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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글의 첫 문장을 쓴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쉽게 정리하기로 했다. 글솜씨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니까.
1993년 6월 7일. 이 날은 삼성그룹 전체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날이며 역사적인 기념일로 기록될만한 날이다. 물론 삼성의 창립기념일은 1938년 3월 22일이다. 하지만 삼성이 다시 태어난 날은 1993년 6월 7일이다. 왜냐하면 이날 이후 오늘의 삼성의 모습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2023년 6월 7일. 오늘은 삼성에서 신경영이 시작된 지 딱 30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그런데 삼성에서조차 조용하게 지나가고 있는 이 날은 그냥 그대로 잊혀질 날은 아닌 듯하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꼭 기억해야 되겠기에 텃밭의 촌부가 나서 거칠게라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삼성은 올해로 85주년이 됐다. 백년기업 삼성의 꿈도 15년 후면 실현될 것이다. 전세계 글로벌 기업, 특히 IT기업중 뿌리가 백년이 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실리콘밸리의 맹주 HP가 1939년에 설립되었으니 삼성보다 1년 늦게 100주년이 된다. 물론 IBM은 이미 12년 전(2011)에 100주년을 맞았다. 둘 다 세계기업사에 획을 그은 대단한 기업들이다.
삼성도 이제 15년 후면 100년의 성상을 견디고 살아남은 글로벌기업이 된다. 이른바 세계적인 기업에서 역사적인 기업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삼성은 어떻게 해서 최고의 승부사들만이 살아남는 척박한 글로벌 환경 속에서 천하의 SONY와 TOSHIBA를 제치고, APPLE과 경쟁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대표기업이 될 수 있었을까?
세월이란 것이 대략 30년이 지나면 세대가 완전히 바뀌기 때문에 30년 전부터 시작된 삼성의 대변신에 대해 기성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 스토리, 에피소드들은 완전히 희석된 채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전승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란 놈은 모든 것을 덮고, 엎고, 쓸어버린다. 하지만 누군가 당시 상황을 진술하고 기록해 단지 속에라도 묻어 놓는다면 그것은 후대에 복원된 역사로서 찬연히 빛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에 흘러간 3,000년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史聖 사마천이다. 그 결과 우리는 사마천의 눈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설령 그의 인간적 한계에 의해서 진실이 다소 왜곡됐다 하더라도 그대로 역사로서 굳어져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3년 6월 7일. 도대체 삼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과거의 여러 책자들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부연설명은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삼성 신경영은 사건(?)의 성격이 계획된 사건인가 우연한 사건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후 맥락으로 보면 계획적이었으나 발발한 것은 우연한 상태로 촉발됐다는 이중성을 지닌 측면이 있었음을 밝히고 싶다. 이러한 관점에서 핵심만을 간략히 살펴보자.
시간을 1993년 6월 7일로부터 한 해 전으로 돌아가자. 이건희 회장은 초조했다. 바깥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삼성의 임직원들은 우물안 개구리처럼 국내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기존의 전통적 경쟁에 패러다임 속에 매몰된 경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건희 회장은 1992년 한 해 동안 하루에 잠을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불면의 밤을 보내왔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세계 사태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조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 정치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경제적으로는 GATT체제 붕괴와 WTO체제로의 전환, 사회적으로는 민주화열풍과 극렬한 노사분규, 문화적으로는 1만불시대의 소비자 변화 등이 전방위적으로 일어났던 시기다. 당시 그는 이를 경제전쟁, 기술전쟁, 특허전쟁으로 압축했다.
