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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만나는 법] 허영 경희대 로스쿨 석좌교수, "정치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법적 정의가 바로 서야"
김도언 시인(소설가)
2023-09-18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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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상한 허영 석좌교수는 1936년 충남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경희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1년 독일 뮌헨대학에서 헌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5년 독일 본 대학교 교수로 임용됐으며 1978년 독일 바이로이트 대학교 교수를 거쳐 1982년부터 연세대 법대 교수로 재직했다. 1996년 한국공법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헌법재판소 자문위원회 위원, 법무부 정책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2011년 헌법재판소 초대 헌법재판연구원장에 임명됐다. 2013년 퇴임 후 경희대 로스쿨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정의는 법적인 정의 하나만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법은 정의를 추구한다고 해도 모든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정치는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허용해도 된다는 식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정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허영 교수(87)의 첫인상은 장고의 세월을 겪으면서 오히려 분진이 맑게 씻긴 대리석 본존불을 보는 것 같았다. 세수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반듯한 매무새에 딕션마저 뚜렷했고, 말의 논리는 그대로 받아 적으면 문장이 될 정도로 정연했다.  

 

필자가 논현동의 작은 아파트 한 칸, 집 가까운 곳에 마련해둔 그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허 교수는 헌법을 일반 대중들에게 좀더 쉽게 설명하는 책을 쓰고 있었다. 조명은 다소 어두웠고 그의 깔끔한 성격을 반영한 듯 서가와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반짝였다.

 

우리나라 헌법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라는 허영 교수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인근의 금산으로 이사해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전에서 중고등학교를 수학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 입시를 앞두고 당시로서는 위중한 병으로 알려진 폐결핵이 발생해 공부에 몰두하지 못했다고. 그럼에도 경희대 법대에 특대생으로 등록금과 학비 전액 면제를 받고 입학한다. 그러곤 대학 졸업 후 잠시 교단에 섰다가 1960년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독일 유학을 감행한다. 그런 담대한 도전정신과 기개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산골에서 자랐는데, 어렸을 때 근처 무량사에 자주 놀러 갔어요. 그리고 뒷산에 금지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날씨 좋은 날 그 절에 올라가면 장항과 군산 제련소, 그리고 그 너머 바다가 보였어요. 그때 바다를 처음 본 거죠. 그게 매우 인상 깊었어요.”


산골에서 태어난 영민했던 소년이 산정에서 보았던 바다, 그리고 고찰의 위엄과 정기 같은 것이 심상하지 않은 인사이트와 호연지기로 그의 영혼을 내습한 것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는 진술이다. 그가 법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독일 유학에 얽힌 사연도 당시의 시대상과 더불어 흥미롭다.


“고등학교 때 신익희 국회부의장, 정일형 박사 등의 강연을 인상 깊게 들었는데, 그 무렵 유진오 선생이 쓴 <헌법해의>라는 책을 우연히 사서 읽었어요. 아마 그게 동인이 되어서 정치와 법에 관심이 생긴 것 같아요. 아버지도 법학 공부를 권하셨죠. 그래서 특대생으로 대학에 갔는데 학비와 등록금 면제, 기숙사비 및 생활비 지급, 졸업 후 유학. 이게 입학 조건이었어요. 그런데 졸업을 하니 유학을 안 보내주고 대학부설 경희여고에서 교사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부터 독일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탓에 독일어 공부를 해둔 저는 거기서 독일어 교사를 했어요. 그러다가 5.16 후 징집돼 논산훈련소 수용연대에 있다가 어학사병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군사정보부대에 배속이 됐죠. 당시 한 집안에서 아들 셋이 군복무를 하면 한 사람을 제대시켜줬어요. 그래서 두 동생이 저를 위해 입대를 해서 제가 제대를 하게 됐어요.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제가 교사 월급을 받아야만 했거든요. 그런데 대학에서 계속 유학 허락을 안 하는 거예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독일대사관 독일학술교류처 장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해 합격해서 비로소 유학을 가게 됐죠. 1966년 3월, 독일공항에 도착하니까 학술교류처 직원이 독일 시골 마을에 있는 괴테 인스티튜트에 보내 어학공부를 시키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다른 학생들은 중급까지만 마쳐도 되는 과정을 최고급과정까지 다 마쳤어요. 법학 공부를 하고 논문까지 쓰려면 어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지금도 그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륙법의 본거지인 독일에서 장래 헌법 연구 권위자로 성장하게 학인이 탄생되는 첫 장면이다. 그는 뮌헨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연구 실적과 실력을 인정받아 현지의 본대학교와 바이로이트 대학 교수를 거쳐 1979년 모교인 경희대 교수로 금의환향한다. 그러곤 1981년 법과대학을 독립시킨 연세대 교수로 스카우트되는데, 모교와의 의리 때문에 당시 경희대학교 총장과 아내와 긴밀한 상의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헌법학자로서 그는 현행 대한민국 헌법이 가장 간과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고 있을까.


