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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들에게도 직업병이 있다. 사법연수원 또는 로스쿨을 다닐 때는 다들 비슷해 보였지만, 자신이 진출한 직역에 몇년 이상 근무를 하게 되면 그 직역에 맞는 직업병을 하나 둘 씩 갖게 된다. 예를 들면, 검사 동기들의 경우 친구의 이전 진술과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능력을 술자리에서 종종 보여주기도 하고, 변호사 동기들의 경우 멀끔한 외모를 갖추고 뉴스를 보면서 어떻게 사건화가 될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생각을 이어가기도 한다.
판사의 경우에도 여러 직업병이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들어보려고 하는 직업병이다. 집에서 와이프가 어떤 문제를 얘기해도 상대방의 입장이 어떤지를 물어보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으면 확인을 하곤 하는데, 와이프가 기대했던 남편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행본능도 있다. 친구들과의 모임에 가도 말을 안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에게 발언권을 주어 얘기를 하게 하고, 한 주제에 관하여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로 넘어가도록 자신도 모르게 진행을 하곤 한다.
예전에는 부모님과 패키지 여행을 가서 가이드의 설명을 계속 요약 정리해서 부모님께 전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구술 변론이 활성화될 당시였는데, 당사자의 진술을 요약해서 설명하는 습관이 발현되었던 것 같다.
연차가 쌓이면서 나타나는 직업병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법정에서의 작은 표정 변화도 당사자 입장에서는 워낙 크게 느껴질 수 있고, 법정에서의 말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점점 커다란 표정 변화가 줄어들게 된다. 또한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한쪽 당사자에게 너무 감정적으로 동조하거나 호응을 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중립화하기도 한다. 꼭 내 감정이 나만의 감정이 아닌 것처럼.
가끔은 이런 직업병이 생긴 자신을 보면서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직업병의 후유증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진행도 다른 친구에게 맡기고, 보다 풍부한 감정을 느끼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권혁준 판사(서울중앙지방법원)