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검정고무신 사건으로 창작자(저작자)들의 열악한 지위와 그들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불공정한 계약 관행의 문제점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구름빵 사건이 또다시 반복된 것이다. 구름빵 사건 때에도 창작자들, 특히 신진 작가들의 열악한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변화를 촉구하는 사회적 여론이 크게 일었다.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때 뿐,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급기야 이번에는 촉망받는 작가, 우리 사회가 키워주어야 할 한 유능한 작가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 구름빵 사건 이후 거의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이 기간을 거치면서 플랫폼과 제작사들은 더 강력해졌고, 창작자들에게는 더 불리한 유형의 계약이 나타나고 있다. 유력한 어느 한 제작사가 창작자들에게 제시하는 최근 계약서를 보면, “매체 불문하고 현재 또는 향후에 고안될 모든 방식으로 전 세계에서 영구적으로 저작권(파생 저작물을 창출할 권리 포함) 및 저작권 갱신, 부속 권리, 인접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는 제작사의 유일하고 배타적인 재산이다”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계약서라면 대부분 권리는 제작사 것이 되고, 창작자의 권리가 인정될 여지는 별로 없다. 그러나 극히 일부 스타 반열에 오른 창작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창작자들, 특히 신진 작가들은 이러한 계약 내용을 수정해 달라고 요구할 입장에 있지 않다. 그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어떻게든 창작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런 그들의 입장에서 제작사가 제시하는 계약 내용에 대하여 수정을 요구하거나, 계약체결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창작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재판은 비용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지극히 소모적인 절차이다. 계약 체결 단계에서 대등한 협상력을 갖추어 정당하고 공정한 협상과 계약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창작자와 제작사가 상생을 넘어서서 함께 득을 보며 우리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렇게 제작사가 창작자에게 일정 금액만 지불하면 저작물 이용으로 인한 모든 수익, 심지어 파생시장에서의 수익까지 모두 제작사가 가져가고 창작자에게는 추가적인 대가가 돌아가지 않는 계약 형태를 업계에서는 ‘매절(買切)계약’이라고 한다. ‘매절’은 원래 출판계에서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저작권 양도계약의 한 유형이다. 출판사는 저작자에게 보통 원고료라고 불리는 일시금만 지급하고, 향후 저작물 이용을 통해 얻는 모든 수익을 출판사가 가져가는 구조이다(검정고무신 사건이 이에 해당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러한 매절계약은 창작자들에게 불리하고 불공정 소지가 많기 때문에 가급적 예외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 저작권법 학계의 입장이고, 창작자들의 저작권 인식이 높아지면서 출판계에서도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에 있었다. 그런데 디지털, 네트워크, 플랫폼 시대의 도래와 함께 거대 자본이 콘텐츠 산업계에 들어오면서 매절계약이 다시금 살아나고 있다. 예외적이었던 계약 형태가 콘텐츠 산업계에서 오히려 일반화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실제로 이런 거대 제작사들과 계약을 체결했던 창작자들의 경험담을 들어 보면, “다른 작가들도 다 같은 조건으로 계약했다, 당신만 예외를 인정해 줄 수는 없다”는 제작사의 말에 더 이상 계약 내용 수정을 요구할 수 없었다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매절계약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019년 유럽의회에서 공표한 유럽연합 저작권지침(EU Directive on Copyright)이 규정하고 있는 정당보상 청구권이나 계약수정 요구권, 또는 이와 유사한 추가보상 청구권 제도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최근 정부와 콘텐츠 산업계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제도들은 작품이 계약 당시에는 예측하지 못했던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경우, 최초 계약 내용을 수정하여 그로부터 발생하는 수익 중 일정 부분을 작품의 창작자에게 보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불공정계약의 폐해를 극복하고 창작자들의 억울함이 풀어질 수 있을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이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창작자들은 당초 계약이 작품의 성공에 비하여 현저히 불공정하다는 점과 정당한 보상이나 추가보상금 액수가 얼마여야 하는지를 두고 제작사와 힘겨운 공방을 벌여야 한다. 어차피 쌍방 간에 생각하는 불공정 여부와 보상금 액수 간의 괴리가 클 것이므로 원만한 합의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결국에는 구름빵 사건이나 검정고무신 사건처럼 재판이라는 소모적인 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재판을 할 시간적, 재정적 여건이 되지 않는 창작자들이나, 재판을 시작했지만 지리한 절차와 비용부담에 지칠 대로 지친 창작자들은 소송을 포기하거나 제작사가 제시하는 금액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제도들은 겉모양이나 명칭만 그럴듯할 뿐, 창작자들에게는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이런 제도의 도입에 반대하는 논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제도들은 당사자 간 합의로 체결한 원 계약을 한쪽 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상대방의 동의 없이 사후에 수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사자 쌍방의 합의를 중시하는 사적 자치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면서, 사정변경의 원칙은 극히 예외적으로만 인정하는 민법의 기본 이념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또한 최초 계약을 신뢰한 제작사들에게 예상치 못한 불의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해결책이 있는가? 