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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만나는 법] 박병무 VIG 파트너스 대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
김도언 시인(소설가)
2023-05-3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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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력 ]

서울 대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전체수석을 차지하며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박병무 변호사는 대학교 3학년 때인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연수원을 수료한 뒤에는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2000년부터 3년간 로커스라는 IT 회사의 지주회사인 로커스홀딩스(플레너스엔터테인먼트) 대표를, 2003년부터는 뉴브리지캐피탈 대표를 역임했다. 이후 2006년부터 2년 간 하나로텔레콤 대표이사를 지냈다. 그는 2010년에 보고펀드 공동대표로 취임했으며, 2014년부터 현재까지 VIG 파트너스 대표를 맡고 있다.

 

법률가라면 여론에 동요하지 않고
오로지 법적 논리로 진실 도출해야
국민을 대리할만큼 섬세하지는 못해
가족 공동체 소중… 희생시켜선 안 돼
예전에 국제사건 전문가인 한 변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외국의 변호사들을 경험하면서 직접 느낀 것이라며 한국 변호사들의 능력이 유달리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그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들이 법조계에 유입되는 특유의 관행을 꼽았다. 외국에선 딱히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병무 대표(62·사법연수원 15기)는 그런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서울법대 수석입학,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 수석졸업 등의 경력은 차라리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인터뷰를 마친 시점에서 느낀 것이지만 그가 쌓은 서사의 신화성은 오히려 다른 이들은 가지 않는 길을 용기 있게 선택하고 그 판단에 혼신을 다한 것, 그래서 마침내 세속적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장면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그의 인상은 허허로웠다.

 

“본적은 아버지 고향인 경북 경산이고 아주 어렸을 때 대구에서 잠깐 살다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아버지 직장이 한국전력이었는데 발령에 따라 올라온 거죠. 외가 쪽은 퇴계 이황 선생 후손인데 일제 강점기에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셨다가 어머님만 6.25때 단신으로 내려오셨어요. 호기심 많고 아주 명민하신 분이었죠. 어머니는 제가 학교 다닐 때 다양한 경험을 쌓게 했어요. 공부보다는 바이올린이나 수영이나 보이스카우트 활동 등을 권하셨거든요. 아버지는 많은 형제분 중 막내였고 저도 막내예요. 그래서 집안 제사 때, 아버지 형제분들과 사촌들까지 정말 많은 가족들이 모였던 기억이 나요. 거기서 대가족 특유의 공동체적 가치와 유교적 질서를 배우는 한편 남자를 우선하는 가부장적 문화에 대해선 다소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죠.”

경상도, 대가족이라고 하니 턱 숨부터 막힌다. 하지만 그는 창의력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어머니의 자율적인 교육 아래 다양한 문화적 공기를 흡입하고는 고교 진학 후에는 입시에 매진해 상기한 성적을 거둔다. 그렇다면 그에게 따라붙었을 ‘수석입학자’나 ‘최연소 합격자’라는 레테르에 중압감 같은 건 없었을까.

“학교 다닐 때나 연수원에 있을 때는 부담감을 어느 정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을 했죠. 그런데 사회에 나와 변호사로 일하다 보니 공부하는 것과는 다르더군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심정이었어요. 그럼에도 공부 성적이 좋았던 것에 대한 자긍심 같은 게 내면 속에 자리 잡고 있긴 했는데, 같은 법대에서 만난 아내가 자칫 자만해질 수도 있는 마음을 잘 관리할 수 있게 도와줬죠. 도움이 되는 일도 있었어요. 음반이나 영화 등을 제작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들어갔을 때 당시는 그 분야가 약간 음성적인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제 이력이나 경력이 그쪽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안겨주는 유리한 점도 있더라구요.”

박병무 대표가 법대를 지망한 건 아버지의 적극적인 기대와 권유 때문이라고 했다. 법대를 나온 큰아버지가 고시를 안 하고 정치를 했는데, 그런 배경 때문인지 아버지가 경영학에 관심있던 박 대표에게 법대를 권장했고 법대를 나오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고 회유(?)했다는 것이다.

