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古稀)를 훌쩍 넘은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워커홀릭에 가깝다. 청년 변호사 못지않게 왕성하게 활동한다. 올해로 법조인 경력 54년째인 심훈종(76·고시 10회) 서울북부지법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이다. 심 변호사는 2004년 67세의 최고령으로 국선전담변호사에 도전해 7년 동안 자신이 맡은 사건의 3%에 가까운 65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1심 사건의 평균 무죄율이 1% 미만인 점을 감안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성과다. 지금은 법원의 요청으로 상임조정위원으로 일하면서 한 달에 50건이 되는 조정사건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한 시간 단위로 잡혀 있는 빠듯한 조정기일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에게 ‘이제는 일을 쉬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느냐’고 묻자 “일을 해야 건강해진다”는 답이 돌아왔다. |
67세 은퇴 고민하다 최고령 국선변호인으로
매월 25건 처리… 7년간 무죄판결 65건 받아내
‘교도관 폭행’ 사형수의 감사 편지에 가장 감동
2004년 은퇴를 고민하던 심훈종(76·고시 10회·사진) 변호사는 국선전담변호사로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변호사 수가 급격히 늘어나 변호사 업계에도 경쟁이 심해지자 후배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였다. “우연히 국선전담변호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습니다. 지금이야 국선전담변호사 인기가 높지만, 당시에는 변호사들이 국선을 피했지요. 은퇴 전에 마지막으로 봉사할 생각으로 지원했습니다.”
2004년 67세에 최고령으로 선발돼 시작한 국선전담변호사를 7년6개월 동안 계속했다. 그는 국선전담변호사로 한 달에 25건을 맡아 처리했다. 사선 변호인으로 일할 때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받아낸 65건의 무죄 판결 기록과 피고인들에게서 받은 감사 편지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가장 기억나는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피고인이 저지른 교도관 폭행 사건을 꼽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수감자는 교도소 안에서 몇 번의 폭행사건에까지 연루됐다. “어느 날 다른 사건으로 법정에 들어갔는데 재판장이 제게 와야 할 편지가 재판부로 도착했다며 편지를 건네줬습니다. 열어보니 사형수가 보낸 편지더군요. 다른 변호사들은 사형수인 자신을 벌레 보듯 했는데, 유일하게 저만 인간적으로 대해줘 정말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제게 편지를 보낼 방법을 몰라 ‘서초동 1701-1번지 형사14단독’ 앞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사형수라고 해서 자포자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 전부였을 뿐인데, 피고인이 고맙다고 편지까지 보내오니 오히려 제가 더 큰 감동을 받았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베테랑 국선 변호인’이지만, 황당한 일을 당한 경험도 있다. “제가 변론을 잘못해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니 벌금을 대신 내라는 피고인도 있었습니다. 제가 내주지 않자 변호사회에 진정까지 넣었죠. 아무리 성의를 갖고 일해도 그 성의가 다 통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래도 정성과 성의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포기하면 안 되지요.”
