 적극적으로는 ‘옳고 그름에 대하여 그렇게 판단하지 않고서는 판관으로서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든 법관은 오랫동안 법을 배우고 익히는 데 힘쓴다. 처리해야 할 사건은 끝없이 밀려온다. 그들 머리에 법률지식이 늘어날수록 양심을 성찰하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을까?
참되게 쓰이기만 한다면 지식이란 인간이 획득한 가장 고귀하고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자신의 근본 능력과 가치로 삼는 이들, 자기들의 분별력을 기억력에 의존하게 하는 자들, 타인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는 자들, 그리고 책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의 경우(이런 종류의 사람은 무한대이다)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나는 그 지식을 얼뜨기 짓보다 더욱 혐오하는 바이다.
몽테뉴는 법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직업 법관의 숙명을 아프게 지적한다. 오랫동안 재판만 해온 필자에게도 얼뜨기 이야기는 비수처럼 다가온다. 법관은 헌법이 보장하는 법관의 독립을 마음 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한다. 법관의 독립은 누구를 위해, 어떤 이유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받는다면, 몽테뉴는 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그것은 재판받는 사람에게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판결의 권위는 판관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판받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공직이든 모든 전문 직업이 그러한 것처럼 그 목적을 자기 너머의 무엇엔가에 둔다.
박형남 원장(사법정책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