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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윤리를 가르치는 어떤 교수님한테 들은 이야기다. 형사사건에서 변호사의 성공보수약정은 무효라는 대법원판결에 대해 토론을 유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미 판례가 나와 있는데 굳이 무슨 토론을…"이라는 태도를 보이더란다. 그래서 이런 예를 들었다. "세금미납을 이유로 과세처분도 받고 조세범처벌법으로 기소도 되었는데, 행정소송과 형사소송에서 똑같은 쟁점이 문제되어 변호사가 열심히 다투었다고 합시다. 동일한 변론에 대해 행정소송에서는 성공보수를 받아도 되고, 형사소송에서는 성공보수를 받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런 차이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침묵을 깨고 어렵게 입을 연 학생이 이렇게 말하더란다. "대법원 판례가 형사소송에서만 성공보수를 금지하니까 형사소송에서는 받을 수 없고 행정소송에서는 받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판례 밖에서 판례의 정당성을 생각해 보자는 교수의 호소에도 학생들은 판례의 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려고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학생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변호사시험의 선택형 문제들엔 하나같이 "다툼이 있으면 대법원 판례에 따름"이란 단서가 붙고 사실상 판례 암기 테스트로 운영되고 있다. 사례형과 기록형도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학생들도 얇고 넓은 판례 암기를 목표로 삼게 된다. '판례 밖에서 판례의 정당성을 생각하는 것'은 자칫 수험준비에 혼선을 가져올 수 있다. 출중한 학생들이야 그런 심층적 공부와 수험용 공부를 문제 없이 병행할 수 있지만, 변호사시험 합격률이 50% 남짓한 상황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그런 여유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의 원산지인 미국의 로스쿨에서도 판례가 학습의 중심에 있지만 우리처럼 수천 개의 판결요지를 암기하는 방식은 결코 아니다. 때로 모순되는 다양한 판례를 소재로 하여 다양한 사고와 토론을 유도하는 방식에 가깝다. 변호사시험에서 요구되는 암기량도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적다. 판결요지에 집착하는 현재의 출제 및 학습관행은 영미식도 아니고 대륙식도 아닌 것이다.
이런 경향은 법전원 도입 후 새로 생긴 것이 아니다. 1990년대부터 몇 차례 법원이 사법시험 출제오류 및 복수정답을 인정하고 추가합격자가 나오는 소동을 겪으면서, 오류시비를 피하기 위해 판례 문구를 그대로 출제하는 경향이 심해졌다. 우려되는 것은 이런 경향이 학생들의 사고력과 창의력, 궁극적으로 실무능력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실무능력은 결코 판례를 암기하고 맹종하는 능력이 아니다. 왜 형사소송과 행정소송에서 성공보수 약정의 효력이 달라야 하느냐고 조세사건의 예를 들어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이에 멋지게 답하는 능력이 모두 실무능력이다.
교수를 10년 넘게 했으니 남의 일처럼 비판할 처지는 못 된다. 일단 사소한 몇 가지를 스스로 다짐해 본다. 학생들에게 현행법과 판례에 관한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사고를 자극하고 인사이트를 보여주자. 그리고 출제의뢰가 들어오면 논리력과 사고력을 측정하는 문제를 정성스럽게 개발해 보자. 판례는 존중할 것이지 맹종할 것은 아니다.
천경훈 교수 (서울대 로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