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치렀던 2004학년도 수능 언어영역 시험에는 시인 백석의 '고향'이 출제 되었다. 객지에서 진료를 받던 이가 의원의 맥을 짚는 따뜻한 손길에서 어렸을 적 고향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그 내용이 너무나도 공감되어 고3수험생이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시는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되기 때문에, 한 편의 좋은 시는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다시 일으키기도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들 하는데, 법조인에게 예술을 위한 시간은 너무나도 짧다. 옆 방 선배는 얼마 전 결혼 10주년을 기념하여 한 명의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세 권의 기록과 함께 비행기를 탔다. 우리는 단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사무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오래된 판례와 마주할 뿐이다.
물론 우리에게 판례는 예술만큼이나 중요하다. 잘 찾은 판례 하나는 어떠한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훌륭한 방패가 되고, 가끔은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판례라고 하여 모두 다 '어벤져스'의 ‘인피니트 스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판례는 그냥 돌멩이에 불과하다. (ⅰ) 거래 당사자로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든 무기(!)를 알려 줄 수 없는 노릇인데, 판례는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당해 법률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 명백한 경우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면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98도3263), 모든 거래는 언제든지 사기가 될 수 있다. (ⅱ) 판례는 배임죄의 임무위배를 “신의칙상 당연히 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는데(2002도1696), 현재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는 모두 배임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ⅲ) “강간죄에 있어 폭행 또는 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2000도1253)과 같이 1949년(昭和24年) 일본 최고재판소의 문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판례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일찍이 괴테는 시를 접하고도 시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만큼 교양이 없는 것도 드물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어쩌면 가족들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판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판례들을 위해 우리는 한 손에 메스를 들고, 가끔은 피고인이나 피해자, 때로는 법관이나 검사의 입장에서 그것들을 여러 각도로 살펴보며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 줄 필요가 있다.
이종수 변호사 (법무법인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