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1950년대 이후 장애인복지의 이념은 점차 인간의 존엄성, 정상화, 자립생활,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에 따라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등에서 발달장애인은 자신의 생활 전반에 관하여 자신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명문화하고 있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위와 같은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 폭넓게 실현될 수 있도록 장애인 활동지원과 자립생활 지원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장애인복지의 이념과 사회적 지원정책의 추세에 비추어 볼 때 민법상 법정후견제도 역시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및 잔존능력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사회참여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필자가 관여한 서울가정법원 2023. 2. 16.자 2022후기611 결정을 토대로 성년후견이 발달장애인의 복리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 살펴보고, 바람직한 법정후견제도의 운영방안을 모색하기로 한다.
2. 사건의 개요A는 20대 지적장애인으로 최근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피성년후견인의 경우 노인복지법상 요양보호사 결격사유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요양보호사 자격증 발급을 거부당하였고, 이에 성년후견인 B(A의 어머니)는 성년후견이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면서 성년후견 종료를 청구하였다. 위 사건에서 서울가정법원은 2023년 2월 16일 비록 A가 의사결정에 어려움이 있는 발달장애인으로서 의학적으로는 그 장애가 현존하고 있더라도 A에 대하여 성년후견을 지속하는 것이 오히려 발달장애인의 복리를 저해하고 있다는 이유로 성년후견 종료를 결정하였다.
법원은 A가 젊은 성인으로 장래 자립하기 위하여 요양보호사 교육과정을 수료한 다음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였고, 관련 기관에 취업하여 근로활동을 하고 있는 점, 현재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부모 도움 없이 하고 있고 자립여건과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부모의 자립의지도 확고한 점, 성년후견이 개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하지 못함으로써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받고 사회참여의 기회를 상실한 점 등을 근거로, 비록 A가 의학적으로는 그 장애가 현존하고 있더라도, 가능한 후견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피후견인의 잔존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후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최소개입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A에 대하여 성년후견을 지속하는 것이 오히려 A의 복리를 저해하므로, 민법 제11조의‘성년후견개시의 원인이 소멸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성년후견이 개시되면 발달장애인으로 하여금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거나 잔존능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하기 어려워 장애인복지의 기본이념에반하고,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소외도 심화된다.
따라서 장애의 정도가 심한 발달장애인의 경우라 하더라도 후견의 필요성이 있는 때에 한하여 최소한의 후견이 개시되어야 하고, 만일 발달장애인에 대하여 성년후견을 지속하는 것이 오히려 발달장애인의 복리를 저해한다면 민법 제11조에 따른 성년후견 종료가 가능하다.
3. 성년후견이 발달장애인의 복리에 미치는 영향과 개선방안(1) 가정법원은 취소할 수 없는 피성년후견인의 법률행위의 범위를 정할 수 있고(민법 제10조 제2항), 피성년후견인의 잔존능력을 감안하여 성년후견인의 법정대리권의 범위를 정할 수 있다(민법 제938조 제2항). 그런데 2021년 7월 1일부터 2022년 6월 30일까지 1년간 전국 가정법원 및 지방법원의 성년후견개시 결정 3300건에 대한 분석 결과(기존 연구결과에 의하면, 성년후견개시 사건 중 피성년후견인이 발달장애인인 사건은 대략 10%로 추정된다), 가정법원이 사전에 성년후견인의 취소권 행사범위에 일정한 제한을 두거나 또는 특정행위에 대하여 성년후견인에게 법정대리권이 없다고 정한 사례는 발견할 수 없었다(대부분 성년후견인으로 하여금 특정행위에 대해서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만 정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성년후견이 개시되면 실제로 피성년후견인이 일상생활 영역에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거나 잔존능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어려울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이 성년후견 개시로 발달장애인인 피후견인의 행위능력을 광범위하게 제한하고 성년후견인에게 포괄적 법정대리권을 부여한다면, 발달장애인으로 하여금 잔존능력을 활용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위한 접근 기회를 전면 차단한다는 점에서 장애인복지의 기본이념과 충돌할 우려가 크다. 또한 사회구성원들 역시 행위능력이 없는 발달장애인을 더 이상 권리의 주체나 법률행위의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고 성년후견인에게 더욱 의존하는 상황이 초래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피성년후견인인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소외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더욱이 피성년후견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스스로 혼인, 이혼을 할 수 없는 등 자기결정권을 상실하고, 각종 법령상 결격사유 조항들로 인하여 자격이나 직업을 당연 상실하는 등 직업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점도 발달장애인의 복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2) 한편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된 지 10년가량 되었으나, 성년후견인을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나 실무는 여전히 미흡한 상태이다. 