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에 대해서 사전에 숙지한 정보는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도 꾸준히 헌법을 공부해 국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로스쿨 교수로 일하다가 다시 유학을 선택, 독일에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고 막 돌아와서 로펌에 합류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 약력 ]
서울 홍익대부속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김진한 변호사는 1997년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2001년부터 2012년까지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보와 헌법연구관을 지냈다. 이후 2013년부터 3년 간 인하대 로스쿨에서 학생들에게 헌법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후 독일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거친 뒤, 현재 법무법인 한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빈농으로 살다가 젊은 시절 가난뿐인 고향을 탈출해 상경한 후 사업을 도모했다고 한다. 모험심이 많은 분이어서 남들이 안 한 사업을 했는데, 성북동 산골짜기에서 자동차학원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의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학원이었다고 했다. 김진한 변호사(55·사법연수원 29기)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주변에 민가가 거의 없는, 그러니까 도시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한적한 산골에서 외롭게 자랐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책임감과 성실함을 갖고 악착같이 일을 해 돈을 벌었고 그렇게 번 돈으로 고향인 제주도에 조금씩 농장 부지를 매입했어요. 그러곤 장년 이후에 제주도(제주시 아라동)에서 처음으로 감귤농장을 시작하셨죠. 일을 너무 열심히 하셨는지 병을 얻고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작고하셨는데, 그 직전에 평생 일군 농장을 제주대학교에 장학금으로 기증하셨어요. 그 농장부지에는 현재 제주대학병원이 들어서 있고, 거기 한 귀퉁이에 아버지의 흉상이 서 있어요.”
자부심으로 상기돼도 허물이 아닐 이런 말을 그는 별 표정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가 속울음을 삼키는 걸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김 변호사는 땀으로 일군 재산을 다음 세대를 위해 기증하신 아버지의 삶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자신에게 삶의 윤리적 척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해소되었지만, 아버지의 삶이 하나의 기준이 되면서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엄격해져 타인을 다소 까다롭게 보는 단점이 생긴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법학과에 들어간 경위도 단출하게 설명했다.
“한번도 법학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고등학교에 훌륭하신 역사선생님이 계셨거든요. 그런데 학력고사를 치르고 나니 갑자기 공부만 해야 하는 삶이 좀 갑갑하게 느껴졌어요. 그즈음 모교를 찾아온 졸업선배들이 법학과를 권유하는 걸 듣고는 법학과를 가게 됐어요. 선배들 말이 법학과를 졸업하면 여러 진로를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렇게 법학과에 간 그는 적성이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꽤나 방황을 했다고 했다. 학보사에 적을 둔 채 전공과 불화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복학한 이후 헌법의 매력에 빠져서 사법시험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학을 앞두고 유럽으로 4개월 간 배낭여행을 다녀왔어요. 잠은 기차에서 자고 발이 움직이는 대로 다녔죠. 제가 사실은 자신감도 없고 내성적인 편인데, 배낭여행을 통해서 삶에 대한 시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적응한 도시에서 다시 미지의 도시로 옮겨가고 다시 그 도시에 적응했다 싶으면 다시 두려움을 안고 다른 도시로 떠나는 여정을 반복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걸 떨쳐버릴 수 있었어요. 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삶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전문가가 되어 세상에 기여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됐어요.”
그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게 헌법재판소 결정문이었단다.
헌법 만나면서
비로소 정답만이 아닌 자유를 상상할 수 있게 돼
사법연수원 수료 후
동기 한명과 헌법재판소 연구관에 지원
헌법재판소,
한국 민주주의에 결정적인 기여
헌법적인 관점을 확산시키는 역할하고 싶어
김 변호사의 말은 그대로 받아 쓰기만 해도 완벽한 문장이 될 만큼 적확하고 비유와 논리 또한 풍요로워서 헌법에 과문한 인터뷰어가 이해하기 수월했다. 자신의 생각을 치밀한 사변과 언설로 머뭇거리지 않고 표현하는 그는 자신을 모범생이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라고 표현했는데, 타성에 젖어 있는 인사이더들에게 각성과 영감을 안겨줄 말이 가득했다.