당연한 것은 그의 활동 영역이 1년 중 3분의 1이상을 해외출장으로 보내며 전 세계에 지도자들, 특히 글로벌 CEO들을 만나면서 대화하고 현지 시장등을 방문하면서 몸소 세상에 펼쳐지는 거대한 변화를 탐지했다. 당시 그는 IOC위원(1996)으로 선임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교류의 폭과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연말이 되면서 "이대로는 도저히 안될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93년 초가 되자마자 이건희 회장은.전 사장단들을 이끌고 미국 LA를 방문했다. 이른바 '먼지가 수북히 싸인 삼성의 가전제품' 이 현장에서 목도되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다음 달에는 동경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동경에 머물며 미국을 압도하는 일본 경쟁력의 원천을 분석했다. 이른바 정부, 기업, 개인(국민)이 똘똘 뭉쳐 국가 경쟁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본의 저력이라는 삼위일체 경영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1993년 3월 22일. 삼성은 기존의 경영체제를 모두 바꾼다. 삼성 창업 55주년 기념일이자 본인이 5년 전 선언한 제2창업의 5주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물론 취임이후 5년간의 경영실적이 2.7배로 성장했지만 이회장은 여전히 불안했다. 따라서 그날 그 행사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과감한 변모와 일신의 선언이었다.
우선 경영이념을 바꿨다. 당시의 삼성을 있게 한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에서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여 인류사회에 공헌한다"는 신경영이념으로 삼성의 안목과 생각의 그릇을 키우고자 했다.
다음으로 전통적인 개념의 삼성정신인 "창조정신, 도덕정신, 제일주의, 완전주의, 공존공영"의 국내적 가치를 "고객과 함께한다. 세계에 도전한다. 미래를 창조한다."라는 삼성인의 정신으로 바꿨다.
삼성의 상징도 종전의 "三星" 한자 로고에서 영문 "SAMSUNG" 워드마크 형태로 새롭게 선보였다. 이제 비로소 회사가 글로벌기업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무명의 삼성이기에 전 세계 공항카트를 모두 삼성로고로 바꿔 버렸다. CI가 수천억 프로젝트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다시 두 달이 흘렀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변화의 분위기가 정리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6월 7일, 삼성전자 임원들을 프랑크푸르트에 불러 모았다. 본인의 미래 경영전략의 핵심인 삼성의 국제화, 다시 말해 글로벌화에 대해서 강연을 시작한다.
신들린 듯한, 마치 사자후를 통하는 것같은 새로운 개념의 용어와 개념, 스토리와 사례, 그리고 촌철살인의 메시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삼성이 놀라고 국가가 놀랐다. 언론은 대대적인 보도를 계속했다. "삼성이 이상하다." "내부에 무슨 심각한 일이 발생한 것 같다." MBC는 이례적으로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강연을 무편집으로 단독보도했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사태(?)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사태의 이면에는 두가지의 사건 포인트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당시 이회장이 모셔온(?) 일본 고문의 삼성비판 보고서였다.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라고 알려진 '경영과 디자인'이라는 제목의 50쪽 내외의 보고서였고, 다른 하나는 삼성의 사내 방송(SBC)에서 최초로 기획한 이른바 몰래 카메라 형식의 품질 진단 3부작 방송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삼성 경영에 폐쇄적이고 내부지향적이고 관료적인 행태를 꼬집은 '품질 진단'은 삼성의 제품수준이 세계 2류도 안되는 3류 수준임을 현장고발을 통해 그대로 보도한 것이었다. 이른바 현장 직원이 세탁기 뚜껑을 칼로 2mm나 깎는 장면이다. 뚜껑이 닫히지 않아서다.
우연히 이 영상을 접한 이건희 회장은 "내가 속았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바꾸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당초 국제화 중심의 혁신전략이 (품)질경영 중심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삼성 신경영은 대략 1년 동안의 혼란기를 거쳤다. 무엇보다도 무려 350시간에 달하는 방대한 강연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큰일이었고 다음은 그렇게 정리한 내용을 어떻게 임직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느냐 하는 전파의 문제가 두 번째였다.
우선 A4지 8,400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200페이지 단행본 책자 한 권으로 정리했다. 그 표지에는 전체 메시지를 한 페이지로 보여주는 도표 모델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자를 10만부 찍어서 전임직원에게 배포했다. (이후 청와대의 요청으로 10만부를 추가 인쇄하여 정부기관에 제공했다.) 기능적 사원들과 같은 인력들을 위해 좀더 쉽고 재미있게 하기 위해 당시 최고의 만화가 이원복씨에게 부탁해 만화 삼성 심경영을 제작 배포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건희 회장은 탁월한 사상가요 개념설계자다. 그가 기업가로서는 드문 경영철학자요 사상가라는 것을 소수이긴 해도 아는 분들은 잘 알고 있다. 그의 강의를 들어보라. 난해한 용어와 심도있는 개념들이 끊임없이 즐비하게 나온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업의 개념, 경영자는 종합예술가. 구매, 용역의 예술화, 전략적 기회경영, 발상의 전환, 입체적 사고, 위기의식, 마하경영, 복합화철학, g당단가, 사물의 본질 등 심도있는 개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용어집에 수록된 개념만 수백 개에 이른다. 과거 기업 역사를 새롭게 쓴 무수한 세계적 경영자들 중에서도 본 적이 없다.