법조 경력 50년이지만, 처음부터 법조인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를 법조인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6·25 전쟁이었다. 심 변호사는 학창시절을 전쟁과 함께 보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원하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르면서 전학만 5번을 해야 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청주의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가게 되면서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감시자가 없으니 거의 수업도 안 들어갔어요.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지요. 그런 와중에도 첫 성적이 60명 중 59등이었던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성적표를 찢어버리기도 했죠.” 다시 공부를 시작한 건 서울 수복 후 본가로 돌아왔을 때였다. 원래 계획대로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학교에 복학하려 했지만, 전쟁으로 입학기록이 사라지면서 그럴 수 없게 됐다. “혼란한 시절을 지내면서 어쩌다 보니 사범학교를 포기하고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어요. 6·25가 아니었다면 사범학교를 무난하게 졸업하고 교사를 했겠죠. 50년 동안 법조계에 몸담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운명이란 게 참 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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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꿈은 교사… 6·25 전쟁 겪으며 법대 진학
‘민청학련사건’ 재판은 가슴 아프고 슬픈 역사
피고인들 묵비권행사에 “법정투쟁 하라” 권유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한 심 변호사는 3학년 때 고시에 합격해 1962년 판사로 임관했다. 전쟁은 지났지만,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절에 배석판사로 일할 때는 어려움을 모르고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부장판사가 되고 나서 책임감으로 인한 부담이 컸다. 시국사건 재판 때문에 회의도 느꼈다. 민청학련 사건이 대표적이다. 최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김지하 시인도 심 변호사에게 재판을 받았다.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정말 어려운 재판 중 하나였어요. 피고인이 20명 정도 됐는데 재판 절차에 전혀 응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성명과 주소를 물어봐도 대답하는 피고인이 없었죠. 피고인들을 판사실로 불러 설득을 했습니다. 무조건 재판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법적 투쟁을 하라고 권유했죠.”
그러면서 심 변호사는 피고인의 모든 재판 진술을 기록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적어도 기록이 남아 있어야 이들의 투쟁이 역사의 판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시에는 재판의 전 과정을 그대로 기록에 남기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주장의 요지만 간략하게 기록하는 것이 전부였어요. 하지만 민청학련 사건에서는 기침 소리까지 재판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했죠. 하나의 슬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77년 변호사 개업… 대학동기 3명과 합동사무소
30년간 동고동락… 현재 ‘법무법인 우일’로 성장
지금은 분쟁 조정자로… 쉬게 되면 유럽여행이나
판사로 능력을 인정받으며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그였지만 1977년 사직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장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석진강(74·고시 11회), 송영욱(76·고시 13회) 변호사와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다. 개업 전 석 변호사는 대검 특별수사부 과장으로 일하면서 ‘특수통 부장검사’로 이름을 알렸다. 소아마비를 이겨내고 고시에 합격한 송 변호사도 변호사 업계에서 실력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대학 동기들인데 판사 생활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중 셋이 함께 사무실을 차리기로 했죠. 법무법인이라는 것이 없을 때였는데 최초의 합동 사무실을 꾸리게 됐지요. 법원, 검찰, 재야에서 주목을 받던 동기생들이 합동 사무실을 차린다는 소식은 당시 법조계에서는 상당한 화제가 됐습니다.”
이렇게 차려진 것이 ‘정화(鼎和) 합동법률사무소’다. 솥발 정(鼎),즉 솥을 받치는 세발처럼 셋이 함께 안정감 있고, 화(和)합하며 조화롭게 운영하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셋이서 일하면서 장부를 본 일이 없습니다. 수입을 똑같이 나누고 계산 없이 일했기 때문에 30년 동안 함께 사무실을 운영할 수 있었죠.” 현재 정화는 법무법인 우일로 이름을 바꾸고 규모가 커졌다.
판사에서 변호사를 거쳐 수십 년을 보낸 심 변호사는 이제 분쟁해결의 조정자로 활약하고 있다. 국선전담변호사의 인기가 높아지자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국선전담변호사 지원을 그만둔 것이다. 그러나 법조계는 일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법원이 나서 조정위원으로 활동해 주길 요청한 것이다.
그는 현재 서울북부지법 상임조정위원으로 활동하며 여전히 사건 기록을 검토하고 있다. “은퇴 후 계획은 아직까지 없어요. 일 할 생각을 하다 보니 그 후의 일까지는 생각을 못했네요. 내 나이쯤 되면 유럽을 못 가본 사람이 없는데 나는 일하느라 아직도 유럽을 못 가봤어요. 만약 쉬게 된다면 유럽을 돌며 자유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떨까 생각하게 되네요.” 법조인으로서 봉사하고 재능기부를 해 나가는 그는 아직 은퇴 계획이 없을 정도로 일을 즐기고 있다.
글=신소영 기자, 사진=백성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