“제 경향상 답을 도출할 수 있고 그걸 논리적으로 궁구할 수 있는 분야에 끌렸거든요. 그런데 법 공부를 하다 보니 문과 쪽에서는 그래도 법학이 논리적인 답을 찾을 수 있는 학문이더라구요. 사실 재미를 못 느꼈으면 안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들이 예외 없이 선택하는 재조의 길을 택하지 않고 변호사로서 법조계에 첫 발을 내딛는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 시절에 저는 소위 해외 ‘상사맨’들이 부러웠어요. 그때는 해외에 나가는 게 드물었으니까요. 뭔가 진취적인 일을 하고 싶었죠. 사실은 제가 연수원에 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기가 어려웠어요. 참 암울했던 시절이고 속에서 저항감 같은 게 있어서 이런 정부의 공무원이 되는 것에 좀 회의감이 들었죠. 외가 쪽 어른들이 북쪽에 남아계신 가족사도 이유라면 이유가 될 수 있었겠네요. 그래서 김앤장에 들어가서 기업사건 등을 맡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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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흔이라는 게 있다. 어떤 일을 실행할 때 망설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남는 흔적을 말한다. 그것은 개인사를 회고할 때도 드러날 수 있다고 보는데, 자신의 커리어의 출발점을 회고하는 박 대표의 말에서는 일말의 주저흔도 느껴지지 않았다. 명분을 앞세우기보다는 솔직하면서도 실리적인 그의 성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기업 및 금융 인수합병 전문가라는 냉혹한 승부사로서 명성을 가진 그에게 변호사 시절 참여했던 사건 중 가장 인상적인 것 하나를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제일은행 인수전이었던 것 같아요. 물경 2~3백 명의 전문가들이 뛰어들어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전략을 세우고 협상을 벌였죠. 그때 제가 대리한 의뢰인의 상대측이 한국 정부였는데,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협상이라는 게 한쪽 입장만 내세우면 결코 합의가 나올 수 없어요.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게 협상의 포인트인데 그때의 경험이 상당한 자산이 되었어요.”

그는 지금은 VIG파트너스라는 M&A 전문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 기업 경영 및 실무를 맡을 때 법률가로서 다른 전공자들보다 유리하게 발휘할 수 있는 달란트가 무엇인지 물었다.

“법률 교육의 기본은 뭐가 공정하고 어떤 것이 형평에 맞는가를 살피는 것인데, 일방적인 자기주장만 해서는 법적인 진실에 가닿을 수 없죠. 이때 법률가의 감수성이 도움이 되죠. 상대방의 주장과 의견을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서 합의의 지점을 찾아가는 체화된 감각 같은 게 있는 거죠. 그리고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도 법적으로 위법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를 반드시 살피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나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보이면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합니다.”

박 대표는 인터뷰 내내 여러 차례 적법성과 위법성 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조했다. 법률가로서의 그의 정체성과 그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에 견고한 준법의 원칙이 스며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한 가지 궁금한 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변호사 시절 적잖게 외국 자본이나 기업을 대리해왔다. 의뢰인의 입장을 대리하는 건 변호사의 직업적 소명이다. 그런데 의뢰인의 이익과 우리 사회의 공익, 국가나 정부의 이익이 상충할 때 그는 과연 어떤 판단을 했던 것인지를. 그러자 의외로 단순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의뢰인의 이익이 한국 사회나 국가의 이익에 상충한다면 그 일을 안 맡아야죠. 사실 나 스스로 공익에 부합한다는 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그것에 동의할 수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고 열정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런 과정이 있어야 결과도 좋게 나오기 마련이구요. 의뢰인의 이익과 변호사의 역할이 일치해야 과정이 아름다운데 그것이 안 맞다면 안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제일은행 인수 협상에서 제가 외국계 자본을 대리할 때도 저는 그런 판단을 했어요. 당시 한국은 외자가 너무 부족했고 IMF에서는 부실한 시중은행을 외국 자본에 팔 것을 정부측에 조건으로 걸었어요. 정부 입장에서는 그것을 충족시켜야 했죠. 그리고 이 협상이 IMF와 정부가 합의한 대로 결과가 나와야 좋은 케이스가 되어 외국 자본이 지속적으로 한국에 투자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본 거죠. 그때 매각이 성사되면서 한국 정부의 신용등급이 상당히 올라가기도 했어요”

빼어난 전문적 식견과 성공적인 커리어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그에게 성공과 성취의 그늘에 가려진 개인적 좌절이나 절망이 없었는지를 물으니 그게 왜 없었겠느냐면서 들려준 말은 이랬다.

“예를 들어 열 번 인수 협상을 한다고 하면 한 번 정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와요. 좌절하고 경험하는 순간이 훨씬 많죠. 그리고 우리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해도 투자자들 눈높이에서 보면 부족해 보일 수 있거든요. 왜 이 정도밖에 못하냐는 컴플레인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죠.”

역시나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SWOT 분석을 해보자면 박 대표의 강점(strengths)은 단언컨대 솔직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솔직함의 배경에는 타인을 경쟁 상대나 다툼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지향과 상상력에 의해 세계를 바라본 이 특유의 담대한 용기가 단단히 받쳐주고 있을 것이고. 탁월한 실력과 커리어, 거기에 준수한 인상까지 갖춘 그에게 혹여 공직이나 정치권에서 영입 제의 같은 건 없었을까.