1994년이 되어 비서실이 제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경영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혁신을 시작한다. 연구개발 분야는 장기 투자, 미래 핵심기술 개발, 선진 제품 비교전시회 등으로 움직였다. 제조 생산 분야는 라인스톱, 불량 제거, 최고의 품질확보 등으로 전개했다. 마케팅 분야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 전략과 최고급 디자인센터를 신설했다.
스텝부문의 혁신도 대단했다. 인사부문은 신상필상의 가점주의 인사, 팀제 도입, 핵심인재 양성, 사원 복리후생의 획기적 업그레이드, 재무쪽은 큰 관리, 방어형 관리에서 공격적 관리로의 전환 등으로 어마어마한 경영혁신이 전방위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필자는 업무특성상 오랜 동안 여타 글로벌기업들의 경영전략과 최고경영자의 행보를 꾸준히 연구하고 조사해 왔다. 이를 빠른 시간 내에 그룹에 전파해야 하는 임무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실무간부였던 시각과 경험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3인칭의 외부전문가적 관점에서도 삼성 신경영은 실로 당시 기준 세계 최고의 경영혁신 운동이라고 평가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단언할 수있다.
다만 당시 삼성의 글로벌 지명도가 약하고 여전히 미국, 일본 중심의 경영기법이 세계를 지배하던 터이라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것은 글로벌 2류 기업이 1류를 넘어 초일류에 도전하겠다는 놀랍고도 무모한 도전(Bold Challenge), 장기 비전을 추구하기 위한 초장기적 플랜(Far Forward Looking), 임직원의 영혼을 하나로 해서 함께 만들자는 호소(Inspiring People)와 최고의 기업을 통해 임직원의 평생직장과 최고의 처우를 약속하는 엄청난 내용들이 모두 탑재돼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당시에 책자로 다 공개된 바라 가필과 수정이 있을 수없고, 잘하고 못한 것, 하기로 하고 하지 않는 것들을 당시의 수십만의 직원들이 다 기억하고 있을 터이니 조금도 과장하거나 미화할 수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를 말로만 했을까. 그렇지 않다. 세계가 깜짝 놀랄 프로젝트들이 메가 항목으로 보면 100개 이상, 대형 프로젝트로 보아도 1,000개 이상으로 추산한다. 그중 한 예가 지역전문가 제도다. 90년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 7,000명 가까이 보냈다. 직원을 전세계각국에 1년동안 업무없이 자율적으로 연수보내는 제도로 매년 평균 200여명을 30년이상 꾸준히 보낸 셈이 된다. 해외MBA나 다른 종류의 해외학술연수는 모두 빼고다. 필자가 차장이 되어 파견된 95년만 해도 함께 나간 인원이 360명 정도로 기억한다.
전세계 어떤 기업이 인재양성에 이렇게 투자할 수있을까. 이런 류의 프로젝트를 취합하자면 최소 수백개에 이를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지만 경영은 더욱 그렇다.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나의 전략 과제, 혁신 프로젝트가 열매를 맺어 성과로 표시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스며 들어야 하는지 말이다. 마치 기업을 먼산 바라보듯이 하며 아무나 경영해도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하지만 삼성 신경영은 93년 이후 5년을 지속하다 IMF사태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경제 위기에 직면하여 큰 도전과 위기를 받게 된다. 그 이후, 세기를 넘겨 삼성 신경영의 두 번째 웨이브가 2000년대 초반에 다시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다음 호에서 계속 살펴 보기로 하자.
신태균 (전 삼성 인력개발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