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순이라는 19세 여성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2월 9일 군 첩보부대에 채용되어 군사비밀을 처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
군 첩보부대의 후신인 정보사령부는 2009년 2월 20일 유족에게 그녀의 전사확인서를 발부하면서 소속 ‘육군 제4863부대’, 신분 ‘특수임무수행자’로 기재하고, ‘1951. 12. 31. 특수임무 수행 중 ○○지구에서 전사하였다’라고 통지하였다. 정보사는 2009년 2월경에 그녀에 관하여 전공사상 심의를 하면서 그녀의 첩보부대 근무 사실은 제대로 확정하였지만, 나머지는 인사기록 등을 확인할 방법이 없자 어림치로 전사 일자를 특정하였던 듯하다.
그런데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은 그녀의 소속과 사망 시기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내어놓았다. 보상지원단은 그녀가 한국군 첩보부대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녀는 1951년 12월 31일 사망한 게 아니고 그 후에 미군으로 소속이 변경되어 첩보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고 본 것이다.
정보사는 위 보상지원단의 결정을 고려하여 재조사하고 새로운 결론에 이른다. 그녀는 입대 후 1951년 11월까지는 대한민국 제4863부대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대장 김기두 소속 대원으로 근무하였는데, 하루는 부대원들과 함께 임무 수행에 나섰다가 본부와 통신두절되어 고립 위기에 처하였다. 다행히 미군 극동 공군사령부 소속 최봉삼 무장대장 팀에게 구출되어 송도 기지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수집한 첩보를 제출하여 그 공을 인정받았다. 그 후 미군 극동사령부 직할 특수첩보부대 중 하나인 호염부대로 소속을 전환하여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953년 7월 평북 철산군 근해의 순도라는 섬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전사하였다.
결국 그녀는 더 오래 살아남아 있었고, 미군 첩보부대와 함께 더 많은 전과를 올린 셈이다. 당연히 종전보다 예우가 좋아져야 할 듯한데, 엉뚱한 결과가 초래된다. 그녀가 미군에서 근무하였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군 소속이 아니라 미군 소속이므로 한국군임을 전제로 발급된 전사확인서를 회수하고 대전현충원의 전사자 명단에서도 삭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한국군 전사자에서 배제된 그녀가 미군 전사자로 인정되었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족들은 당연히 반발하였다.
한창 미래에 대하여 꿈을 키울 19세의 나이에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젊음을 만끽하지도 못하고 사지를 넘나들다 21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여성의 몸이라 굳이 최전선에 나갈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마다하지 않고 나섰다. 그런데 70여 년이나 지나 먹고살 만해진 나라가 규정을 예리하게 적용하면서 전사 처리 여부를 따져 불이익을 준다면 참 야속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관련 자료가 소실되어 모든 퍼즐을 정확히 맞추기는 어렵다. 그래도 그녀가 특수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한 사실은 분명하다. 그녀의 소속이 미군으로 전환되었다고 하지만 그녀가 한국군을 탈퇴해 미군으로 재입대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통제권 아래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작전하였던 사정을 고려하면 한국군 첩보부대원이 원소속을 유지한 채 미군에 파견되는 것은 얼마든지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만연히 미군 자원으로 평가하여 한국군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과하다.
유족은 그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국민권익위원회는 이러한 유족의 고충민원을 받아들여 그녀가 한국군으로 특수임무 수행 중 전사한 사실에 관하여 관계부서가 다시 심사할 것을 ‘의견표명’하였다. 보훈의 달에 전쟁 중에 산화해간 젊었던 선대를 기억해 보았다.
김태규 부위원장(국민권익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