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재경법원의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전산망에 대법원의 성폭력 사건의 판결 경향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올려 주목을 끈 바 있다(본보 5월 20일자 2면 참고). 성폭력 사건의 하급심 재판부가 피고인과 증인 등을 직접 대면하여 사실심리를 하였음에도 대법원이 하급심 판사들에게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됐다는 이유를 들어가며 하급심의 사실 판단을 뒤집는 경향을 완곡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 글은 성폭력 사건과 관련한 대법원의 태도를 언급하고 있지만, 오래 전부터 대법원이 소송법에서 예정한 심판범위를 넘어 사실관계까지 심리하고 있다는 논란은 계속돼왔다.
민사소송법 제432조는 '원심판결이 적법하게 확정한 사실은 상고법원을 기속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형사소송법 제383조 제4호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가 선고된 사건에 중대한 사실의 오인이 있어 판결에 영향을 미친 때'를 상고이유로 들고 있다. 따라서 대법원이 통상적으로 상고이유로 심사할 수 있는 사항에는 하급심의 사실 판단이 제외된다. 그러나 대법원은 수십 년 동안 '채증법칙 위반'이라거나 '논리와 경험칙을 위배하여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잘못'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가며 하급심의 사실 판단을 심사해 왔다.
대법원이 사실 판단에 개입하는 것에 대하여는 "우리나라 소송법 체계가 예정한 틀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비판적 주장이 있는 반면, "구체적 타당성 있는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는 대법원의 사실 판단을 어느 정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그런데 지금 대법원은 대법관 한 명이 1년 동안 4천여 건(비주심 사건 포함 시 1만6000여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기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에 법원은 여러 해 동안 상고심 제도의 개편과 개선을 시도해 왔고 남상소 방지와 사실심 충실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대법원의 정책방향과 대법원의 하급심 사실 판단 개입은 상충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대법원은 형사 항소심이 1심 증인의 진술의 신빙성을 1심 법원과 달리 본 사안에서 "1심의 판단이 명백하게 잘못됐다고 볼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다른 증거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볼 때 1심의 판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다고 인정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항소심이 1심 증인이 한 증언의 신빙성을 함부로 뒤집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바 있고(대법원 2006. 11. 24. 선고 2006도4994 판결), 이 판결은 이후 수많은 대법원 판결에서 인용되며 확립된 판례가 됐다. 이 판례를 놓고 보면, 하급심 재판부가 법정에서 적법한 증거조사 절차를 통해 확정한 사실관계를 대법원이 수시로 뒤집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법원의 상고제도 개선은 주로 상고심의 구성, 남상고의 방지와 관련된 쟁점에만 집중돼온 듯하다. 그러나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동의가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고, 그 바탕에는 사실심 심리의 충실화와 그에 바탕한 국민의 신뢰 제고가 필요하다. 대법원이 하급심의 사실 판단을 존중하는 관행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판결에 불만을 가진 당사자들이 무조건 상고를 제기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고, 결국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상고제도 마련은 요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