“네, 예전에 몇 차례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사실은 변호사나 CEO는 각각 의뢰인이나 주주의 입장을 대리하는 역할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정치인은 특정 계층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리해야 하는 거예요. 과연 내가 국민을 대리할 자격이 있을까. 나에게 그런 공감 능력이나 열정이 있을까. 그리고 비교적 무난하게 어려움 없이 자라온 내가 다양한 계급과 어려운 계층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안을 물리쳤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변호사 시절 외국 자본이나 기업을 대리한 일들 때문에 공격받기 참 좋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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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격을 낮추면서 말했지만 저 말속에는 정치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심지가 숨어 있다. 아닌 말로 자기 자신에게 국민들을 대리할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지, 다양한 계층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있는지 고민하는 것은 정치를 하려는 이들이 필수적으로 그리고 엄중하게 거쳐야 할 과정인데, 그걸 생략하고 불나방처럼 정치에 뛰어들어 개인의 공명심만 충족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박 대표의 말은 그걸 은근히 짚어준다.

박 대표에게 양대 진영의 적대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물었다. 법률가로서 정치의 목소리가 법의 논리를 억압하는 상황에서 선후배 동료 법률가들에게 어떤 주문을 하고 싶은지를.

“예전에 법철학이나 헌법을 배울 때 제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게 있어요. 법은 여론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여론이라는 게 정치적인 주장이나 목소리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법적인 판단이 이런 여론이나 트렌드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법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에 위배되는 거예요. 법률가라면 이런 여론, 국민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오로지 법적 논리로만 진실을 도출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많은 이들이 법철학 중에서 ‘법적 예측 가능성’이란 걸 간과하고 있는데,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측 가능한 법적 논리를 지키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시류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중심이 흔들리면 안 되는 거죠. 과거 일부 노동현장에서 위법 행위자들에 대해 법원에서 석방 일변도의 판결을 내린 적이 있는데, 그것이 과연 옳았는가 묻는다면 저는 회의적이에요. 왜 법을 다루는지 왜 법이 필요한지를 인식해야 하는데, 요즘 로스쿨은 변시 학원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소리들도 들려서 좀 안타깝더라구요.”

역시 소신 발언이다. 무릇 사람은 성공과 성취를 욕망하는 법인데, 성공과 성취 역시 행복의 조건 중 일부일 뿐이다. 결국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성공이나 성취도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지 않을까. 그는 행복을 위한 일과 개인의 삶과의 균형, 즉 ‘워라벨’을 어떻게 지켜나가고 있을까.

“저희 세대에선 워커홀릭을 이해하는 정서가 있었어요. 변호사 처음 시작했을 때는 거의 집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어요. 아내가 첫아이를 낳을 때 선배 변호사가 꽃다발을 들고 왔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바로 다음날 홍콩으로 출장을 보내더군요.(웃음) 그런데도 다 이해를 해주는 정서가 있었어요. 변호사는 원래 의뢰인에 일이 있으면 한밤중에라도 달려가야 하는 입장이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보장이 안 되죠. 그런데 변호사 마치고 기업에 들어온 이후에는 1년 2~3번은 꼭 가족과 여행을 하려고 노력했고요. 일도 중요하고 또 제가 좀 무뚝뚝한 편이지만 가족 공동체의 소중함을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서 가족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어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 출연해 한국에도 팬이 많은 세계적 배우 틸다 스윈튼에게 어떤 인터뷰어가 ‘배우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성공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평소에도 자주 생각해온 주제인 듯, 틸다 스윈튼이 편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는 걸 보았다.

“성공요?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더 이상 속일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여배우의 말이 힘차게 은유하는 것처럼 자기 힘으로 성취나 성공의 경험을 갖지 못한 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속이려드는 사람들이리라. 자기가 누구인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까봐, 혹은 오해할까봐 자신을 연출하고 심지어는 기만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잘하는 일에 기꺼이 투신했다고 믿는 이는 자신을 속일 필요가 없다. 이미 그는 그 자신이 원했던 그 무엇이 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그는 진실하고 자유롭다. 그것이 세속적인 기준과는 무관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박 대표는 스트레가 쌓이면 일단 술을 즐기는 것으로 푼다고 한다. 운동을 하고 여행을 가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법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런데 그래도 씻기지 않는 일상의 독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지운다는 것.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되는 걸 느낀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곡으로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브람스 교향곡 1번 등을 꼽았다. 문득 어린 시절 그가 처음 연주했을 바이올린 레퍼토리가 궁금해졌다. 그 영혼에 그어졌을 그 오선의 선율이.

 

김도언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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