세속적 관점에서 역시나 가장 화제가 될 만한 그의 경력은 박사학위를 두 개나 취득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학위는 모교인 고려대에서 취득했는데, 미국연방대법원 제도를 연구한 것이다. 그 계기와 과정이 궁금했다.
“제가 속해 있던 헌법재판소가 미국연방대법원을 공부하기로 했고 제가 미국에 파견을 가게 됐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 미국연방대법원 시스템을 공부하게 됐죠.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얼마 전에 낙태를 불법으로 판단해서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유를 확대해오는 노력을 해왔거든요. 한 해에 1만 건이 넘는 수많은 사건이 들어오는데, 제 연구논문은 이 중에서 어떤 사건을 심의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고려되고 참작되는지 등을 깊이 들여다본 거예요.”
박사과정 중 영광스럽게도 인하대 로스쿨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돌연 그는 3년이 지나 그 자리를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가족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다.
“로스쿨 교수로서 학생들과 눈마주치는 게 참 좋았어요. 제가 무대공포증 같은 게 있고 그게 일종의 콤플렉스였는데, 교수로 일하는 동안 많이 극복됐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오버페이스를 했는지 번아웃 같은 게 오더라구요. 그리고 마음속에 있었던 버킷리스트가 살아났어요. 헌법책 쓰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 그리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 것이 그거였어요. 그걸 더 늦기 전에 실행에 옮긴 거죠. 그런데 출근할 곳이 없고 명함이 없는 삶이라는 게 얼마나 나 자신을 위축시키는지를 실감하고는 후회를 할 때도 있었어요.”
그는 그 생활을 알심 있게 7년간 밀어붙인다. 그러고는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제도와 운영 등을 연구해 법학박사 학위를 받아든다. 그러니까 그는 미국연방대법원과 독일연방헌법재판소를 깊이 톺아본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법률가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유학을 준비하면서 장학재단 같은 곳에 지원금을 신청해볼까도 생각해봤는데, 그만두었단다. 그는 자신보다 여유가 없고 더 젊은 친구들에게 지원금이 돌아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학 비용 일체를 모두 자비로 충당하는데, 선친이 남겨주신 자산을 거기에 썼다고 했다. 그러니까 선친의 유산을 한국 헌법의 미래를 위해 투자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가 인생의 기로에서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할 때 가장 상위에 두는 가치나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선친의 삶이 보여준 무언의 유훈 때문인지, 그가 세속적인 이해나 이익을 좇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록 내성적이긴 하지만 저에게는 제 가슴을 뛰게 하는 것, 저의 내면이 요구하는 것을 따르는 모험심이랄까 도전 정신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럴 경우엔 그 길로 가는 걸 주저하지는 않았어요.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에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딱딱한 빵을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는 것처럼 선택한 길을 꾸준하게 걸으면서 삶의 유의미한 가치를 남기고도 싶었어요. 그러면서 이 세상이 1밀리미터라도 나아지는 데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최근 취직을 했다. 법무법인 한결이 그곳이다. 헌법 전문가인 변호사는 로펌에서는 그닥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법조계에 들어온 이후 변호사 업무를 보는 것이 처음인 그는 자신이 가진 경쟁력을 뭐라고 선전할 수 있을까.
“우선 헌법 소원을 대리할 수도 있는데요, 사실 헌법은 모든 법에 적용될 수 있거든요. 형법을 다룰 때도 이런 처벌이 정당한가 차별적이지 않은가, 이런 걸 헌법적으로 깊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다른 법을 많이 공부할 기회는 없었지만 헌법적인 시선으로 다른 법을 성찰할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판례를 적용하는 데 급급한 게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게 우리나라 법조인들의 과제라고 생각하거든요. 헌법적인 관점을 확대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물론 다른 변호사님들께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구요. 속으로는 저를 쓰지 않는 로펌은 손해를 보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헌법 전문가로서 단단한 자긍심이 느껴지는 그에게 다소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헌법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나 의식은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데, 왜 사회구성원간의 갈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는지를. 아니 왜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지를.
