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에 있는 혼합형 특별형사법원인 STL(The Special Tribunal for Lebanon)은 6월 2일, 예산 부족으로 2021년 8월부터 법원 운영이 불가능함을 공표하였다. STL은 2005년 벌어진 레바논 총리 암살테러 관련 사건의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위해 설립되었는데, 국제 재판관과 레바논 판사로 구성된 재판부가 레바논 법을 적용하여 네덜란드에서 궐석재판으로 진행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어 왔고, UN 재판소나 레바논 사법부 소속이 아닌 독립된 기관으로서 42개국 출신 17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STL의 예산 중 51%는 29개 국가의 자발적 기부로 충당하고, 나머지 49%는 레바논 정부가 부담하도록 되어 있는데, 2021년 자체적으로 지난 해 예산의 37%를 삭감하였고 UN이 특별 교부금으로 상당 금액을 지원하였음에도, 레바논 국내 사정 악화와 COVID-19팬더믹 등으로 인한 기부금 확보 실패로 말미암아 마침내 운영을 중단하는 사태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당장 6월 16일 시작될 예정이던 Ayyash 사건의 재판일정도 무기한 연기되었다.
국제형사범죄를 다루는 상설 법원으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있음에도, 국제 재판관과 범죄 관련국의 판사가 함께 재판부를 구성하여 그 나라의 법에 따라 재판하는 혼합형 특별형사법원(mixed/hybrid special criminal tribunals/courts)은 범죄가 발생한 지역의 배경과 특수성을 반영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등의 장점이 있어 코소보, 시에라리온, 동티모르, 캄보디아, 레바논 등에서 꾸준히 설립되어 왔다.
또한 UN의 여러 기관들은 2003년 이래 북한인권문제의 대책을 촉구하여 왔는데, 2014년의 사실조사위원회를 거쳐 마련된 2017년 전문가 그룹의 최종보고서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책임규명방안을 모색하면서 그 중 하나로서 장래 한반도 상황이 전환기를 맞이할 경우에 대비하여 혼합형 특별형사법원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혼합형 특별형사법원은 관련된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원활한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STL의 사례에서 보듯이 해당 국가의 정치, 재정 상황의 변화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UN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의 수사 범위를 둘러싼 이견과 예상 밖의 장기화에 따른 기부 국가들의 이탈로 인하여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ECCC로서는 최근의 STL 사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주 법원은 예산 부족으로 문 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미국 출신 재판관을 제외하면, 빠듯한 예산 상황을 점검하는 내부 회의에서 ECCC 재판관들은 사건의 신속한 처리에 상당한 부담을 갖는 것으로 느껴졌다. 언제 갑자기 중단될지 모르는 형사절차를 무작정 진행하는 것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대한 침해라는 변호인의 주장이 점차 공감을 얻어 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법 정의’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사치재(luxury goods)일 수는 없겠지만, 현실의 장벽은 결코 만만치 않다(Justice is expensive. That is why there is so little of it).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연대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