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최민식이 보여준 최고의 연기는 아무래도 <파이란>(2001)의 ‘강재’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강재(최민식)는 미성년자에게 성인비디오를 팔다가 걸려 구류를 살고, 동네 오락실에서 죽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3류 건달이다. 싸움도 못하는데 마음까지 약해서, 가게에 수금하러 갔다가 주인 할머니한테 쥐어 터져서 돌아오고, 새파란 후배들한테는 “강재씨”라고 놀림당하기 일쑤다. 심란하기 그지없는 강재의 인생은, 보스를 위해 살인 누명을 쓰고 대신 자수를 결심하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그 와중에 강재는 위장결혼을 했던 중국인 ‘파이란’의 사망소식을 통보받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내’의 장례식에 ‘남편’ 자격으로 방문하면서 조금씩 인생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강재가 부둣가에 앉아 파이란이 남긴 편지를 읽고, 떨리는 손으로 담뱃불을 붙이다가 오열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파이란은 낯선 이국 땅에서 마음 기댈 수 있게 해준 강재에게 고마워하며 말한다. “강재씨가 가장 친절합니다.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시궁창같이 느껴졌던 인생이 불현듯 가치 있어지는 순간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브레히트의 시가 떠올랐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그대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조심하며 걷는다. 그것에 맞아 죽어서는 안 되겠기에” 어쩌고 하는 유명한 시다. ‘친절한 강재씨’와 이 시가 왜 같이 연상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타인의 인정에 부표처럼 휘둘리는 얕은 자존감 때문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감동에 대한 열망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건,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내 삶이 귀하게 느껴지는 건 다툼 없는 사실이라 믿는다.
우리 일이라는 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버거울 때가 많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은 회의도 적지 않게 든다. 두꺼운 기록과 복잡한 사건을 머리 속에 담은 채 한 시간 넘게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새벽 막차를 타고 퇴근할 때 종종 드는 생각이다. 집에 오는 길이 너무 길어 더욱 더 지치고,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좁은 욕조 속에 몸을 누이고 싶기도 한 그런 기분이랄까. 아무튼 그럼에도 가끔 긍지와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으니, 그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 누군가가 내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순간일 가능성이 높다. 변호사라는 직업의 가치가 사건과 사람을 떠나 존재할 수 있으랴. 이 사소한 의미 부여 하나가 마음을 울린다. “당신은 친절한 사람”이라는 한마디가 강재를 부둣가에서 하염없이 울게 한 것처럼.
장품 변호사 (법무법인 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