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 장기해외연수로 미국에 있던 2000년의 일이다. TV 채널을 돌리던 중 우연히 한 연방대법관(케네디 대법관인지 스티븐스 대법관인지 명확하지 않다)이 전국의 학생대표들을 상대로 강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질의응답 때 한 학생이 "학교 내 라커룸에 대한 압수수색에 관하여 왜 연방대법원이 빨리 판결을 해주지 않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 대법관은 "우리는 신중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다(We don’t want to jump into conclusion)"고 답하면서,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중요한 문제인 만큼 하급심 판결들의 동향과 그에 대한 각계각층의 반응을 좀 더 지켜보고 연방대법원이 판결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사회 내의 분쟁해결방법으로서 정치적 해결과 사법적 해결은 대비되는 장단점을 갖고 있다. 정치적 해결 즉 다수결 투표는 민주주의에 부합한다는 궁극의 장점이 있지만 결론이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고질적 단점이 있다. 투표자들은 애초부터 근거를 밝힐 필요가 없고, 어떤 근거를 취하여도 무방하다는 점에서 합리성을 요구받지 않고,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요구받지도 않는다.
사법적 해결의 장점은 결론을 내린 근거가 제시되고, 결론과 함께 근거가 공개된다는 점이다. 제시되어야 할 근거에는 사실적 근거와 법률적 근거가 모두 포함되는데, 사법기관은 일관성을 요구받기 때문에 한 사건을 처리하면서 판결문에 제시한 법률적 근거 즉 법리는 사회구성원들의 행동지침이 되어 한 건의 판결은 실제로는 수많은 사건을 동시에 처리하는 기능을 갖는다.
문제는 법리 즉, 법을 찾는 것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미연방대법원은 1954년 흑백분리 교육이 위헌이라는 기념비적인 토피카 판결을 했지만, 반세기 정도 전에는 정반대로 판결했었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와 같은 최고법원의 기능인 법령해석의 통일은 국가의 법 전체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숙고의 과정이 요구되는 지난한 작업이고, 종종 어쩔 수 없이 시간의 세례가 요구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무런 제한 없이 사건들이 최고법원에 도달하는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좀 아슬아슬하다. 채 해소되지 않은 모호함 속에서 자판기처럼 법리를 생산하다 자칫 피아론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조악한 신분보장 속에서 사건이 아니라 자신을 염려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박재완 교수 (한양대 로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