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고가 외쳤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재판장이 답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니, 민사소송은 돈이 문젭니다! 다음과 같이 조서 정리하겠습니다. ‘원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진술. 재판장: 돈이 문제라고 진술.’”
법원에 있을 때 전해 들은 이 일화에서처럼, 민사소송에서는 돈이 문제다. 실체적으로 그럴 뿐만 아니라 절차적으로도 그렇다. 변론, 증거조사, 심리를 잘 해서 결론을 잘 내려면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그게 전부 돈이다. 만약 그 시간과 노력을 제대로 돈으로 환산해 주지 않거나, 돈을 지나치게 깎거나, 마땅히 부담해야 할 사람에게 부담시키지 않으면, 절차가 지연되고 결과가 부당해지며 사회 전체적으로 부(負)의 외부효과가 발생한다.
가장 심각한 것이 의료감정에서의 감정료다. 의료감정의 지연은 고질적인 문제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감정을 의뢰받은 의료기관들이 순차로 의뢰를 거절하여 적당한 감정기관을 찾지 못하거나 감정의견 회신이 장기간 지체됨으로써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 넘게 소송이 멈춰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지나치게 낮은 감정료가 제일 문제다. 감정을 의뢰받은 의사는 장시간 신체검진이나 의료기록 검토를 수행한 후 감정서를 작성해야 하고 향후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도 감수해야 하는데, 이를 고려할 때 겨우 수십만 원 선인 감정료는 지나치게 낮다. 의료기관에 대해 법원과의 관계나 도의적 책무임을 호소하며 감정을 의뢰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다양한 제도적 개선방안이 제시되고 있으나, 감정료를 올리지 않는 한 모두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현장검증 여비 역시 비용에 대한 고민 없이 당위만 추구할 때 절차가 어떻게 뒤틀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관내ㆍ관외 여부, 거리, 식사나 숙박 필요성 등을 고려하여 수만 원에서 수십만 원까지의 검증 여비가 산정되었다. 그런데 몇몇 재판부의 검증여비 산정액이 과다하다고 지방변호사회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그 후로는 법원공무원 여비규칙상의 여비만 산정하도록 내부 방침이 바뀌었고, 이것이 2008년 ‘증거조사 출장여비 등 산정 및 지급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으로 제도화되었다. 이에 따르면 관용차를 이용한 관내 출장 시 4시간 미만은 유류비만 지급되고, 4시간 이상일 때에만 1인당 2만 원의 출장 여비를 지급하며, 식비는 따로 지급하지 않는다. 현장 검증은 업무의 일환이니 실비를 초과한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취지다. 그러자 과거라면 현장검증을 신청했을 만한 사건이라도 미안한 마음에 가능한 한 사진이나 영상을 제출하여 검증을 대신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현장검증이 심증 형성과 당사자의 절차적 만족감 증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변화다.
변호사 보수도 그렇다. ‘변호사 보수의 소송비용 산입에 관한 규칙’상의 산입비율 자체도 충분히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지만, 더 큰 문제는 소가를 산출할 수 없는 소송이나 비재산권상 소송의 경우다. 실제로는 사활이 걸린 사건이어서 거액의 변호사 보수를 지출했음에도 소가를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승소자가 변호사 보수를 제대로 상환받을 수 없다면, 결국 법적 구제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
소송비용 확정 시에 본인소송 당사자가 투입한 시간과 노력이 제대로 산정되지 않는 것도 보이지 않는 비용이 경시되는 또 다른 예다.
소송비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비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차의 모순, 지연,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절차비용을 제대로 산정하고 배분하지 않는 지금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
한애라 교수 (성균관대 로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