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2시 40분. 의뢰인이 삶이 무의미하다며 그 동안 고마웠다고 자살을 암시하는 메일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이 나인 걸까? 당장 조치하지 않는다면 정말 생명이 위독해지는 것 아닐까? 벌떡 일어나서 침대 가운데 앉아 핸드폰을 쥐고 급히 답장을 썼다. 자살한다던 분이 몇 분 후 태연히 “그러면 다시 살아보겠다.” 짤막한 답장을 보내왔다. 휴, 왜 죄 없는 나에게 이러나 싶다.
답은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 속을 가장 잘 알고, 뭐가 그를 불안, 초조하게 만드는지, 어떤 말이 그를 안심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이 약해진 날, 머리를 비우고 잠들 수 있도록 마음을 다독여줄 이야기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변호사뿐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듯 따뜻한 위로도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뢰인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 쉬운 것도 변호사다. 무너질 듯한 의뢰인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를 흔드는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길래 왜 그러셨어요.” “저한테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세요.” “자꾸 이러시면 저도 책임 못 집니다.” 한마디 하고 싶을 때마다 떠올리는 생각이 있다. 모두가 돌아서고 원망하는 가운데 남겨진 저 사람에게 나라도 생채기 내지 않는 그 한 사람이 되어주자. 이미 당신이 망쳐놓았다고 탓해서 내 면피만 할 생각만 하지 말고, 때로는 선 넘는 투정도 받아주고, 감정기복도 못 본 듯 넘어가 주자. 불안하고 초조한 그의 마음을 먼저 보아주자.
고집부리는 의뢰인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서면에 쓰고 직접 말해야 하는 순간은 늘 곤혹스럽다. “얼마나 실력이 없으면 저런 주장을 하고 주저리주저리 했던 말을 반복할까.” 법정에서 모두 나만 쳐다보는 것 같다. 변호사는 근사한 일만 할 줄 알았는데 멀뚱멀뚱 나만 바라볼 뿐 말주변 없는 의뢰인 대신 빌면서 합의도 받아오고, 구구절절한 서면을 읽으며 한숨 쉬시는 판사님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원래 이런 막무가내인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밤잠을 못 자고 원통해할 의뢰인을 생각해서 대신 망신도 당하고 눈총도 받는 일이 우리 일이다.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으니 평생 고개 숙일 일 없이 당당할 줄 알았는데 자식을 위해서도 안 숙이는 고개를 내 의뢰인을 위해 숙이고 마음을 낮춘다.
나에게 온몸을 기대고 선 의뢰인의 무게에 가끔은 질식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의뢰인을 일으켜 저 혼자 설 수 있도록 다시 세울 수 있는 것도 때론 나뿐이다. 그 힘으로 나도 서고 그도 다시 세울 수 있다.
안현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