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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계절
정명원 검사 (서울북부지검)
2020-10-1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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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내 사과 밭에 있었다. "사과가 다 익었는데 딸 일손이 없다"는 부모님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시끄럽고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낼 공간이 필요하기도 한 터였다. 3시간을 달려 도착한 부모님의 사과밭에는 그야말로 빨갛게 익은 사과가 한창이었다. 

 

이곳의 사과는 유난히 맛이 달고 과질이 단단하다. 한 입 베어 물면 온통 새콤하고 달콤한 과즙이 우주를 다 채울 기세다. 이 한 알의 과일을 만들어 낸 것은 고랭지의 찬 아침이다. 높은 산자락에서 태어난 바람은 한여름에도 작은 과일의 이마를 차게 식혔다. '여긴 왜 늘 이렇게 추워' 힘겹게 어깨를 펴는 아침들이 어린 것의 과육을 단단하게 뭉쳤다. 그 위로 맹렬히 쏟아지던 한낮의 햇볕이 새콤하고 달콤한 과즙으로 차올랐다. 저마다 붉게 익은 사과를 주렁주렁 달고 일렬로 도열한 사과나무들의 어깨가 으쓱해 보였다. 잘 익은 사과는 손만 가져다 대면 기다렸다는 듯이 똑 하고 떨어져서 손안에 묵직하게 담겼다. 팽팽하게 사과를 잡고 있던 가지가 마침내 홀가분하게 팔을 뻗었다. 

 

내 사무실에 두고 온 기록들에는 또 다른 의미의 사과가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 그 사과 말이다. 조서의 말미마다 관용구처럼 '잘못했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많게는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타박과 '사과를 그만큼 했는데도 받아 주지 않는다'는 원망이 캐비닛에 가득하다. 

 

제때에, 제대로 익지 못한 사과는 누구에게도 가 닿을 수 없다. 배고픔을,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다. 진정한 사과가 되기 위해서 견뎌야 할 찬 바람과 직시해야 할 뜨거운 햇살 없이는 어떤 위로로도 가 닿지 못한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끝끝내 바라보겠다는 의지와 비난으로부터 쉽사리 도망치지 않겠다는 마음이 차올라 진정한 사과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과밭에 오지 않고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세상은 늘 진정한 사과에 목마르고, 무언가를 잘못한 우리는 선뜻 그에 합당한 사과를 내어 놓지 못해 막막하다. 

 

사과가 익어 가는 계절, 사과 밭에 있으면 세상이 온통 사과다.

 

 

정명원 검사 (서울북부지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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