일례로 성년후견인이 피성년후견인을 대리하여 예금을 관리하려면 인터넷뱅킹과 모바일뱅킹을 할 수 없어(후견인용 공인인증서 부재) 반드시 평일 업무시간에 은행을 직접 방문하여야 하고, 심지어 정당한 법정대리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피성년후견인 명의로 체크카드 등을 발급받지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발달장애인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 등 가족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년후견 개시로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계단절과 낙인이 심화될 뿐 아니라 후견인인 가족조차 발달장애인 명의로 금융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가족이 느끼는 보호부담과 책임은 점차 가중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피성년후견인인 발달장애인의 복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장애에 대한 생애주기별 관점에서 보더라도 발달장애인이 성인기를 맞으면 자립능력을 최대화하고 부모 외의 사회적인 보호체계를 대비하는 계획이 요구되나, 성년후견 개시는 오히려 발달장애인의 자립능력을 약화시키고 부모에 대한 의존도만 더욱 높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3) 따라서 장애의 정도가 심한 발달장애인의 경우라 하더라도, 발달장애인에 대한 법정후견은 발달장애인의 장애특성 및 일상생활의 정도, 발달장애인과 보호자의 자립에 대한 의사 및 자립여건과 환경, 친족의 돌봄과 지역사회의 조력을 통해 법정후견 없이도 발달장애인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었는지 여부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후견의 필요성이 있는 때에 한하여 개시되어야 하고, 후견이 개시되는 경우에도 법정후견유형 중에서 성년후견보다는 피후견인의 행위능력을 인정하면서 후견적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는 후견이 널리 활용되어야 한다(보충성 및 필요최소개입의 원칙). 특히 발달장애인이 보호자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거나 독립적인 일상생활을 전혀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 등과 같이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가 아닌 이상 발달장애인에 대한 성년후견 개시는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4) 한편 민법 제11조는 성년후견개시의 원인이 소멸된 경우에는 성년후견종료의 심판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성년후견개시의 원인은 단지 의학적 관점에 따라 피후견인의 정신적 제약의 정도만으로 판단될 것이 아니라 피후견인이 장래 처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무(의사결정)의 범위와 친족 등의 도움을 받아 후견 없이도 사무를 처리할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포함하여 법 제도적 관점에 따라 종합적으로 평가되어야 하고, 특히 발달장애인의 경우에는 자립여건과 환경, 잔존능력의 활용 측면에서 후견적 개입이 최소화되는 범위에서 법정후견이 개시되도록 해석되어야 한다. 더욱이 근래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의하여 발달장애인이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인 능력을 최대한 계발할 수 있도록 발달장애인에게 적절한 재활치료와 발달재활서비스 등이 제공되고 있고, 이러한 서비스나 혜택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추세에 있으므로, 발달장애인의 사회참여 및 자립을 위하여 발달장애인의 잔존능력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후견제도가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운영될 필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현재 가정법원이 지방자치단체의 공공후견지원사업에 따라 의사결정에 어려움이 있는 중증 발달장애인에 대하여도 성년후견이 아닌 특정후견을 개시하고, 이들의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취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발달장애인에 대하여 성년후견을 지속하는 것이 오히려 발달장애인의 복리를 저해한다면, 민법 제11조에 따른 성년후견 종료가 가능하다고 볼 것이다.
4. 결론장애인복지의 이념은 장애가 영구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됨에 따라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문제에 자주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이 약화되어 점차 사회와 분리되고 소외되었다는 문제제기에서 출발하였다. 최근에는 발달장애인 역시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할 권리가 있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선택한 삶의 방식과 경험으로부터 스스로 배우고 터득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론도 등장하고 있다. 그에 반하여 민법상 법정후견제도는 아직까지 발달장애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발달장애인의 잔존능력을 최대한 억제하는 방향으로 운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도 대한민국 정부에 현행 성년후견제도가 장애인의 법적 능력을 박탈하는 것으로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반하므로, 이를 장애인의 자율성, 의지 및 선호도를 존중하는 조력의사결정 시스템으로 시정할 것을 여러 차례 권고한 바 있다.
민법은 질병, 장애, 노령 등 정신적 제약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성년후견 개시의 요건과 효과를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일상생활이나 사회참여가 어느 정도 가능한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해서는 장애의 특성과 생애주기별 지원방향 등을 고려한 별도의 특칙을 마련해 두고 있지 않다. 그로 인하여 성년후견제도가 정상화, 자립생활 등 장애인복지 이념에 부합한 형태로 운영되기 쉽지 않고, 발달장애인의 권리보장을 위한 각종 현행 법률의 내용이나 이를 구현하기 위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다양한 사회적 지원체계와도 상충되는 등 근본적인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현재 성년후견과 관련된 법 제도적 장치의 미흡과 성년후견인의 권한범위 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발달장애인의 소외와 그 가족의 부담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동안 학계 등으로부터 성년후견제도에 대한 입법적 개선책이 다양한 형태로 주장되어 온 만큼 사회취약계층인 발달장애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입법적 개선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다.
박원철 부장판사(부산가정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