“법조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게 있는데요. 알게 모르게 엘리티즘의 구속을 받고 있다는 거예요. 일반 시민의 삶의 형편을 제대로 살피려 하지 않고, 기존 판례가 가장 지혜로운 판결이라고 믿는 거예요. 거기서 법과 현실의 괴리가 발생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나오죠. 법원은 구제기관인데, 법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면 구제받을 방법이 없거든요. 거기서 설움과 분노 같은 것이 집단적으로 계속 누적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의 진단은 우리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 문제에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우리사회에 왜 이태원 참사 같은 일들이 반복될까. 현장에 경찰관이 있었고 그가 울면서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게 현장에서 먹히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만약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다면 사람들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까요. 우리 사회는 발화자의 계급이나 권위에 따라 진리가 결정되는 경향이 있어요. 현장에 있는 경찰관의 말이 가장 진리에 근접해 있는데 그의 말은 무시가 되는 거예요. 안개가 자욱한 밤바다의 함대 조타수가 등대지기의 말을 듣지 않고 제독의 말을 따르면 어떻게 될까요. 거기선 권위나 계급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이 중요하거든요.”
역사에 깊은 소양이 있는 만큼 그는 독일 현대사를 비유로 들었다. 고전적 문화민족이라는 것에 도취된 나머지 서구 민주주의 전통이 척박한 독일에서 1차 세계대전 패배 후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애썼던 독일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남겼다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자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려준 것. 에버트가 죽은 후 집권한 괴물이 바로 히틀러라고 했다. 민주주의가 법치와 함께 한 국가에 정착되는 과정의 험난함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김 변호사는 헌법이 중심이 되어 우리 사회의 기본권이 계속 진화하기 위해서는 변호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로 치면 김앤장이나 태평양에 해당하는 대형로펌에서는 기본권이나 인권 이슈가 첨예한 사회적 사건에는 일급 변호사들이 달려들어서 일을 해요. 특히 연방대법원의 사건의 경우에는 무료로 변론하는 경우도 허다해요.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명예와 권위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거든요.판례가 바뀌기 위해서는 변호사들이 주장을 해야 해요. 변호사들이 아무런 주장을 하지 않으면 대법원은 새로운 판례를 남기기가 어렵거든요. 변호사가 헌법에 대한 소신이 없어서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으면 판례는 바뀔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배석한 박수연 기자가 작년에 두 번 재판취소를 한 바 있는 헌법재판소 이야기를 꺼내며 그게 바람직한 것인지, 앞으로 헌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묻자 김 변호사가 망설임 없이 소신껏 답을 했다.
“궁극적으로는 재판취소가 가능해야 한다고 봐요. 기본권이 침해됐다고 봤을 때 제기하는 게 헌법소원인데, 그런 본질적인 것에 충실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를테면 대법원 판례 중 옛날 사고에 젖어서 기본권을 돌보지 못한 판단에 대해서 컨트롤하는 게 좋은데, 헌재에 대한 비판으로 들릴 수 있지만 최근의 재판취소는 대기업의 조세, 재산에 대한 것이었다는 게 조금 아쉽고요. 자유나 인권, 기본권이 걸린 문제에 대해선 좀 더 정면대결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김 변호사는 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었고, 법에 문외한인 인터뷰어를 배려했으며, 몸에 밴 겸손과 겸양을 보여주면서도 소신을 표현할 때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헌법주의자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헌법주의자는 다름 아닌 가장 헌신적인 이타주의자인 동시에 가장 완벽한 개인주의자일 거라고. 그리고 그 모습을 그에게서 보았다.
김도언 시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