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심리학의 정설이다. 심리학자 김경일은 “심리학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였다. 심리학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인터넷 게시판에 인간관계의 갈등을 호소하는 글이 올라오면, 지혜로운 댓글이 종종 달린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음주운전 재범률이 45%라고 하는데, 적발되지 않는 비율도 있을테니 심란한 상황이긴 하다. 50년째 결혼 생활 중인 우리 어머니도 종종 자식들에게 '너희 아버지'의 ‘한결같음’에 대해 분노를 토로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쯤 되면 그냥 받아들이고 체념할 명제가 아닌가 싶다. 유전자가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사람은 변한다. 종종 있는 일은 아니나, 변한다. 사도 바울은 원래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던 바리새인이었다. 바울이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우연히 만나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정식으로 컴플레인까지 받았으니 안 변하기가 어렵긴 하겠다. 그렇다고 선교를 위해 로마제국 전역을 돌아다니거나 신약성서 절반을 집필하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인류 역사 급의 드라마틱한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개심(改心)과 대오각성의 사례는 적잖이 발견된다. 마음을 다잡고 습관을 고치고 삶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독일 영화 '타인의 삶(2006)'은 이러한 사람의 ‘변화’와 변화의 ‘계기’를 다룬 영화다. 구 동독 국가보안국의 간부가 반체제 인사로 지목된 예술가 부부를 도청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에 빠진다. 흔들림 없던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에 균열이 생기고, 감시 대상으로부터 감화를 받아 서서히 변해간다. 그 끝에 결단을 내리고,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이 변화가 주는 감동은 크고 깊다.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성격이나 기질을 바꿀 수는 없다. 그래도 사람은 반성하고 노력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모습을 희망하는 존재이다. 직업인으로서 변호사가 갖는 장점이기도 하다. 노력하면 발전하고, 애쓰면 성장한다는 단순한 진리가 어느 정도 통용된다.
어차피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 선택하기 나름이다.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감동을 받는 쪽으로 걸겠다. 타인의 변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되, 자신의 변할 수 있음을 등불로 삼아 이 냉소의 바다를 여행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돌연 생각해보니, 어머니가 그런 말씀도 하셨던 거 같다. '너희 아버지'가 그래도 예전보다 말도 잘 듣고 많이 좋아진 편이라고.
장품 변호사 (법무법인(유) 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