“예전에는 헌법이라는 것이 국가주의 이념이나 권력구조를 강화하는 데 쓰인 게 맞아요. 그런데 제가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그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헌법을 그렇게 봐서는 안 되고 헌법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규범이다. 개인의 인권, 국민의 기본권 중심으로 헌법을 봐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고 그런 책을 처음으로 썼죠. 헌법철학이라는 말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저의 헌법철학인 셈이죠.”


부연 설명을 요청하며 현행 헌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면 어떤 부분을 손대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막힘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현행 헌법이 탄생되는 데는 87항쟁이라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잖아요. 장기 독재를 막고 인권 탄압 여지를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대통령 단임제를 못박고 헌법재판소도 설치한 것인데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자는 집권을 하면 책임정치라는 의미에서 국민들로부터 심판을 받을 기회를 갖는 게 맞아요. 그런데 단임제는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나몰라라 식의 무책임한 정치를 방조하게 되거든요. 이건 민주주의 이론상 맞지 않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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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교수는 퇴임 후 2011년 헌법재판소에 설치된 헌법재판연구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법령에 의해 설치된 후 꾸준하게 위상이 높아진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


“헌법재판소가 그동안 헌법의 가치를 지키는 데 많은 기여를 한 건 사실이지만, 대법원장이 사실상 헌법재판소 재판관 세 명을 천거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지금 현실에는 맞지 않아요. 애매한 규정 때문에 근년 들어 심심찮게 대법원과 헌재 간 위상 싸움이 발생하고 있잖아요. 헌법소원제도의 운영도 중요한데, 국민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게 행정권이에요. 행정권으로부터 이익을 침해받았을 경우 헌법소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법령으로는 행정소송부터 해서 거기서 구제를 받으라고 해요. 그런데 행정소송에 구제를 받지 못하면 헌재로 사건을 가져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한 것도 문제예요.”

 
허 교수는 초대 헌법재판연구원장으로 재직한 2년 동안, 헌법재판소 내 헌법재판관들의 심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연구를 수행해서 자료를 제공하는 기관 본연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만 해도 법률이 위헌이냐 아니냐를 따질 때 애매하게 적용하던 위헌 심판의 범위와 대상을 분명하게 정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당시 이강국 헌법재판소장도 연구원의 조력에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이번에는 허 교수에게 헌법 전문가이자 원로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정의의 방향과 성격 등에 대해 물었다. 질문의 내용 속에 트릭처럼 지난 몇 년 동안 법적 정의가 소위 정치적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에 위축되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개인적 의견을 섞어 넣었는데, 의외로 강한 소신 발언이 나왔다.


“저는 정치적 정의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정의는 오로지 법적인 정의만 존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법은 사회적 상식에 기반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정의는 법적인 정의 하나만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법은 정의를 추구한다고 해도 모든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정치는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허용해도 된다는 식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정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허 교수는 물경 60년 가까이 헌법 연구에 매진해온 석학이다. 그 세월 동안 한국의 법조 생태계가 진화하는 걸 누구보다 유심히 지켜보았으리라는 건 불문가지일 터.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넘은 현 시점에서 혹여 눈에 들어온 이 시스템의 맹점과 한계가 있다면 짚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추상 같은 비판의 언술이 쏟아졌다.