아무리 그럴듯한 제도라도 재판을 통해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제도라면 창작자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요, 또 하나의 희망고문이 될 뿐이다. 재판은 제작사들에게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재판을 통하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 즉 계약의 사후 수정이 아니라 최초 계약 단계에서 창작자가 제작사와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하고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합리적이고, 민법의 기본 이념에도 부합한다. 그런 시스템이 있는가? 현실적으로 볼 때, 지금으로서는 신탁관리단체를 통한 이용허락 시스템이 이에 가장 근접해 있고, 다른 대안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른 대안이 있다면 이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런 논의가 없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마땅한 대안이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불공정한 매절계약이 이루어지는 원인은 창작자와 제작사 사이에 존재하는 ‘갑을 관계’와 그에 따른 협상력의 불평등 때문이다. 신탁관리제도가 활성화되면 신탁관리단체가 신탁자인 창작자를 위하여 제작사와 협상하고 저작권사용료를 징수한다. 그 사용료 액수와 징수는 관련 정부부처의 엄격한 심사와 승인을 거친 사용료징수규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불공정의 여지가 적다. 또 표준적 약관이기 때문에 제작사 입장에서도 사전 예측에 따른 안정적인 사업 설계가 가능하다. 특히 음악 분야에서 한국음악저작권협회 같은 신탁관리단체는 우리나라 대중음악 작사, 작곡가들 절대 다수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기 때문에 충분한 대표성을 확보하고 있고, 그 협상력도 거대 제작사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저작권법 제54조가 저작권 권리변동 등록을 하지 않으면 제3자에 대항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창작자가 신탁관리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작품의 신탁관리를 맡겨도 그 사실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등록하지 않으면, 해당 작품의 저작권이 제3자에게 양도될 경우 신탁관리단체가 그 제3자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신탁관리단체가 관리하고 있는 음악은 500만 곡이 넘고, 하루에도 무수한 음악이 창작되고 있는데, 사전에 이러한 곡들을 모두 등록한다는 것은 행정적으로나 비용적으로나 불가능하다. 이러한 법과 현실의 괴리는 제작사들이 창작자에게 신탁관리 작품에 대하여 일종의 이중계약인 매절계약을 요구하는 유인을 제공하게 되며, 이것이 업계의 관행으로 굳어지면 결국 불공정 계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이러한 관행을 시정하기 위하여 몇 차례 재판을 통한 시도를 해 보았지만, 번번이 저작권법 제54조의 장벽에 막혀 좌절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책은 비교적 간단하다. 저작권법 제54조를 개정해서 신탁관리단체의 관리저작물의 경우에는 권리변동 등록 없이도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작사는 개별 창작자가 아니라 대등한 협상력을 가진 신탁관리단체와 계약을 체결하여야 하고, 신탁관리단체는 수탁자로서의 임무에 따라 신탁자인 창작자를 위하여 협상에 임하고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계약 내용은 관계 당국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정형화 되어 있기 때문에 불공정 소지도 없다. 물론 여기에 정당보상 또는 추가보상청구권 제도가 덧붙여진다면 창작자들 입장에서는 더 좋겠지만, 애당초 계약 단계에서 창작자들이 불공정 계약에 내몰리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는 정당보상이든 추가보상이든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재판은 비용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지극히 소모적인 절차이다. 상대방으로부터 공격 당하고 또 반격해야 하는 과정에서 받는 정신적, 감정적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개인 창작자들이 재판이라는 절차에 들어가게 되면 창작의 동인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죽하면 구름빵의 작가는 재판이 진행된 2004년부터 2010년까지 7년 동안 가장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할 30대 초반 나이에 작품 창작을 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안면마비까지 왔을까? 오죽하면 검정고무신의 작가는 1심 판결 선고가 나기도 전에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가정이지만, 이들이 그 지리한 재판 끝에 승소판결을 받았다면 행복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동안 소모된 비용과 창작에 쏟았어야 할 시간, 정신적 감정적 상처는 회복되거나 치유될 수 없다. 그러면 반대로 구름빵 사건 재판에서 승소한 제작사는 행복했을까? 이 또한 아니다. 재판이 장기화 되고 여론이 나빠지면서 제작사도 구름빵 캐릭터의 후속 사업에 대한 동인을 잃었다.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을 받은 세계적인 창작물(캐릭터)이 무한한 가능성만 간직한 채 더 성장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장되고 만 것이다. 작품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은 창작자 자신이다. 그런 창작자를 배제한 작품의 상품화 사업은 지속적 성장을 하기 어렵다. 자본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창작자와 제작사 사이의 저작권 분쟁은 대부분 이긴 쪽이나 진 쪽이나 모두에게 상처가 된다. 승자가 없다. 따라서 이미 체결된 계약의 사후 교정은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 어렵고, 반복되는 ‘희망고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계약 체결 단계에서 대등한 협상력을 갖추어 정당하고 공정한 협상과 계약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쌍방 간에 불필요한 소모적 재판을 방지하고, 창작자와 제작사가 상생을 넘어서서 함께 득을 보며(win-win), 우리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오승종 교수(홍익대 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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