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촌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옆 학교에 ‘젊은예술가를 위한 법률지원실’이라는 리걸클리닉 모임이 있었다. 그 당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었는지 그 학교 친구들을 찾아가 눈치 없는 동아리 회원으로 1년여 간 활동했었다.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친구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이다.
그런데 그런 활동을 하던 당시에도 ‘예술가가 특별히 사회제도적 보호와 지원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나의 생각은 모호했다. 예술이 가진 공공성이나 역사적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지만 나의 삶 속에서, 내가 만난 예술가들에게서 그 이유를 발견하고 싶었다.
문화예술 변호사로 일하며 많은 창작자들을 만났다. 순수미술작가, 일러스트 작가와 같은 시각예술 분야의 예술가, 만화작가, 웹툰 작가, 음악가, 영화감독, 각본가, 그리고 실연자로 분류되는 아이돌 멤버 등 다양한 작업을 하는 의뢰인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충분한 법적 조력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의뢰인도 있었으나 법적 조력을 구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법률', '분쟁'이라는 단어가 불러오는 긴장감이 창작자에게는 더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모든 예술가가 순진하고 유약할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그러나 예술작업은 순수한 감정과 사상에서부터 시작되고, 정신적인 것을 작품화하는 표현에 이르기까지의 집중된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일련의 과정이 개인에서부터 시작되고 끝이 나기 때문에 분쟁 상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편안한 표정으로 자문을 구하는 고객사 대표의 모습은 상상이 되어도 변호사 앞에서 태연한 표정의 예술가 의뢰인은 도통 상상이 안 된다.
예술가가 분쟁에 휘말리면 두 가지 관점에서 고통을 겪는다.
첫째, 진정한 예술가라면 작품을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므로 자기 존재감에 상처를 입는다.
창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좋은 예술가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표현을 한다. 이런 예술가가 창작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과 작품을 동일시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배 아파 낳은 자식’같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 작품을 도용하거나 부당한 이익을 얻고 있다면,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권리를 침해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아온 자아가 타의에 의해 분열되는 느낌을 겪게 된다.
둘째, 이후의 예술 활동이 전과 달라진다. 저작권 침해는 단순한 권리 침해가 아니다. 작품을 도용 당한 예술가는 창작에 회의를 느끼며, 대부분의 예술가는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한다. 순수한 의식의 집중이 필요한 제대로 된 창작은 최소한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불가능해진다.
의뢰인이었던 한 그림 작가는 자신이 탄생 시킨 캐릭터가 상품으로 둔갑하여 지하철 가판대에서 판매되는 것을 목격한 후로, 법적 절차가 전부 마무리되고도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였다.
얼마 전 사망한 만화 <검정 고무신>의고(故) 이우영 작가의 과거 인터뷰를 보다가 작가의 한마디에 마음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먹먹해졌다. 작가는 자신이 그린 캐릭터와 관련해 기나긴 분쟁 중에 있었다.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어머니는 아이가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잖아요.” 작가는 이런 마음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무단 사용하여 책을 출간한 사업체에게 선처를 베풀고 오히려 이 사업체와 캐릭터 사업 대행을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우영 작가는 자신이 그림을 열심히 그리면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가 잘 되는데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 마음으로 새로 그리는 작품속에 <검정 고무신>의 캐릭터들을 등장 시켰는데, 대행사는 이 일로 <검정 고무신>의 원작자인 이 작가에게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또한 대행사는 원작자에게 동의를 구하거나 최소한의 통지를 하지도 않고 대기업 상품의 프로모션에 캐릭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우영 작가는 사망하기 불과 몇달 전, 한 대형마트에서 라면 프로모션을 하는 장면을 찍어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올려놓았다. 영상속에서 기영이(검정 고무신의 주요 캐릭터)는 라면을 홍보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 사실을 지인들의 제보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의 황망한 심정을 털어놓듯 영상의 마지막에 울고 있는 기영이를 그려 놓았는데 기영이는 손목에 수갑을 차고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담아 만들어낸 캐릭터가 내가 진정으로 동의한 적 없는 방식으로 이용되는 것을 지켜보는 작가의 마음은 어땠을까. 잃어버린 자식을 만났어도 어찌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가늠해볼 뿐이다.
예술가의 권리와 지위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에는 예술이 가진 공공성, 문화산업의 향상 발전을 위함 등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이유는 예술가들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분쟁이 발생하면 더 이상 창작할 수 없고 나아가 생존할 수 없게 하는 그 고통의 무게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예술가 곁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조력자, 법률전문가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어려운 분쟁 중이라도 믿을만한 조력자가 동행한다면 외롭고 막막한 마음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한 주는 나의 초심을 기억하며, 예술가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자문해보는 시간이었다.
김유나 변호사(서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