 
“사법시험 제도를 없애고 로스쿨 시스템을 도입한 건 잘한 것인데, 설계를 잘못했어요. 먼저 로스쿨 도입 이후, 법학이라는 학문이 죽어버렸어요. 다들 법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급급해요. 법학을 하는 학자가 나올 수 없는 환경이 돼버렸어요. 예컨대 로스쿨에서 변호사시험 과목이 아닌 과목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요. 개설해봐야 폐강되거든요. 헌법의 깊은 이론을 공부하는 게 아니고 ‘수험법학’이라고 해서 판례를 암기하는 게 지상목표인 거예요. 출제자나 학생들이나 모두 기능 위주로만 흘러가는 거예요. 로스쿨을 도입한 배경에는 학교에서 실무를 가르치겠다는 합의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유명무실화 됐어요. 지금은 변시 합격 후 로펌에 가서 연수를 받는데, 그것도 효과가 미지수예요. 그 대안으로 저는 로스쿨 3년 동안 1학년 마치고 2학년 때부터 방학을 이용해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실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변호사 숫자가 많아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양질의 변호사가 많아지는 게 중요하니까요.”


공교롭게도 지금은 사법부 수장의 교체기다. 최근 새 대법원장도 지명됐다. ‘사법부의 독립’은 우리 사회의 해묵은 아젠다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얼마나 실현된 것일까. 이에 대해 가감없는 입장 표명을 부탁했다. 실명 비판이 나왔다.


“정치의 사법화라는 말이 있지만 근년에는 사법의 정치화가 심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국민 누구도 법원의 판결에 대해 납득하질 않고 있어요. 법원 결정을 국민이 수용하려면 판결의 설득력이 중요한데데 그 설득력이 확보가 되질 않아요. 설사 패소를 하더라도 설득력이 완미하면 수긍하게 되는 거거든요. 사실 대법원장이라면 사법부를 외풍으로부터 막고 구성원을 지켜야 하잖아요. 그런데, 김명수 대법원은 오히려 법원 구성원을 정치권에 내맡긴 적이 있잖아요. 그래서 보편적으로 듣는 얘기가 지금 대법원장이 역대 최악이라는 말이 있어요.”


유신 시절 대법원이 사법살인이라고 불린 만행을 공모한 적 있으니, 여기서 ‘역대 최악’이라는 말은 현 대법원 비판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레토릭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허 교수는 현 정치권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법과 제도는 계속 정비되는 반면 한국 사회 각계 구성원 간의 갈등이 심화된 원인을 묻자 정치인들의 책임이 절대적이라고 했다. 군사독재라는 우리 사회의 공적이 있을 때는 온 국민이 독재 타도를 위해 내남없이 싸웠는데, 그 적이 없어지자 정치권이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기 위해 없는 적을 발명하고 서로 상대편을 악마화했고, 그 과정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양대 정치 세력이 지지자들에게 계속 자기들의 적을 맹목적으로 적시하는 방식으로 정치의 과잉을 획책하고 유지한다는 것이다.


정치권과 사법부 비판을 포함, 그냥 묵과하기 힘든 우리 사회의 폐단을 말할 때 그의 어조는 차분하고 낮았지만 그 논리는 삼엄하고 선명했다. 원로로서의 비상한 책임감과 소신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런 허 교수를 최근 대한변협이 한국법률문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늦은 감은 있으나 아주 잘한 일이다.


그는 군대 주특기 분류 번호와 군번까지도 외울 정도로 여전한 기억력과 흐트러짐 없는 체력을 보여주었는데,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로는 매일 아침 여섯 시 반부터 어김없이 피트니스에 가서 하는 운동을 꼽았다.


그와 인터뷰를 마치면서 간만에 존경을 해도 좋을 만한 어른을 만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랜 회의와 궁리로 추슬렀을 지성과 육체적 강고함이 한 사람을 크고 자유롭게 하고 있었다.


김도언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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