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 세기의 재판을 시작하며
마지막 준비
검찰은 코소보 사건에 관한 재판 전 변론요지서를 2001년 11월 26일에 제출했고, 재판부는 2002년 1월 9일에 준비기일을 열었다. 지난 회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 사이인 2001년 11월 27일에는 검찰이 밀로셰비치에 대한 코소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 사건의 병합을 신청했고, 12월 11일에는 코소보 사건에 나머지 두 사건을 병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2002년 1월 9일의 준비기일은 코소보 사건에 국한됐다.[1]
[각주 1] 지난 회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 이후 항소심 재판부는 2002년 2월 1일에 1심 결정을 뒤집어 세 사건의 병합 신청을 인용했다. 1심 재판부는 원래 예정됐던 대로 2002년 2월 12일에 재판을 시작하되, 크로아티아 사건과 보스니아 사건은 증거 교부가 마쳐지는 등 재판 준비가 될 때까지는 심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실제로 크로아티아 사건과 보스니아 사건의 준비기일은 코소보 사건의 심리를 계속하던 중인 2002년 7월 25일에 열렸다.
준비기일에서 검찰은 코소보 사건 증인을 231명을 부를 예정인데, 그중 110명만 법정에서 직접 증언을 할 예정이고, 나머지 121명은 서면 증언으로 대체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위에서 본 규칙 제73조의2 (B)항에 근거해서 직접 증언을 할 인원은 90명으로 하고, 검찰 측 증거조사를 2002년 8월까지 마치라고 하는 등 검찰 측 증인의 숫자와 증거조사기간을 제한했다. 재판부는 그 밖에도 1개 범죄(event)에 증인을 한 명씩만 부르라고 제한하기도 했다.
나를 놀라게 한 뉴욕타임스 기사
당시 세계의 이목은 밀로셰비치 재판에 집중되어 있었다. 위 준비기일 다음 날인 2002년 1월 10일 자 뉴욕타임스는 “밀로셰비치, 재판 계획을 세우는 법정에 출석하다(Milosevic Is in Court as Trial Plan Is Set)”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보도를 했다. 뉴욕타임스에서 국제재판소 관련 사항을 전문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시몬스(Marlise Simons) 기자가 쓴 기사였다. 그중 한 부분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다 :
“나이스 검사는 오늘, 밀로셰비치가 재판소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또한 재판부의 명령을 따르리라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보호 대상인 증인의 이름이나 비밀 문서와 같이 민감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민감한 사항과 이름이라도 공정한 재판을 위해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메이 재판관은 '피고인이 증인의 신원을 모른다면 어떻게 반대신문을 준비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자메이카의 패트릭 로빈슨 재판관은 '피고인이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재판소에 아무런 영향이 없고, 법률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 우리는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여야 하고, 그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의무이다'는 말을 반복했다. 세 명으로 구성된 재판부의 세 번째 재판관으로 한국에서 새로 부임한 권오곤 판사는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사실, 재판소에 온 지 채 두 달도 안 돼서 아직 실무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영어도 잘하는 것이 아니어서, 아예 처음부터 무슨 말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영미법 판사들은 운동경기의 심판(umpire) 같이, 법정에서 별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누가 옳다고 판단만 한다고 들은 바도 있었다. 그렇지만 위에서 인용한 기사의 마지막에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 부분은 아무리 봐도 나를 (신중하다고) 칭찬하는 것 같이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재판장이던 메이 재판관을 찾아갔다. 재판관들끼리는 서로 이름(first-name)으로 부르며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다. 리처드(메이 재판관)는 나로부터 “umpire”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크게 웃더니 다음과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즉, “영미 판사들은 당사자들이 증인신문을 할 때에는 별로 개입을 하지 않는다. 검찰이든 변호인이든 각자 나름대로의 전략을 가지고 신문사항을 구성하는데, 당사자가 마지막에 결정타로 쓰기 위해 보류하고 있던 질문을 판사가 나서서 먼저 해버리면 당사자의 증인신문을 망칠 수 있다. 그렇지만 절차 진행이나 법률적 쟁점에 관한 심리(hearing)가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다. 판사들의 생각을 말해줘야 당사자들이 재판의 방향을 알 수도 있고, 만일 판사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당사자들의 답변을 통해 바로잡을 수도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어려운 영어
메이 재판관이 해 준 말에 이 대사에게서 들은 말의 기억이 겹쳐지면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국제사회가 나를 재판관으로 선임해서 국제재판소에 보낸 것은, 내가 영어를 잘해서 내 영어를 들으려고 보낸 것이 아니라, 동방의 지혜, 즉 한국의 사법연수원에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법률 소양(legal mind) 교육을 받고, 영미법과 대륙법이 조화된 한국의 법제에서 20여 년간 판사의 격무를 감당했던 실무가의 경험을 필요로 해서였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 혼자만의 자기 정당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 나는 완벽한 문장 여하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질문이나 발언을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ICTY 검찰에서 간부급인 P5 직급으로 근무(2006-2008)한 바 있던 송상엽 변호사로부터, 그가 어느 하루 정례적인 간부회의에 참석했을 때, 델 폰테 소추관이 검찰 간부들에게 “권 재판관은 별로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 그가 얘기할 때에는 유심히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내가 아주 엉망은 아니었구나 하는 위안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많이 노력해야 했다. 영어 문서를 읽는데 원어민보다 두 배 정도의 시간이 걸렸고, 글을 쓰는 데는 훨씬 더 걸렸다. 그러니 남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데에는 이력이 난 한국의 판사가 아니었던가?
세기의 재판 시작
2002년 2월 12일 화요일. 밀로셰비치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 첫날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역사상 국가 원수에 대한 첫 재판이라는 점 때문에, 세계 주요 언론의 기자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다. 재판소 주위를 접시 안테나가 달린 언론사 차량들이 가득 메워서, 재판관인 나도 간신히 청사에 들어올 수 있었다. 운집한 기자들이 200여 명에 달했고, BBC에서만 수십 명이 왔다고 했다.
2월 12일과 13일에는 검찰의 모두 진술(opening statement)이 있었고, 14일, 15일 전부와 18일(월)의 오전 시간에는 밀로셰비치의 모두 진술이 있었다. 그리고 18일 오후에 첫 증인인 바칼리(Mahmut Bakalli)의 증언을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판이 시작됐다.
서술의 한계
이제 밀로셰비치 재판에 대한 서술을 시작하는 무렵에 단서(但書)를 달 일이 하나 있다. 2006년 3월 밀로셰비치의 사망으로 재판이 종료된 후, 재판관들과 연구관들이 가지고 있던 메모 등을 모두 파기했다. 물론, 사건 기록(case filing)과 속기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이들은 아직도 ICTY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파기한 것은 서로 주고받은 메모, 연구관들이 작성한 보고서, 증언요약, 그리고 재판관들이 각자 나름대로 작성한 판결 초안이 있었다면 그 초안(재판관들이 공통으로 작성한 초안은 없었다) 등이었다. 꼭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명문 규정은 없었지만, 규칙 제29조가 합의(合議, deliberations)의 비밀을 규정하고 있고, 합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문서들이 외부로 유출되면 오해를 살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 회고록에서는, 특히 밀로셰비치 사건과 관련해서는, 가급적 본안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절차적 측면을 주로 다루려고 한다.
권오곤 전 재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