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 국민은행
logo
2023.09.27 (수)
지면보기
구독
한국법조인대관
홍수정 기자의 무비로
법과 이야기의 간극을 응시하는 영화 '더 리더'
홍수정 기자
2023-06-01 06:04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메일
URL 복사
인쇄
글자 크기
스크랩
기사 보관함
스크랩 하기
로그인 해주세요.
기사 메일 보내기
로그인 해주세요.
187981_2.jpg
2023_hong_movie_law.jpg
그는 어느 심하게 아픈 날에 우연히 그녀와 마주친다. 고열에 시달려 몸이 비틀거리는 날에. 둘은 금세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곧 무거운 혐의를 뒤집어쓰고 재판에 선다. 법과 이야기 사이의 간극을 다루는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9)에서는 이 시작 부분이 꽤 중요해 보인다. 한 여인을 둘러싼 상반된 시선들을 고루 담겠다는 다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건강한 시선으로 파악한 '사실'과,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는 아픈 눈에 비친 '진실'. 사법 시스템의 '판결'과, 연인이 들려주는 내밀한 '이야기'. '더 리더'는 이들 사이의 거리를 탐색하고 고심하는 영화다.

1958년 독일 노이슈타트(작센주에 속한 도시). 10대 소년 마이클(데이빗 크로스)은 우연히 마을에서 30대 여인 한나(케이트 윈슬렛)와 마주친다. 그녀는 홍열에 시달려 구토하는 마이클을 도와준다. 얼마 후 마이클은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는다.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마이클이 한나의 공간에 들어서는 유일한 사람이듯, 그녀의 내밀한 비밀을 엿보는 유일한 인물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금세 한나에게 빠져들고, 그녀에게 자주 책을 읽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홀연히 사라진다.


187981_2.jpg
‘더 리더’ 포스트 <사진=네이버 영화>

   
몇 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우연히 방청한 전범 재판에서, 피고인으로 선 한나를 발견한다. 그녀는 마이클과 헤어지고, 아우슈비츠에 취업해 수감자를 관리하는 감시자로 일했다. 이들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 한창이다. 그러나 한나는 자신이 한 행동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감시자들이 그녀를 총책임자로 몰아가자, 판사는 한나의 필체를 요구한다. 책임자가 쓴 보고서와 비교해 필적감정을 하기 위함이다. 종이 앞에서 동요하던 그녀는 자포자기하듯 '내가 보고서를 썼다'고 말한다. 그때 마이클은 깨닫는다. 한나는 사실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신에게 책을 읽어달라 부탁했고, 끝내 이것을 알리기 부끄러워 거짓 자백을 했다는 것을. 개인과 역사의 비극이 교차하며 새로운 비극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녀는 종신형에 처해진다.

 

187981.jpg
우연히 마주친 한나(왼쪽)와 마이클(오른쪽) <사진=네이버 영화>

 

20여 년 뒤, 한나는 조기 석방 대상이 되지만 감방 안에서 죽음을 택한다. 이 의미심장한 결말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치에 협력한 이에게 해피엔딩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영화의 윤리적 선택으로 보인다. 동시에 한나의 이야기, 아무도 모르고 오로지 마이클만 알았던 그녀의 이야기가 끝내 방문을 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에 약간의 희망을 남겨둔다. 시간이 많이 흐른 어느 날, 마이클은 딸에게 한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87981_1.jpg
나치 전범 재판에 피고인으로 선 한나 <사진=네이버 영화>

 

'더 리더'를 오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영화가 전범을 옹호하는 작품이라 단정 짓는 것이다. 그런 단정은 '더 리더'의 다양한 장면들을 놓치게 만든다. 글을 모르는 한나가 주변의 사정에 늘 어둡다는 것,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돌보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판결문에 기록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음을 보여준다. 법원의 판단을 외면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커다란 나무에 나이테가 많듯이 거대한 비극에도 결이 빼곡하다. 법과 이야기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간극을 인정하며, 그사이에 난 무수한 흉터들을 직시하는 영화가 '더 리더'다.

 

'더 리더'는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는 영화일지 모르겠다. 나치와 그 부역자에 대한 처벌을 골몰하는 과정은, 일본과 얽힌 역사를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과 겹치기 때문이다. 만일 이 영화가 우리에게 즉각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우리 내면의 어떤 공포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가 너그러운 사회적 인식을 낳고, 이것이 약한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심. 그래서 사법 시스템의 울타리가 튼튼하다는 믿음이 없는 나라에서는 문화가 경직된다. 사법을 향한 신뢰가 공고할 때 문화는 자유롭게 만개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을 흔드는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시스템에 대한 믿음, 그 위에 펼쳐진 논의의 장, 이것을 예술로 담으려는 노력이 스크린에 맺힐 때 비로소 한 편의 영화는 우리와 만난다. 한국에서 이런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 기대해도 좋을까.


홍수정 기자

soojung@lawtimes.co.kr

 

홍수정 기자는 2016년 영화 전문지 ‘씨네21’에서 영화평론상 우수상을 받으며 영화평론가로 등단했다. 이후 영화와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리걸 에듀
1/3
legal-edu-img
온라인 과정
실무자를 위한 행정처분 대응방법
김태민 변호사
bannerbannerbannerbannerbannerbannerbannerbannerbannerbannerbannerbanner
PDF 신문
신문 구독 문의
광고 문의(신문 및 인터넷)
기타 업무별 연락처 안내
구독 서비스 결제 안내
이용 중이신 구독 서비스의 결제일은 7월 1일입니다.
원활한 서비스 이용을 위해
간편결제 신용카드를 등록해주시기 바랍니다.
footer-logo
1950년 창간 법조 유일의 정론지
논단·칼럼
인기연재
지면보기
굿모닝LAW747
LawTop
footer-logo
법인명
(주)법률신문사
대표
이수형
사업자등록번호
214-81-99775
등록번호
서울 아00027
등록연월일
2005.8.24
제호
법률신문
발행인
이수형
편집인
차병직 , 이수형
편집국장
배석준
발행소(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 396, 14층
발행일자
1999.12.1
전화번호
02-3472-0601
청소년보호책임자
김순신
개인정보보호책임자
김순신
인터넷 법률신문의 모든 컨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전제,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인터넷 법률신문은 인터넷신문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