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봄날,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를 탔다. 이름조차 생소한 작은 고을에서 나는 변호사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서울에서도 멀고 내가 자란 고향과는 백두대간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그 곳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사무실을 나서면 조용한 거리, 조금 더 가면 만날 수 있는 시냇가와 울창한 숲, 겨울이면 마당에 소복이 쌓인 눈은 그림이었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무슨 분쟁이 있을까. 과연 누가 날 찾아올까. 그런데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무슨 일로 오셨냐는 나의 질문에 백발의 할머니는 “폭폭해서 왔지”라고 대답하셨다. 변호사를 만나려는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사실관계를 서면으로 정리하고 관련 서류도 갖추어서 오리라 기대했는데, 서류는 고사하고 폭폭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을 말해보라는 나의 추궁에도 할머니는 가슴을 치며 폭폭하다고만 하셨다. 폭폭해서 왔다는 게 무슨 말인가. 칙칙폭폭 기차를 타다가 문제가 생긴 것일까.
그러다가 주섬주섬 종이뭉치를 꺼내시기에 “진즉 서류를 주시지 그러셨냐”고 한 마디 한 뒤 빼앗아 읽었다. ‘기록’을 보면서 질문을 드렸더니 할머니는 자신이 가지고 온 기록의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사건기록조차 읽지 않고 찾아온 의뢰인의 무성의함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마음먹고 훈계를 했다. “할머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을 하셔야 도와드리죠. 그리고 본인 사건 기록인데 읽고 오셔야죠. 이건 기본이예요.” 그러자 돌아온 대답, “아이고. 폭폭해 죽겄네. 그리고 나는 글을 모르는디…. ”
할 말을 잃었다. 옆에서는 지금 내 마음이 바로 ‘폭폭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첫 번째 사투리를 배웠다. “할머니, 폭폭하시죠? 죄송해요”라고 사과를 드린 뒤 - 기록과 개념적 사고는 잠시 접어두고 - 큰 목소리로 어설프게 사투리를 따라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법의 여신은 “너는 사실을 말하라, 나는 권리를 주리라(Da mihi factum, dabo tibi ius)”고 말했다. 그런데 나에게 온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조차 제대로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는 분들이었고, 그래서 찾아온 것이었다. 감히 법의 여신 행세를 하려했던 나의 교만함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의뢰인을 보며 외쳤다. "그냥 그 자리에 있어줘, 사실은 내가 말할게."
박종명 변호사 (법무법인 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