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송에서 연달아 패소했다. 사건의 종류는 다양했다. 기가 막힌 것은 모두 ‘당연히 이길 사건’이었는데 ‘전부패소’를 했다는 사실. 한 번 지는 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부턴 마음이 흔들렸다. 직원의 실수가 떠올랐다. 계속 보채면서도 내 요청에는 비협조적이었던 의뢰인이 원망스러웠다. 재판부가 선입견에 빠져 불공정하게 재판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재판과정을 머릿속으로 복기할수록 후회와 원망과 증오가 커졌다.
법원 가는 길 위에서 또 패소 소식을 들었다. 다리에 맥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쌍불’을 면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결국 재판에 출석은 했지만 멍하게 있다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하고 겨우 돌아왔다. 이제는 더 원망할 대상도 없다. 어떤 사건을 맡든 나는 다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내가 이 길에 잘못 들어선 까닭이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다시 태어나면 딴 길을 가리라.
아니, 지금부터라도 다른 일을 알아봐야겠다. 이제는 마음이 한결 가볍다. 더 이상 사건과 승패에 시달릴 필요가 없으니 지난 세월 돌아보아도 화가 나지 않았다. 다시 사람 박종명이 되어 변호사 박종명의 패배사를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러다가 패소사건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선고가 다가올수록 불안해하다가 전날은 잠 못 자고 당일엔 초조하게 좋은 결과만 기다렸던 날은 어김없이 패소였다. 반면, 어차피 결심 후에는 변호사가 할 일이 없으니 다른 일에 열중하다가 선고결과를 듣고서야 ‘참, 오늘이 선고였지’하는 날은 승소였다.
사건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엄마처럼 의뢰인을 사랑하면서도 원수보다 냉철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변호인의 따뜻한 공감은 수렁에 빠진 의뢰인이 다시 일어설 힘을 주고, 차가운 지성은 의뢰인이 성찰하도록 만든다. 오직 이기고 또 이기기만을 바랬던 나는 내 감정(flood of emotion)에 빠진 나머지, 사랑도 논리도 머물 곳이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선고 전날 ‘내가 옳기에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 마음이 바로 ‘패소예감’이었다는 것을.
여전히 일희일비하는 불안정한 영혼이지만, ‘내가 옳다는 확신’과 싸우며 다시 고객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기에 ‘기왕 들어선 이 길’을 조금 더 가보기로 했다.
박종명 변호사 (법무법인 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